소설리스트

몽중연 (60)화 (60/100)

60.

산실 앞에 열두 명의 신녀들이 여섯 명씩 양옆으로 서서 저를 기다리는 것이 보였습니다. 하얀 옷을 입고 새까만 머리를 종아리까지 늘어뜨린 그녀들은 순종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으나 분위기는 흉흉하기 이를 데 없었어요. 그제야 저는 제가 이들의 궁주를 투옥하였음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들 모두가 저에게 원한을 품고 있을 테지요.

“태자비 전하를 뵈옵니다.”

낭랑한 목소리가 산실 앞 공기를 울렸습니다. 그녀들이 저를 잘 보호할 수 있을까. 신변의 걱정이 들었으나 제게도 궁녀들은 있으니까요. 앞으로 출산 때까지는 산실에서 나올 수 없는 몸, 그저 무탈하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없습니다.

“비전하, 오르시옵소서.”

서 상궁이 조심스럽게 제 손을 잡아 부축했어요. 산실은 높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하늘의 기를 받기 위해서였죠. 마흔아홉 계단을 오르는 동안 등 뒤가 서늘했어요. 저는 지금 뒤뚱거리지 않고 평소처럼 법도에 맞게 걷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었습니다. 황궁에서 신는 신발도 굽이 높은 편이고요. 여기서 만약 누군가가 제 옷깃이라도 일부러 밟는다면 저는 뒤로 쓰러질 것이고 그대로 위험에 빠질 것입니다.

물론 그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서 상궁의 반대쪽에서는 월아가 제 팔짱을 끼고 있었어요. 그녀의 팔에 단단히 힘이 들어간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 발, 올라갈 때마다 등골이 서늘해졌어요. 하지만 티를 낼 수는 없습니다. 고개를 들고 편안한 얼굴로 걸었습니다. 다행히 저는 이런 훈련이 잘되어 있어요. 아무리 발이 아파도 몸이 힘들어도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걸을 수 있지요.

궁녀들이 저를 뒤따르고 이어서 신녀들이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산실을 오르는 것인지 신에게 저를 바치러 가는 것인지 혼란스러울 정도로 계단이 높았어요. 마흔아홉 개의 계단은 각각 의미가 있고 그 계단들은 하나같이 높았습니다. 고대에는 신발을 벗고 기어오르라 했다고 해요. 신을 향해 가는 의미로. 그게 차라리 편하기는 더 편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산실에 들어서자마자 알 수 있는 건 사방이 뚫린 공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전체가 분합문이라 문을 위로 접어 올릴 수 있는 형태였어요. 제가 들어왔을 때는 기둥만 남기고 문을 전부 접어 올리고 있어 사방에서 하얀 휘장만 휘날리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휘장들이 바람에 휘날렸어요. 새하얀 휘장들. 그리고 정화를 의미하는 은 주렴들. 청아한 그 소리들이 이상하게 무서웠습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어요.

“비전하, 염려하시지 마시옵소서.”

신궁의 궁주 대리로 보이는 여인이 제게 다가와 상냥한 목소리로 웃어 보였습니다.

“이 산실은 앞으로 해산일까지 신성히 지켜질 것이옵니다. 그 어떤 삿된 것도 신명의 이름으로 드나들지 못할 것이니, 비전하를 괴롭혀 온 것들 또한 감히 다가서지 못할 것이나이다.”

“본궁을 괴롭혀 온 것들?”

제 어깨 위에 있는 외투를 월아가 벗겨 주었습니다. 서 상궁이 제 손을 잡고 바로 침상으로 이끌었어요. 궁주 대리가 저와 함께 천천히 걸었습니다. 그녀가 손을 뻗어 저를 부축하려 했지만 저는 거절했습니다. 모르는 여인의 손을 잡고 싶진 않았거든요. 그러자 그녀가 예의 있게 고개를 숙이고는 싱긋 웃었습니다.

“심씨 가문의 선조들 말이옵니다.”

선조들?

