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몽중연 (57)화 (57/100)

57.

오랜만에 뵙게 된 어른들은 하나같이 저를 못마땅히 여기셨습니다. 당연한 일이었어요. 저는 겉으로는 순종하면서 속으로는 주변 분위기를 확인했습니다. 달라진 인사는 없는지, 제 간자들은 제자리에 있는지, 궁에 호사스럽게 바뀐 것은 없는지 확실하게 챙겼어요.

몇 가지 알게 된 것은 태후마마와 황후마마의 줄다리기가 현재는 태후마마의 우세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태후마마의 궁은 으리으리한 장식품들로 가득한 데 비해 황후마마의 궁은 제가 아는 데에서 거의 변화가 없었습니다. 아니 몇 가지 장식품은 빠진 것 같았어요. 아마 뒤로 파셔서 돈을 마련하신 게 아닐까… 추측됩니다.

후궁 생활이란 돈이 엄청나게 듭니다. 한 발짝 걸을 때마다 돈이에요. 간자들, 내관들, 조정 신료들에게 주어야 하는 돈만 해도 내탕금을 훨씬 넘어섭니다. 후궁으로서 권세가 있으려면 엄청난 총애를 받든가, 아니면 총애를 적당히 받으면서도 저 모든 돈을 감당할 만큼 뒤로 지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지원을 해 줄 가문이 지금 파산 직전이니 황후마마는 몹시 곤란한 처지에 놓이셨을 겁니다.

그렇다면, 저에게는 당연한 수단이 있습니다.

제게는 저에게 한정 없는 돈을 지원해 주시는 지아비가 계시니까요.

“황후마마, 그동안 신첩이 효도를 다하지 못하여 송구하기 이를 데 없사옵니다. 불초한 신첩을 용서하시옵소서. 이것은 미력하오나 신첩의 성의이오니 부디 받아 주시옵소서.”

미력한 물건이 아니었어요. 그 물건은 청금석으로 만들어진 귀걸이, 목걸이, 비녀, 그리고 산호와 진주로 만들어진 떨잠, 동방에서 가져온 부채 등이었습니다. 하나같이 매우 귀한 것들이었어요. 황후마마께옵서는 꽤 호화로운 걸 좋아하는 취향이셨습니다. 당연히 제 선물을 기뻐하셨지요.

저는 두 달간 매일 문안 인사를 드리면서 후궁마마들께 적당한 선물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황후마마께는 결코 적당하지 않은 선물을 보냈어요. 호사스러운 선물이었습니다.

황후마마의 궁은 순식간에 그 어느 궁보다 화려해졌습니다. 제가 보낸 선물들이 그분의 궁을 아름답게 만들었지요. 하지만 저는 선물을 적당히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정작 침소를 꾸밀 선물은 보내지 않았어요. 객과 있는 공간들은 아름다워졌지만 황후마마의 침소는 여전히, 아니 비교당하며 더 초라해졌습니다.

그리고 다른 후궁마마들께 보낸 적당한 선물이란 바로 비단이었습니다. 질 좋은 비단. 아름다운 비단. 그리고 무엇보다 유행하는 비단을 보내어 황후마마의 옷차림을 구식으로 만들었습니다. 황후마마는 자존심 때문에 어쩔 줄 몰라 하셨죠.

하지만 저에게 선물을 요구하실 수는 없으셨어요. 제가 황후마마께 올리는 선물이 더 좋은 것이었거든요. 장신구들이 더 귀한 것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장신구가 아무리 많아도 옷이 허름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지요.

그리고 한편 저는 난생처음으로 돈놀이를 시작했습니다. 사왕부의 사왕비 전하를 통해서였죠. 사왕비 전하는 화려하고 유행을 잘 알며 말솜씨가 좋고 대범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사왕 전하와 아주 금슬이 좋으시지요. 사왕 전하께서는 태자 전하께옵서 그분의 생명을 구하신 적이 있어 서로 가장 가까운 형제십니다. 그러니 믿을 만했습니다. 그렇다고 아주 믿을 수는 없지만요.

사왕비 전하는 후궁들을 교묘하게 부추기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저는 그렇게는 못 했을 거예요. 어찌나 교활하게 이리저리 부추기는지 후궁마마들께서는 사왕비 전하에게 돈을 빌려 장신구들을 구입하시기 시작하셨어요.

황후마마를 거스르지 않는 수준에서 충분히 더 아름다워 보일 수 있는 장신구들을 사왕비 전하가 공급하기 시작하자 그 장신구의 본래 가치보다 몇 배나 되는 돈을 주고선 장신구를 구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돈들은 전부 빚이 되었고요. 그저 종이에 써서 자신의 도장만 찍으면 하룻밤의 연회에 근사히 보일 수 있는 장신구가 손에 들어오니 후궁마마들께서는 곧 현실감을 잃으셨습니다.

“비전하, 채장(남에게 빌린 돈의 금액을 적는 장부)이 채워져 가고 있사옵니다.”

