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이연은 운왕부에서 온 서신을 바로 보지 않았다. 그는 그 전에 신궁의 궁주를 만나고자 했다. 서신의 내용은 짐작이 가는 바가 있었다. 어차피 거절이란 있을 수 없으니 시작은 되었으리라.
이번엔 방심하지 않아.
모조리 쓸어버려야 했다. 운왕과 한 하늘을 지고 산다는 건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서혜를 탐했고 그러면서도 그녀를 다치게 하려 했다. 어느 쪽도 용서할 수 없다. 더 이상은 안이하게 굴지 않는다. 한 하늘 아래 있을 수 없다면 그게 누구든 어떠한 관계든 전부 치워 버릴 것이다.
이연은 신궁의 궁주가 기다리고 있는 편전 쪽으로 발길을 옮기다 문득 멈춰 섰다. 서혜의 눈가만 봐도 찢어질 것같이 아픈 가슴이 정작 혈육을 쳐 내겠다는 생각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다. 서혜의 처소에서 멀어질수록 마음의 존재감을 느낄 수가 없어졌다. 아마 사약을 토해 낼 때 다 뱉어 낸 모양이었다.
원망이나 한 정도는 남았을 법도 한데 그것도 남지 않았다. 그 정도의 감정조차 차지하지 못하는 육친. 마음속의 크기가 너무나 보잘것없었다. 서혜로 가득 찬 가슴에는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아서 그저 부모도 형제도 거추장스러운 장애물로밖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닭이 먼저일까, 달걀이 먼저일까. 그들이 먼저 배신한 것일까, 아니면 애초에 자신이 먼저 서혜에게 마음을 다 주었기 때문에 이리된 것일까. 알 수가 없으나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천하의 패륜아가 된들 그게 다 어떻단 말인가. 이연은 차고 있는 칼의 무게를 느끼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래, 서혜야.
네가 가면 나도 가면 되는 것.
꿈에서 살아 본 인생은 너무나 지옥 같아서 이연은 도저히 그 생을 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사람을 죽일 용기도 전장을 헤쳐 나갈 용기도 고문을 감수할 용기도 있는데 서혜가 없는 삶을 살 용기는 없었다. 그건 너무 지독하고 비참하고 무엇보다도 긴 것이었다.
꿈에서도 그 끝을 보지 못하였는데 어디서 그 끝을 볼 수 있겠는가. 끝이 나긴 하는 건가? 황제가 되어서 자진을 할 수는 있는가? 서혜를 바치고 얻은 황제 자리에서 어떻게 자신이 감히 죽을 수 있겠는가. 죽어서 어떻게 서혜의 낯을 보려고.
하지만 죽어서도 그녀의 낯을 못 보면…. 그 희망마저 없으면 정말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그 실낱같은 희망마저 없는 삶은, 죽어도 아무것도 없으면, 죽어도 그저 서혜를 못 보는 영원이 계속되는 거라면 어떻게 죽음을 선택할 수 있겠는가. 죽음도 삶도 두려우니, 그저 매일을 감내할 수밖에.
이번에 너를 살려 내지 못하면 내가 죽으면 된다. 죽어서도 네가 없으면 거기서도 죽어 보도록 하자. 몇 번이고 죽다 보면 네가 있는 곳에 도달하든가 혹은 끝이라는 곳에 당도하겠지.
“전하…?”
첨사가 조심스럽게 이연을 재촉했다. 이연은 가만히 나무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추워서 아직 꽃을 피우지 않은 그 나무는 서혜가 좋아하는 붉은 꽃을 피우는 나무였다. 그 나무를 이연은 군데군데 옮겨 심어 놓았다.
처음에는 그 나무로 온 동궁을 꾸밀까 했는데 정원을 관리하는 내관이 그럼 한 계절만 아름다울 것이라는 말에 그만두었다. 사계절 고루고루 아름다운 궁을 보여 주고 싶었다. 늘 아리따운 곳에서 곱게 있기만을 바랐다.
그래, 네가 그저 안온하기만을 바랐는데.
