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몽중연 (53)화 (53/100)

53.

“어떻게 신첩이 전하를 이렇게 모를 수가 있습니까?”

원망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어떻게 신첩에게 이렇게까지 전하를 숨기실 수가 있습니까?”

나는 당신에게 다 줬는데.

“어떻게, 이렇습니까.”

당신은 이렇게 모든 걸 숨길 수가 있어. 당신이 태자이기 때문에? 존귀하기 때문에? 그래서 지금 나는 존귀한 이에게 마음을 주었던 그 수많은 어리석은 여인들이 치러야 했던 대가를 치르는 것인가.

제가 그렇게 물었을 때 태자 전하는 무릎을 꿇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셨습니다. 그분은 아주 오랫동안 저를 올려다보다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 내셨어요.

“비께서는 용감하시고.”

“…….”

“저는 비겁자니까요.”

눈물이 툭 떨어졌습니다. 울고 싶지 않았어요. 저는 태자비니까요. 존귀한 자리에 오를 몸입니다. 희로애락을 드러내면 안 됩니다. 그렇게 배웠는데, 몸가짐을 정갈히 하라고 언제나 주의받았는데 눈물이 떨어지는 걸 막을 수가 없습니다.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돌리자 태자 전하의 손이 조심스럽게 따라와 제 젖은 뺨을 어루만지며 전하 쪽으로 끌어당겼습니다. 제 눈물 따위로 귀한 손을 더럽힐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도 얼굴이 따라갔어요. 시선이 마주치자 곤란해하는 그분이 보였습니다.

“왜…. 왜 그리 말씀하십니까.”

비겁자라고 자신을 낮추기엔 너무나 귀한 분. 그분이 태자셔서가 아니라 제 마음속에서 누구보다 귀한 자리에 계시는 분이라 마음이 아팠습니다. 자신을 비겁하다고 말씀하시며 저를 달래시는 그분의 연정이 한없이 드높고, 그럼에도 저에게 아무 이야기도 해 주고 싶어 하지 않으시는 이분의 태도가 저를 절망케 합니다.

제가 캐물으면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요? 저를 왜 가두셨어요? 운왕 전하의 목은 왜 자르셨나요? 폐하와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지요? 이제 어찌하실 요량이시죠? 정말 아바마마와 척을 지실 생각이신가요?

물어볼 수 있는 것도 별로 없어요.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건 알겠는데 객관적으로 조목조목 짚어 볼 만큼 아는 게 많지 않으니까요. 머릿속으로 묻고 또 묻는 걸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마음 깊은 곳까지 튀어나오려고 합니다. 어찌하려고 이러세요. 벌이라도 받으심 어쩌려고. 하늘이 노하면 어쩌려고. 또 불타는 곳에 갇히시면 어찌하시려고!

그렇게 원한을 태산처럼 쌓으시고 적을 성벽처럼 두르시면 전하의 안식처는 어디에 있겠습니까. 전하를 위해 주는 사람이 너무 없지 않습니까….

“비겁한 게 맞으니까요.”

“전하.”

“당신에 비하면 저는 한없이 어둡지요.”

태자 전하께서 속삭이셨어요. 안타까워하시며 제 머리카락을 쓸어내리셨습니다. 어둡다니? 태자 전하께서는 가장 높은 곳에 계시니 가장 많은 빛을 받고 계십니다. 어찌하여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저로서는 알 수가 없어요.

“어떤 사내가 자신에게 묻은 진흙을 제 여인에게 묻히고 싶겠습니까?”

“…….”

“비께서는 너무 아름다우시고….”

“…….”

“저는 비의 옆에 서기 위해 태연한 척하려고 필사적이죠. 이해하시겠습니까?”

너는 이해할 수 없어, 라는 어조로 태자 전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이해 못 하겠어요. 진흙이 어떻고 제 외모가 저렇고, 그 모든 걸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태자 전하의 눈을 가만히 바라봤어요.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그분은 제대로 대답할 수 없으신 겁니다. 그분이 하실 수 있는 최대한의 대답이 이런 거라는 걸, 저는 이해했어요. 어떻게 전하 자신을 처인 저에게 이렇게까지 숨기실 수 있느냐는 말에 대한 대답이, 이런 뜬구름 잡는 소리라는 게 답답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그분의 마음이고 그분의 진실이라면 저는 그분의 방식대로 대답해야 했습니다. 왜 이렇게 말씀하시냐고 그분을 아무리 졸라도 소용이 없으리라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가만히 있다가 천천히 그분의 말씀을 여러 번 되새기고 입을 열었습니다.