제가 의아히 그녀를 바라보자 궁주 대리가 “어머.” 하고 웃었습니다. 그 웃음이 얼마나 가소롭던지요. 그녀는 제가 모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걸 모르는 게 말이 되냐는 듯이 웃고 있었어요. 이런 도발에 제가 넘어가리라고 생각한다면 정말 우스운 일입니다. 황궁에서 가장 많이 당하는 저급한 도발이고 실제로 이런 도발에 걸려든 적은 아주 어린 시절에도 없었어요.

저는 그녀의 수작에 실소했습니다. 제 실소에 그녀는 자신의 속내가 알려졌다는 걸 깨달은 듯했어요. 부끄러운 건지 아니면 수치스러운 건지 그녀의 얼굴이 희미하게 달아올랐습니다. 보기 좋진 않았습니다.

“심씨 가문의 선조들이 모두 태자비 전하께 붙어 있사옵니다. 가문의 생자가 한 분뿐이시니까요.”

“망측한 소리를 하는군. 황후마마의 가문이 건재하시다.”

황궁 안에서 이딴 소리를 하다니 어이가 없을 뿐이었습니다. 위험한 발언에 저뿐만 아니라 서 상궁이나 월아의 얼굴도 완전히 굳어졌습니다. 궁녀들과 제 얼굴이 굳어지거나 말거나 궁주 대리는 태연했어요.

“송구하오나 선조가 인정하지 않은 핏줄을 어찌 핏줄이라 하겠사옵니까.”

제가 눈살을 확 찌푸려도 궁주 대리의 얼굴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저는 침대 위의 금금을 톡톡 두드렸습니다. 혹시 그녀가 바른말을 하는 것인지 순간 혼동이 올 정도로 궁주 대리가 당당했어요.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손을 들어 바로 궁주 대리의 뺨을 내리쳤습니다. 가능한 한 세게 내리쳤어요. 궁주 대리의 몸이 휘청하며 바닥으로 쓰러질 정도로.

“무엄하구나!”

이 산실에 간자가 없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황후마마의 간자로 추정되는 궁녀들은 데려오지 않았으나 그래도 확신하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이 궁주 대리가 황후마마의 간자로서 저를 시험하는 게 아니라는 확증도 없고요.

“하오나, 비전하.”

“천한 것이 감히 본궁의 해산을 빌미로 황후마마를 능멸하려 들어?! 추국장으로 끌려가 봐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엄한 목소리로 언성을 높이자 궁주 대리가 파르르 떨었습니다. 그녀의 어깨를 보면서 저는 그녀의 떨림이 진심일지 거짓일지 가늠해 보려 애썼어요. 그런 건 불가능합니다.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가늠해 보고 싶어 하는 게 사람 마음인 것 같아요.

“송, 구하옵니다….”

몸을 떠는 모습에서도 두려운 기척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분한 내색도 없어요. 그녀는 그저 순종적으로 제게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입니다. 마치 자신이 온전한 저의 편이라도 되는 것처럼요.

뭔가, 이상했습니다.

딱히 설명하긴 어렵지만 뭔가,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기분이 듭니다.

“너는….”

저도 모르게 말이 나왔어요. 너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라고 말이 나올 뻔한 것을 겨우 입을 다물었습니다. 뒤를 생각할 수 없는 발언은 하는 게 아니에요. 제가 감당할 수 없는 대화는 하지 않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도대체 이 여인이 왜 이러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첫날은 그렇게 시작이 되었습니다.

***

짝!

제가 누군가를 때리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따귀 소리가 산실 앞을 울렸습니다. 아악, 하는 비명과 함께 무언가가 산실 계단을 구르는 소리가 났어요. 제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자 서 상궁이 서둘러 뒤에 있는 궁녀에게 손짓했습니다. 알아보라는 그 손짓에 그녀가 튀어 나가듯 달렸어요. 휘장이 마구 흔들렸습니다. 이윽고 그녀가 돌아와 서 상궁의 귓가에 다급히 내용을 풀었고 서 상궁이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습니다.

“비전하, 궁주 대리가 신녀 한 명의 뺨을 때렸고 그 신녀가….”