사왕비 전하께서 어느 날 말씀하셨을 때 저는 배가 조금 나왔어요. 7개월. 저와 사왕비 전하의 일은 수월하게 풀려 가고 있었습니다. 모두들 아무 생각 없이 도장을 찍은 채장에는 어마어마한 빚이 기록되어 있었어요. 이제 슬슬 빚을 받아 낼 시점이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어렵지 않으리라고 예상했었습니다. 하지만 빚을 받아 내는 건 아마 저항이 상당할 것이어요. 그러니 여러 방도가 필요했습니다. 황후마마를 먼저 건드릴 수는 없었어요. 밑에서부터 치고 올라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장 마음이 약하고 배경도 없는 후궁부터 돈을 갚으라고 압박하기 시작했어요. 조금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녀 또한 허영심에 빚을 썼으니 어찌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도 결국 그녀와 똑같은 일을 겪을 테니까요.

“지금 폐하의 여인인 저를 겁박하시는 것이옵니까?”

그녀는 무척 화를 냈습니다만 사왕비 전하는 그녀보다 일단 품계가 위였습니다. 그리고 채장에 도장을 찍은 이상에 그녀가 갈 곳은 없었어요. 음전하게 지아비만을 섬겨야 할 여인이 허영심을 이기지 못하여 고리채를 썼다는 게 알려지면 무척 큰일이 날 터이니 어쩔 수 없이 그녀는 빚을 갚아야 했지요.

제 돈은 이자가 상당히 높은 편이었어요. 정확히 말하자면 일주일은 이자가 없고 한 달부터는 이자가 높아지는 것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이 높은 이자를 다 물 수 없으니 그녀는 사왕비에게 산 장신구를 빼앗기고도 이자값으로 도움을 줘야 했습니다. 이자값이 될 만한 것을 말해 보라 했더니 그녀는 아는 대로 모든 걸 말했습니다. 별로 득이 될 만한 것이 없어 돈으로 받아 내려는 찰나에 그녀가 말했어요.

“태후마마께옵서 뇌물을 받고 계십니다.”

뇌물을 받는 게 뭐 그리 신통한 일이겠습니까만은 이 일은 사정이 조금 달랐습니다.

“대, 대리시가 태후마마의 손아귀에 있다는 걸 아시는지요?”

“…무엄한 소리를 증좌도 없이 한다면….”

“대리시에 누군가가 잡혀간다면 태후마마의 상궁에게 뇌물을 줘 보십시오. 틀림없이 무사히 풀려날 것입니다.”

대리시는 정5품 이상의 관리들이 죄를 지었을 때 그 죄를 다스리는 곳입니다. 그런 곳을 뇌물을 받고 태후마마께옵서 좌지우지하고 계신다고요? 다른 후궁에게도 빚을 핑계 삼아 물었더니 그러하다고 답변했습니다. 후궁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이야기라면서요.

태후마마라….

생각지도 못한 거물이 걸려들어 사왕비 전하와 저는 몹시 당황했습니다. 태후마마의 권력은 막강합니다. 황후마마보다 더 막강할 수도 있지요. 태후마마의 권력은 돌아가신 선황으로부터 나오고 그 권력은 불가침의 대상이니까요. 하지만 대리시를 뇌물을 받고 좌지우지했다? 이건 아무리 태후마마여도 넘어갈 수 없는 문제입니다.

어떻게 이게 후궁들 사이에서는 이토록 만연하게 퍼졌으면서도 외명부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을까요? 그게 가능할까요? 후궁들과 외명부는 사실 아주 가까운 사이들이신데요.

아니, 다들 아시는 거겠죠. 알지만 모두 쉬쉬하는 겁니다. 그렇겠죠. 외명부에서 무슨 일이 생겨 대리시로 넘어간다면 연줄이 닿는 후궁을 통해 대비마마께 뇌물을 바치고 풀려나는 겁니다. 이런 좋은 경로를 어찌 드러내어 없애 버리겠습니까? 다들 쉬쉬할 수밖에요.

그래서 이걸 드러내면 어떻게 될까요? 가장 좋은 경우는 대비마마의 몰락입니다. 그러나 그건 꿈같은 경우고 대비마마께서는 조금 자존심이 상할 뿐 대리시와는 연이 끊기시겠으나 그것으로 그만, 대리시도 대비마마도 굳건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방법을 달리 해야 합니다.

***

“비전하, 준비가 끝났사옵니다.”

사왕비 전하가 그렇게 말씀해 주셨을 때 저는 임신 8개월이 거의 다 되었을 무렵이었습니다. 매일이 조금 힘들었어요. 배가 당겼고 온몸에서 힘이 빠졌습니다. 입맛이 없었어요. 태의들은 태아가 생각보다 크다고 했습니다. 위장이 많이 눌려서 더 입맛이 없을 거라고요.

식사를 제대로 못 하자 매일 힘이 들었습니다. 채장을 읽는 것도 어려워졌어요. 눈이 침침했기 때문이에요. 회임을 하면 눈까지 안 좋아진다고는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었는데…. 이를 악물고 봐야 겨우 채장이 보였습니다.

