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몽중연 (54)화 (54/100)

54.

잠시간 고모님은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제가 이렇게 나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신 듯 조금 충격받으신 얼굴이셨어요. 화가 나신 듯도 했고 허를 찔리신 듯도 했습니다. 어쨌거나 그분은 결정을 하셔야 했어요.

그리고 저는 그 결정이 무엇인지 압니다. 저분은 제가 집안의 한을 풀길 바라시죠. 그리고 저희 가문의 생존자는 저와 고모님뿐입니다. 고모님이 못 하신다면 남은 이는 저뿐이니 고모님께서는 저라는 패를 놓으실 수가 없으십니다.

“하면, 비전하.”

고모님이 탁, 소리가 나도록 찻잔을 내려놓으셨어요.

“감당을 하실… 준비는 되셨사옵니까?”

“감당을 하느냐 마느냐는 저의 몫입니다. 마음을 쓰게 해 드렸군요.”

저는 물러나지 않을 거예요. 저는 기필코 이 상황을 알아야겠습니다.

고모님은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하셨습니다.

이야기는 매우 길고 지루한 부분이 많았습니다. 신궁의 교리 부분부터 다시 들어야 했어요. 신궁의 교리에 의하면 사람은 선택을 하고, 선택의 순간 세계는 나누어집니다. 가령 예를 들어 제가 누군가에게 청을 받는다면 그 순간 세계는 갈라집니다. 제가 청을 들어준 세계와 제가 청을 들어주지 않은 세계가 움직이죠.

세계는 나무입니다. 그 근원, 뿌리에는 하늘신이 계시죠. 그분이 세상을 만들려고 하신 순간부터 이 뿌리는 뻗어 나갑니다. 해를 만드신 때와 만들지 않으신 때, 달은 만드신 때와 만들지 않으신 때, 해는 만드셨는데 달은 만들지 않으신 때, 등으로 갈라지게 되는 거죠. 그렇게 세계는 계속 나무로 커 가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신궁의 궁주들, 즉 꽃잎을 타고 난 저와는 달리 불꽃을 타고난 그분들은 다른 가지에 있는 자기 자신과 연결될 수 있다고 합니다. 쉬운 일은 아니라고 해요. 많은 기력을 소모하는 일이라 한 주에 한 번 정도밖에 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제야 저는 고모님의 얼굴이 이상하도록 급격히 노화된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저분은 지금 다른 세계의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시는 중이에요. 그건 분명 기력을 소모하는 정도의 일이 아닐 겁니다. 수명을 깎는 일이겠지요.

“그래서요?”

제가 꾸었던 꿈들. 그 속의 고모님의 태도. 그런 것들을 본다면 이후의 이야기는 대충 짐작이 갔습니다. 저를 빤히 바라보시며 고모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세계의 자신과 이야기를 나눌 수는 있지만.”

고모님은 미간을 찌푸리셨어요.

“다른 세계에 있는 영혼을 여기로 끌어오는 건 전무후무한 일입니다. 비전하, 당신의 영혼은 두 번 옮겨졌습니다. 처음에는 냉궁에 계셨고, 거기서 미래로 옮겨 드렸죠. 그리고 다시 이쪽으로 옮겼습니다. 전장으로 달려가 태자 전하를 돌아오시도록 하였고요. 모든 것은 오롯한, 이 고모의 힘입니다.”

고모님의 얼굴에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구하고 싶었던 사람은 제가 아니었을 거예요. 제 아버님이셨겠죠. 왜 안 구하셨는지도 알 것 같습니다. 저는 고모님의 생각을 알 수 있었어요. 마치 아주 맑은 물 밑을 들여다보는 것처럼요.

왜냐하면 저는 심씨 일족이니까요. 종가에서 태어난 바로 그 사람이니까요. 웃음이 나올 것 같은 걸 간신히 참았습니다. 얼마나 자신의 오라버니인 제 아버님을 구하고 싶으셨을까요. 얼마나…. 정녕 저 따위는 구하고 싶지 않으셨을 텐데.