이연은 빠른 걸음으로 나무 앞을 벗어났다. 어디를 가든 서혜와의 기억이 따라다녔다. 서혜는 기억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 이연에게는 추억이라고 말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것들.
서혜는 편전 앞에서 두 손으로 가만히 나비를 잡은 적이 있었다. 이연에게 오다 말고 나비를 잡은 서혜는 곧 조심스럽게 나비를 날려 보냈다. 하얀 나비 한 마리가 날아가는 걸 서혜는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편전을 나오던 이연은 그 모습을 보면서 괜히 몸을 숨겼었다. 속상했다. 서혜가 자유를 꿈꾸는 것 같아서.
일어나기만 해 줘.
그럼 황궁 밖도 데리고 나갈게. 네가 원하는 곳은 어디든 같이 가 줄 테니.
제발 나를 버리지만 말아 줘.
누군가에게 기도하고 싶은데 기도할 상대가 없었다. 천지신명에게 기도해야 할까. 서혜는 부황과 사이가 좋지 않은 이연을 위해 기적이라도 꽃피우고자 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했었다. 그런데 이연은 이 상황이 되어서도 기도를 하고 싶지 않았다. 기적을 바랄 수 없었다. 그건 너무나 비이성적이고 못나게 느껴졌다. 기적 따위에 희망을 걸기엔 그는 너무나 다급하고 간절했다.
천지간의 아무리 좋은 약재를 들이부어도 서혜의 파리한 얼굴은 좋아지지 않는다. 눈을 뜨지 않는다. 서혜의 혼이 이승에 가까워지지를 않는다. 천지신명이라는 작자가 서혜를 이승으로 돌려보내 줄 이인지 아니면 그녀를 납치할 자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이연은 굳은 얼굴로 편전에 들어섰다. 이미 궁주는 편전에 엎드려 있었다.
심씨 일족. 그중에서도 종가.
이연은 그 인간들을 모조리 싫어했다. 심재경도 그렇지만 그의 여동생인 이 궁주도 서혜에게 도움이 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서혜의 고난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부추기기도 했던 인물이었다. 서혜를 황궁에 제물로 바쳐 심씨 종가가 잘되기만 하면 된다는 인간들이었다. 신물이 났다.
그러나 이연은 아무 표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진저리가 나는 인간은 이이만이 아니었다. 온 누리의 이들을 다 도륙 내고 싶었다. 위로는 황제부터 아래로는 서혜에 대해 무엄한 소리를 알지도 못하고 지껄이는 거지들까지 모조리 다 죽여도 이 분이 풀릴 것 같지가 않았다.
귀하게 태어나서 아름답게 성장한 서혜는 모두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나 세상은 그녀에게 늘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제 이연은 세상이라는 것의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어졌다.
만약 서혜가 살아나지 않는다면 그는 이 분풀이를 어딘가에는 반드시 하고야 말리라.
“잘도 그 얼굴을 드러냈군그래.”
이연이 한쪽으로 입술을 올렸다. 전장에서 만났던 궁주가 떠올랐다. 그녀는 약간 위화감이 들 정도로 나이가 들어 보이는 모습을 하고서 말했었다.
“전하, 소인이 소망을 들어드리러 왔나이다.”
이연은 그때 소름이 돋았었다. 신궁의 궁주는 꿈과 똑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무슨 소망을? 이연은 그렇게 묻지 않았다. 그는 그저 한마디만 했을 뿐이다.
“황도에서 보자.”
그리고 이연은 바로 황도로 귀환했다. 그는 꿈이 예지몽이라는 걸, 아니 단순한 꿈이 아니라 그의 삶이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일이지만 그만은 알 수 있었다. 그건 꿈이 아니었다. 그건 삶 자체였다.
그는 서혜를 잃었고 황위에 올랐고, 완전히 무너졌다. 서혜가 없는 삶, 아니 지옥을 살았다. 사람들이 하라는 대로 아무리 해 보아도 희망 따위는 없었다. 차라리 아무것도 없다면 버텨 보았을 텐데 그저 절망과 고독만이 존재하는 무색의 세계에서 이연은 조용하게 미쳐 가고 있었다.