“그럼 여쭙겠습니다. 진흙이 묻은 신첩은 저어되시옵니까?”

그 말에 태자 전하는 희미하게 웃으셨어요.

“내가 빨아먹을게.”

그분이 저를 끌어안고 제 머리 위에서 소곤거리셨습니다.

“네 진흙이 얼마나 더러운 것이든 내게는 감로수일 테니, 내가 전부 삼킬게.”

“그런데 전하는 왜….”

저에게 태자 전하의 진흙은 감로수는 아닐 겁니다. 그건 아주 쓰디쓴… 사약 같은 거겠죠. 저는 전하처럼 용감하지 못하니까 기꺼이 삼킨다든가 하지는 못할지도 모릅니다. 저는 불길이 타오르는 동궁 앞에서 망설였던 사람이니까요. 그래도 저는 분명히 제 손으로 그 진흙을 닦을 것이고 손으로 안 되면 삼킬 수 있습니다. 시간은 필요하지만 의지를 다질 여유는 저에게 필요하겠지만 저도 그럴 수 있어요.

연정이라는 게 뭔지 저는 모릅니다. 저에게 연정이라는 건 감정이 아닌 거 같아요. 그건 태자 전하 한 분입니다. 저에게 연정은 그분 자체예요. 감정이 아니라 정이연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분의 손짓이나 목소리나 웃음 같은 것들이 연모지정이 됩니다.

가슴이 두근거리거나 행복하거나 이런 게 아니라 그저 그분이 있는 것만으로 청춘, 푸르른 봄이 옵니다. 제 가슴에서 봄이 떠나질 않아요. 그런데 태자 전하께옵서는 저에게 그 봄을 만지지도 말고 들여다보지도 말고 그저 먼 곳에서 지켜만 보라고 하십니다.

그럴 거면 봄이라고 알려 주지 마셨어야죠. 이렇게 감미로운 것이라고, 이렇게 사랑스럽다고, 저에게 알려 주지 마셨어야죠. 제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때, 그저 순응하고 있을 때 내버려 두셨어야죠. 운명에 순종만 하고 있던 저를 여기까지 끌어내어 기어코 제 가슴에 봄의 씨앗을 심으신 건 태자 전하셨는데 그 봄을 만지지도 들여다보지도 말라니요.

아주 반짝이는 귀한 것이 있는데, 그걸 손안에 쥐여 준 다음 영원히 손을 펼쳐 그 실체를 보아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차라리 그 귀한 것이 없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장부라는 것들이 그렇습니다.”

태자 전하께서 작게 웃으셨어요. 그 웃음은 늦가을 날아가는 새의 날개 소리처럼 덧없었습니다.

“당신은 어여쁘시기만.”

“전하….”

“그저 웃고 계시기만.”

“…….”

“그저 초라한 비겁자의 작은 소망입니다.”

제가 어찌 이 말에 싫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괜찮다고도 하지 못했어요. 괜찮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다시 입에 이 일을 담을 수도 없었습니다. 태자 전하께옵서 스스로를 비겁자라고 칭하시게 하는 그런 고통스러운 일을 겪게 해 드리고 싶진 않았거든요.

***

당신은 어여쁘시기만. 웃고 계시기만.

그 목소리는 계속 제 귓가를 어지럽혔습니다. 천하제일미. 언젠가부터 제 이름 석 자 앞에는 천하제일미라는 수식어가 붙기 시작했습니다. 그것 또한 심씨 가문의 영광이죠. 심씨 가문은 원래 미색이 대단하기로 유명하니까요. 특히 꽃잎들의 미색은 대대로 화려했습니다.

작고하신 아버님께서는 저에게 네가 누리는 모든 것들이 심씨 가문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라는 걸 명심하라고 언제나 말씀하셨어요. 그 말씀은 매일 매 순간 제 머리 위에서 떨어졌습니다. 대부분은 평범한 상황에서였지만 매를 맞으면서 들을 때도 있었고 광에 갇히면서 들을 때도 있었습니다. 어쨌거나 저의 모든 것은 심씨로 태어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의 모든 걸 별로 좋아해 본 적이 없습니다. 심씨 가문이 준 모든 것들이 조금 피곤했어요. 외모든 천지신명이 내리셨다는 꽃잎의 증거든, 모든 것은 저에게 그저 불편한 요소로만 다가왔습니다. 사실 가장 편했던 순간을 꼽으라면 역시 냉궁 시절인 것 같습니다. 아니, 생각해 보니 태자 전하와 같이 점쟁이를 보러 갔던 때가 있었네요. 그 편안한 옷과 분위기가 생각이 납니다.