월아에게 채장을 보는 걸 부탁했어요. 월아는 후궁들의 빚에 깜짝 놀랐지만 곧 그럴 법하다고 이해하는 얼굴이 되었습니다. 그녀들의 경쟁심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니까요. 이기지 않으면 모든 것에서 뒤떨어지는 곳이 후궁입니다. 경쟁심이 허영 때문이라고 탓할 수만은 없어요.

“그래, 이름이 뭐라고 했지요?”

“한승헌.”

“한승헌, 한승헌….”

“태자 전하께서는 아실 만한 이름입니다. 무과에서 장원을 했고 이름도 알려져 있는 인물이니까요. 제 누이가 후궁이 아니었더라면 이런 일에 결코 발도 들이지 않을 사람이지요.”

정의로운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누이가 빚을 지자 어쩔 수 없이 이런 일에 참여하게 됐지요. 피는 물보다 진하니까요.

“그래요….”

저는 죄책감이 슬며시 고개를 들려고 하는 걸 내리눌렀습니다. 아니요, 저는 태자 전하께서 이기실 수만 있다면, 그분이 안전하실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겁니다. 그게 어떤 일이든 상관없어요. 아무리 지저분한 일이어도 반드시 해낼 겁니다.

“왕비 전하께오서는 왕부로 물러가 계세요. 나머지는 본궁이 알아서 하겠습니다.”

“비전하.”

사왕비 전하가 저를 불러서 채장을 보다 말고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러자 사왕비가 한숨을 쉬었어요. 저보다 먼저 아이를 낳아 아이가 둘이나 있는 그녀는 요즘 제 몸 상태에 대해 걱정이 태산과 같았습니다.

“강녕하셔야 하옵니다.”

“그럼요.”

저는 사왕비 전하를 향해 웃어 보였습니다. 제 웃음에 사왕비 전하가 얼굴을 찡그리는 것처럼 웃었어요. 그녀는 저에게 직접 쑨 죽이 든 도시락을 남기고 제 궁에서 물러났습니다. 늘 고마운 사람이에요. 하지만 저는 그 죽을 먹기 전 월아에게 넘겼습니다. 월아가 은수저로 기미를 하는 동안 차가운 눈으로 그 죽을 바라봤어요.

좋은 사람이라는 건 알아요. 걱정해 주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저는 낭떠러지 바로 앞에 서 있어서 어떤 것도 실수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까.

미안하다는 말을 속으로 삼킨 채 그 죽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월아가 다른 궁녀에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자 궁녀가 화로를 가져왔어요. 그 화로 위에서 죽은 다시 데워졌습니다. 월아가 직접 데웠어요. 저는 임신 중입니다. 아무도 믿을 수 없어요. 먹을 것에 있어서는 특히 그렇습니다. 물 한 잔, 차 한 잔도 조심해야 합니다.

죽은… 맛있었어요.

태자 전하를 지키기 위해서 하기로 마음먹은 일들, 하고 있는 일들이 떠오릅니다. 그 일들은 종종 아프게 제 마음을 할퀴어요. 그래도 후회는 되지 않아요.

죽을 먹고 있자니 태자 전하께서 들르셨어요. 그분은 요즘 제 몸 상태가 안 좋아지자 시간이 날 때마다 제게 들러 주고 계셨어요. 그분의 일정을 대충 알기에 그분이 지금쯤 시간을 내어 오실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화로 위에서 데워지고 있는 죽에 손을 대려고 하자 태자 전하는 궁녀들을 물리시면서 저를 자리에 앉히셨어요. 그리고 손수 죽을 뜨셔서 자신의 앞에 두셨습니다. 우리는 나란히 앉았어요. 건너편에 앉으면 조금 멀게 앉아야 하니까요. 태자 전하께서 제 뺨을 어루만지셨어요.

“오늘은 덜 힘드셨습니까?”

힘들지 않았느냐고는 묻지도 않는 제 다정한 지아비의 얼굴은 늘 아름답고 당당하고 위엄 있습니다. 저는 그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 말했어요.

“심상운 대감의 배.”

“응?”

“그 배, 전하께서 가지고 계시옵니까?”

해적에게 나포되었다는 배를 태자 전하께 찾는 것은 무척 무엄한 일입니다. 그러나 저는 왠지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 배는 태자 전하께 있고 저에게는 거짓을 말씀하시지 않으시리라는. 제 말에 태자 전하께옵서는 잠시간 말이 없다가 조심스럽게 죽을 한 수저 뜨셨어요. 후, 후, 하고 불어 식히시더니 제 입 앞에 죽을 대 주셨습니다.

“그렇다면요?”

여상한 목소리였습니다.

“하면, 신첩 청이 있사옵니다.”

“이 죽 한 그릇 다 드시면 무슨 청이든 들어드리지요. 그 배를 돌려드리는 것이든, 그 배를 부수는 것이든. 그러니 자, 아, 하세요.”

이제까지 저는 조금 시무룩했었는지도 모릅니다. 임신한 몸으로 계속 나쁜 수단을 쓰는 것이 속상했었는지도 몰라요.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 기분들은 모두 날아가고 행복한 기분만 남았습니다. 저는 괜찮아요, 세상에서 제일 나쁜 사람이 되어도. 이분만 계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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