“신녀가?”

“계단을 굴렀다고 하옵니다.”

마흔아홉 개의 계단을 굴렀다고?

“살았더냐?”

제 말에 서 상궁이 바로 소식을 가져온 궁녀를 바라보았고 궁녀가 황망히 무릎을 꿇었어요.

“송구하옵니다, 전하.”

모른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당연하지요. 마흔아홉 단의 계단 위에서 떨어진 여인을 내려다보았으니 그녀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그저 그 참혹한 모습을 보고 달려왔을 뿐인데요. 모르는 게 당연합니다.

“아니다.”

그녀가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는 그녀를 용서하여 안심시켜 주고 월아에게 시선을 주었어요. 늘 제 옆에 시립해 있는 월아는 제 시선을 받자 고개를 희미하고도 정중하게 끄덕여 보이고는 바로 움직였습니다. 그녀가 살았는지, 왜 그녀가 그런 일을 당했는지 자세히 알아내기 위해서였죠. 이런 일을 알아내기에 월아만한 적임자가 없습니다.

월아가 그 일을 자세히 알아 오는 동안 저는 서 상궁이 차려 준 점심을 먹었습니다. 식사는 모두 외부에서 들여오는데 신녀들이 정화를 마치고 궁녀가 기미를 한 다음에 제게 옵니다. 당연히 식사는 모두 식을 수밖에 없어서 서 상궁은 제게 식사를 차려 줄 때마다 몹시 애달픈 표정을 지었습니다. 가뜩이나 입맛이 없는 제가 거의 음식을 먹지 않으니까요.

“비전하, 조금이라도 더 드셔야 하옵니다.”

서 상궁의 말에 한 입을 더 떠 보지만 역시 입 안은 깔깔하고 음식이 넘어가질 않습니다. 산실에 들어온 이래 모든 음식에서 쇠 맛이 나는 기분이에요. 음식이 식어서인지 정화 의식을 거쳐서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음식을 억지로 몇 입 더 먹고 나서 결국 물리는데 월아가 돌아왔습니다. 차를 마시는 동안 한쪽 손을 내밀었고 월아가 제 손바닥에 빠르게 글자를 적기 시작했어요.

월아의 말에 의하면 신녀는 죽었습니다. 신녀를 때린 건 궁주 대리였고 때린 이유는 저를 잘 모시지 못해서라고 합니다. 신녀가 제 시중을 들 일이 뭐가 있다고? 의아한 저에게 월아가 설명해 주길 108개의 초 중 하나가 조금 삐뚤어지게 놓여 있었는데 그것을 빌미로 뺨을 맞아 계단에서 굴러 죽었다는 것입니다.

어찌 그런 일이 일어날 수가? 고작 초 하나가 조금 삐뚤어지게 놓였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이다니요? 더 이상한 일은 그다음에 일어났습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신녀의 시신은 사라졌고 다른 신녀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입니다. 그제야 소름이 끼쳤어요. 신녀들은 다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머리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누가 누군지 잘 구분이 가지도 않아요. 그런 이들 중 하나 죽어 나가고 다른 하나가 그 자리를 채웠습니다. 마치 모두가 다 똑같은 부속품인 것처럼 취급받는 것입니다. 황궁의 시녀들도 이런 취급은 받지 않는데요.

“월아야.”

제가 월아를 부르자 월아가 자신의 귀를 제 입가에 가져다 댔습니다. 저는 그녀에게 명을 내리려다 주변을 살폈어요. 날이 좋아 사방의 분합문이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천상계에 있는 정자에서 머무르고 있는 것처럼 하얀 휘장이 휘날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이 아찔한 곳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요.

귀는 어디에나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습니다. 월아가 눈치 빠르게 자신의 손을 저에게 내밀어 주었습니다. 저는 그녀의 손바닥을 펴서는 잠시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빠졌다가 손가락을 움직였습니다.

연락은 언제냐?

월아가 주변을 흘끗 살피고는 한 손으로 자신의 손가락을 감추며 제 손바닥에 글을 썼습니다.

내일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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