저는 면경에 대고 제 얼굴을 오래도록 비춰 보았습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거울을 이렇게 오래 본 적이 없어요. 그저 필요에 의해 거울을 보았을 뿐 저라는 사람을 오롯이 보기 위해 거울을 사용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거울 속의 저는 아름답다는 인상보다는 나약하다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네, 저는 나약해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당신은 어여쁘시기만.”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어여쁘게 치장하고 언제나 지아비에게 사랑스러운 아내가 될 것. 그렇게 평생을 교육받았는데 그 말이 이토록 폐부를 후벼 팔 수가 있습니까. 제가 어여쁘기만 하면 진흙은 태자 전하 혼자 묻히시는 건가요? 저에게 묻은 아주 적은 진흙을 삼키시고 그분에게 묻은 진흙은 아무도 돌보지 않은 건가요?

그런 걸 연정이라고 합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저라는 계집이 짐인 것 같습니다. 적당히 예쁜, 쓸모없는 짐 덩어리요. 어떤 짐일까요? 꽃 같은 걸까요? 화무십일홍이라고 했습니다. 붉은 꽃은 열흘을 못 간다는데, 태자 전하께옵서 차라리 열흘 뒤에 저에게 관심이 떨어지시면 좋겠네요. 그게 아니라면 그분이 너무 가엾지 않습니까? 혼자 진흙이 묻으면….

울고 싶어질 때마다 창밖을 바라봤습니다. 창밖에는 붉은 꽃이 맺히는 나무들이 있어요. 가끔 전하께서 꺾어다 제 머리에 꽂아 주시는 꽃입니다. 그런 다음 제 입술에 입을 맞추시곤 했죠.

하지만 저는 꽃이 아닙니다. 저는 태자 전하께 무언가가 묻는다면 달려가 닦아 드릴 거예요. 그게 제 연정이라는 걸, 제게 마음이 있다는 걸, 제가 전하를 생각한다는 걸, 전하께옵서 홀로 진흙을 뒤집어쓰고 계신다면 제 마음이 부서질 거라는 걸 어찌하여 모르시죠?

“비전하, 신궁의 궁주가 왔나이다.”

신궁의 궁주….

빚을 갚으라고 하던 그 목소리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도 들어 낼 게 있지요. 이 상황이 어찌 된 것인지 고모님은 저에게 대답을 해 주셔야 할 겁니다.

저는 고모님을 불러들였습니다. 우리는 다과상을 두고 앉았지요. 고모님께서 웃으시며 저에게 입을 여시려는 순간 저는 말을 잘랐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겠습니다. 저를 살리셨다고 했는데 어떻게 살리셨습니까?”

고모님은 대답하기 조금 곤란하신 것 같았습니다. 그분은 잠시 망설이다가 찻잔을 드셨어요. 시간을 끌 요량이라는 게 눈에 빤히 보였습니다. 저는 굳이 재촉하지 않았어요. 저는 고모님께 대답을 들어 낼 자신이 있었습니다.

이윽고 고모님이 곤란한 얼굴로 웃으시며 대답하셨습니다.

“대답은… 태자 전하께 들으셔야 할 듯하옵니다. 소인이 고할 만한 사안이 아니 되옵니다, 비전하.”

이렇게 나오실 거 같았지만 저도 물러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럼 신궁으로 돌아가시죠.”

제 말에 고모님이 눈을 크게 뜨셨어요. 그 눈에서 분노가 엿보였습니다. 상관없었어요. 사람에게 미움받는 건 익숙합니다. 늘 누군가는 저를 미워했어요.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저는 귀한 분의 정혼녀였고 운명의 혜택을 받은 몸이니까요.

“전에도 말씀드렸사오나 비전하….”

“고모님께서는 저의 구명을 말씀하시지만 제 기억에는 없는 일. 기억에도 없는 일의 보은을 말씀하신다면 황당하다 못해 조금….”

저는 고모님처럼 찻잔을 들었어요. 그분 보란 듯이 시간을 끌고 마지막에 말했습니다.

“황당하다 못해 협박당하는 기분이 들지 않겠습니까. 고모님, 조카로서 저는 고모님을 무척 존경합니다만 저는 정1품 태자비이고.”

“…….”

“고모님께선 정3품 궁주시죠. 제가 협박당했다고 간주한다면 고모님, 무슨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