“그러니 빚을 갚으셔야지요.”

고모님이 턱을 치켜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목소리는 마치 황상의 것처럼 위엄이 넘쳐흐르고 있었어요. 하지만 저는 늘 황상을 뵈었던 몸입니다. 그런 위엄에 짓눌리기엔 진짜 위엄을 알고 있지요.

“고모님.”

제가 듣기에도 저의 목소리는 어린애를 달래는 듯한 어조였어요. 뿔난 어린애를 한심해하며 달래는 듯한 그런 목소리 말입니다. 제 목소리에 고모님의 눈초리가 치켜 올라갔지만 저는 입가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았습니다.

“거래를 하실 때는 상대에게 거래를 할 거냐고 묻고, 그 의사를 타진한 다음 진행하시는 거랍니다.”

“심서혜….”

“제가 살기를 바란다고 왜 생각하세요?”

태자 전하를 전장에서 돌아오게 하고, 그분을 황위에서 멀어지게 하고, 진흙투성이로 만들고. 그런 존재가 될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여길 거라고는 생각지 못하셨나 봐요. 그러시겠죠. 늘 본인들이 가장 중요한 분들이시니까.

다른 사람이 더 중요한 마음 같은 건 알지 못하시겠죠. 심씨 가문이, 오로지 그 가문만이 영광된 분들이시니까요. 그 가문을 위해서라면 누가 죽든 무슨 마음이 다치든 다 상관없는 분들이시니까요. 저도 괜찮아요. 제가 다치는 건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어요. 그런데 전하는 안 되겠어요. 제가 그건 용납하지 못하겠어서.

“빚은 누가 누구에게 진 건지 모르겠네요?”

“이년….”

“…년? 궁주, 그대는 여기가 어디로 보이지? 본궁이 누구로 보이는가?”

고모님이 늙으시든 죽으시든 그게 저와 무슨 상관이죠? 저를 살렸다고요? 아니요, 태자 전하를 곤경에 빠뜨리신 거죠. 전하를 전장에서 돌아오게 했다고요? 그분이 그다음에 무슨 일을 겪으셨는데요? 약을 드신 걸로 추정되고 불타는 동궁에 갇히셨고 그분의 죽음을 모두가 구경하고 있었으며 잘못했으면 돌아가시거나 그 존귀한 얼굴을 반이나 잃으셨을 거예요. 그런데, 그게 오롯한 고모님의 힘이라면.

제가 어찌 원망하지 않을 수가?

제 얼굴을 본 고모님이 하얗게 질리셨어요. 설마하니 제가 이렇게 나오리라고는 생각도 못 하셨다는 얼굴이셨어요. 네, 저는 언제나 순종적이었죠. 한 번도 고모님한테 이렇게 해 본 적이 없어요. 집안 어른들한테 제가 어떻게 큰소리를 내나요. 불가능한 일이었죠. 하지만 저는 지금 눈에 뵈는 게 없어요. 너무 화가 나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요. 자꾸 웃음이 나오려고 하는데 눈가가 뜨거워요.

울지 말아야죠.

이분 앞에서는 울지 말아야죠. 그런 나약한 모습, 절대 보이지 않을 겁니다.

“정녕 본궁이 가벼워 보였구나. 아니 그러냐?”

고모님을 향해 차갑게 뇌까리자 고모님이 마른침을 삼키셨어요. 그분도 아세요. 지금 그분은 바닥에 엎드려 죄를 청해야 하는 때입니다. 하지만 그러실 수 없죠. 자존심이 드높은 분이니까요.

제가 태자비가 되었어도 그건 다 집안의 덕. 실제의 저는 가련하고 어리석은 허수아비일 뿐이라고 늘 생각하셨으니까요. 이건 제 생각이 아니에요. 언제나 저에게 대놓고 말씀하셨어요. 빠릿빠릿한 허수아비가 되라고. 아니면 밀짚을 죄 뜯어 놓을 테니까, 라고 하신 분이세요.

“여봐라.”

제가 밖의 사람을 부르자 장지문이 열렸습니다. 소리 없이 하나, 둘, 셋, 세 겹의 장지문이 열리고 그때마다 시립해 있는 궁녀들이 보였어요. 장지문 한가운데 서 상궁이 서 있었어요. 그리고 왼쪽 문가에서 조금 나와 있는 곳에 월아가 있었습니다. 서 상궁은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없는 얼굴로 미소 짓고 있었고 반대로 월아는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무표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금위병을 불러라.”

궁녀들은 이미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을 겁니다. 독대라고 하여도 목소리를 낮출 곳에서만 낮췄을 뿐 높여야 할 부분에서 높였으니까요. 심지어 고모님은 저에게 심서혜니 년 소리까지 붙이셨죠. 제 궁 안에서요. 무슨 뜻인지 너무나 훤할 겁니다.

마치 불러다 놓은 것처럼 금위병들이 바로 들어와 고모님을 포박했습니다. 고모님의 눈이 커졌어요. 설마 이럴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얼굴이었습니다. 자신이 저를 살렸는데 어떻게 자신에게 이럴 수 있느냐고 그 눈이 말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눈을 보며 환하게 웃었어요.

“잠시간만 반성하려무나.”

아마 고모님은 아셨을 거예요. 그분이 그러셨잖아요. 저는 거짓말을 할 때 환히 웃는다고요.

저는 고모님을 내보낼 생각이 현재는 없습니다.

***

신궁의 궁주와 제가 척을 졌고 노한 제가 동궁의 옥에 궁주를 가두었다는 소식이 황궁 안에 파다히 퍼졌습니다. 월아와 서 상궁이 소문을 퍼다 날랐어요. 신궁의 궁주는 황상께옵서도 건드리기 어려우나 태자비에게 년 소리를 한 이상은 이야기가 다릅니다. 궁주가 황상께 놈 소리를 했다면 궁주가 아니라 천지신명 그 자체였어도 구족을 멸했을 겁니다. 그러니 이 정도로 끝난 걸 궁주는 천만다행으로 알아야 합니다.

저는 일부러 고모님을 동궁에 가뒀어요. 대리시에서는 고모님의 죄를 심리하겠다며 몇 번이나 고모님을 인계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못 들은 척했어요. 대리시에게 고모님을 건넬 수는 없었습니다.

고모님이 어디 가서 무슨 이야기를 떠들지 알 수 없으니까요. 무슨 이야기를 떠들지 모르는 상황이라면 아무 말도 못 떠들게 해야 합니다. 동궁에서는 떠드시기 어렵죠. 제 손바닥 안이기도 하고 서 상궁이나 월아, 그리고 무엇보다 태자 전하께서 관리하시니까요. 여기서는 고모님이 무엇도 하실 수 없습니다.

아, 다른 세계의 자신에게 스스로를 구해 달라 청하실 수는 있겠네요. 어떻게 구할지는 모르겠지만요.

제 평판은 상당히 떨어졌습니다. 신궁의 궁주에게 년 소리를 들은 것으로 저의 신성함이 의심받게 된 거죠. 물론 고모님의 신성함도 같이 의심받게 되었지만요. 상관없습니다. 저는 한 번도 제가 꽃잎으로 태어나서 좋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아니 단 한 번, 있었던 것 같기도 하네요. 한 번 있었던 것 같은데 언제였지….

어느 가을날이었나…. 분명히 한 번, 꽃잎으로 태어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적이….

생각을 가만가만 되짚어 보았습니다. 언제였더라. 아주 희귀한 경험이에요. 저는 꽃잎으로 태어난 게 번거롭고 힘겹기만 했거든요. 왜 꽃잎으로 태어난 걸 다행스럽게 여겼지? 의아해서 가만히 생각을 더듬고 있자니 생각이 아른아른하다가 갑자기 확 떠올랐습니다.

어느 가을날이었어요. 아직 어린 태자 전하께서 서연에 드셨습니다. 저는 태자 전하를 뵙고 싶었던 것 같아요. 당시 저는 조금 힘들고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아직 몰랐습니다.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알면 힘을 낼 수 있을 것 같았기에 무척 충동적으로 그분을 찾아갔습니다.

벌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때는 매일 벌을 받던 때라 더 이상 벌을 받는 게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분을 뵈어야 한다는 생각에 황궁을 헤맸어요. 모험을 하는 기분이었습니다. 황궁은 너무 넓었고 저는 너무 작았고, 제가 작은 발로는 후궁에서 동궁까지 가는 길이 멀었거든요.

서연에 드신 태자 전하를 먼발치에서나마 볼 수 있었던 건 날이 좋아 분합문을 올려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아, 그래요. 이 기억을 제가 왜 잊고 있었을까요. 한 번 기억이 나니까, 갑자기 기억이 우르르 쏟아집니다. 맞아요, 그날 태자 전하를 처음 뵈었어요. 그날이 진짜 처음 뵈었던 날이에요. 서연을 드신 태자 전하가 누군지는 바로 알 수 있었어요. 어른들 사이에 어린아이는 단 한 명뿐이었거든요.

저는 그때 무척 충격받았습니다. 저는 늘 어른들 사이에서 주눅 들고 괴로웠는데 어린 태자 전하께옵서는 당당하셨어요. 그분은 마치 어른 같았습니다. 입이 절로 벌어졌어요. 다물 수가 없었어요. 어른이 아닌데 어른과 대등했어요. 그건 정말로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태자 전하라서? 알 수 없지요. 그러나 여하간 그건 너무 대단해서 저는 단번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그래요…. 그랬던 기억이 납니다.

그날 생각했어요. 내가 꽃잎이라 다행이야. 저 아름다운 분이 내 지아비가 되실 테니까. 그러니까 이 고난도 다 참을 만하다고. 저 당당한 분이, 나와 같이 어린애인데도 저렇게 태산처럼 큰 분이 나의 지아비라고.

맞아요…. 그랬었어요.

갑자기 기억이 납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뭘 했었죠? 식사. 조반을 함께했었죠. 그분이… 저의 식사 시중을… 들어 주셨어요. 맞아요, 그랬었어요. 저에게 늘 좋아하는 걸 먹으라고, 저에게 늘 좋아하는 걸 하라고 하셨어요. 장지문 하나로 모든 걸 막고서 저에게 가장 안전한 곳을 선사해 주셨죠. 기억이 납니다.

아아, 하늘님. 제가 이걸 어떻게 잊어버릴 수가 있죠? 그분이 저를 귀애해 주셨었는데.

“비전하?!”

저는 장지문을 향해 뛰쳐나갔어요. 제가 뛰어나가자 닫혔던 장지문들이 서둘러 열렸습니다. 궁녀들이 저를 불렀지만 대답할 수 없었어요. 만나고 싶었습니다. 저를, 어린 저를 구해 주셨던 저의 태자 전하를요. 저를 아껴 주셨던 분을요. 저의 인생에서 단 한 명, 좋아하는 것을 하라고 해 주셨던 그분을.

그분은 기억하고 계실까요?

제가 기억하지 못한다고 있다는 걸 아시고 계셨을까요?

그런데도 저를 연모한다 하신 걸까요?

저는 당장 만나야 했어요. 만나지 못하면 죽을지도 몰랐어요. 아, 이게 연모지정이라는 걸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 갈급함이 그 감정이라는 걸.

그리워하는 마음이 무슨 뜻인지 저는 온몸에 새기며 달려갔습니다. 바람이 저를 밀어 주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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