그 꿈에서 잘못한 사람은 사실 이연 자신이었다. 그러나 이연은 도저히 도리대로 살 수가 없었다. 이미 그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람으로 살기엔 너무 미쳐 버렸기 때문에.
그렇게 살 수 없었다. 그래서 돌아왔다. 사약도 먹었다. 그걸 토하고 자신을 낳아 준 존재와 키워 준 존재와 근본이라고 주장하는 이들과 단절했다. 그렇게 끝났어야 할 문제였는데 운왕은 과욕을 부렸고 서혜는 목숨을 바쳤다. 그 대가로 서혜는 지금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은 목숨을 걸고 황도로 돌아왔는데 결국 서혜가 죽는 걸 막을 수는 없는 게 운명이라면, 도대체 누구를 원망하고 어느 목을 잘라야 하는 것인가.
누구를 탓하고 누구를 죽여도 서혜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서혜가 죽은 뒤에는 그저 아주 길고 무시무시한 지옥이 있을 뿐인데.
지옥이 무서운 와중에 잠시 그런 생각도 들었다. 서혜는 지금 아픈가? 혹시 말을 못 해서 아프다는 걸 알릴 수 없는 건 아닌가? 혹시 나처럼 무서운 꿈을 꾸고 있나? 그 지옥에서 헤매고 있진 않은가? 만약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구해야 하나.
기왕의 생도 서혜에게는 지독했는데.
죽음 뒤의 영원도 그녀에게 지옥이라면 그건 또 어떻게 해야 하나.
태자의 자리는 존귀하다며 모두가 그토록 탐을 내는데 이연은 도대체 이 자리의 장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 자리는 기어코 서혜를 잡아먹었다. 그리고 아귀처럼 배가 고프다며 또 누구를 잡아먹을지 호시탐탐 주변을 살피고 있다.
“널 어떻게 찢어 죽여야 할지, 내 분이 풀릴 방도를 찾지 못하겠구나.”
이연의 말에 궁주가 고개를 빼꼼 들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전하.”
궁주의 목소리가 탁하게 갈라져 있었다. 문득 이연은 궁주의 얼굴이 더 늙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장에서 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이렇게 늙었는가. 그러나 그 생각은 아주 잠시간 스쳐 지나간 것일 뿐이었다. 이연은 애초에 궁주에게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궁주와 이연의 시선이 마주쳤다.
“소인은 여전히 전하의 소망을 들어드리기 위해 왔나이다.”
그 순간이었다.
순간적으로 이연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했다.
소망? 너 따위가 감히 입에 담을 만한 것인가, 나의 소망이? 네가, 너희들이 마음껏 휘저으며 망가뜨렸던 나의 소망 말인가? 나의 소원이 너희에게 짓밟히는 걸 내가 도대체 몇 번을 보았지? 나의 소원께선 자신이 아픈 것도 고통스러운 것도 느끼지 못하셨지. 언제나 아파서 그게 당연한 건 줄 아셨으니까. 왜 그리되셨지?
너희가 그리 만들었으니까!
이연은 성큼성큼 걸어가 궁주의 목을 잡아 들어 올렸다. 발끝이 들린 궁주가 목이 졸린 소리를 내며 발끝을 바둥거렸다. 새파랗게 질려 가는 그 얼굴을 보며 이연이 속삭였다.
“왜 그러느냐?”
“저… 언, 하….”
“너는 내 비가 어릴 때 몇 번이나 이렇게 했다고 들었는데, 네가 그런 처지가 되어 보니 어떠냐? …내 소망? 그게 뭔지나 알고? …너 따위가 감히 나에게 거래를 청하러 와?!”
그냥 죽여 버리는 게 속이 편하지.
이연의 손이 더 높이 올라갔다. 이제 궁주가 발끝을 아무리 움직여도 발끝이 땅에 닿지 않았다. 궁주의 얼굴이 점점 파랗게 질려 가고 있었다.
첨사부터 그 아랫사람들까지 모든 내관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궁주는 중요한 인물이다. 그녀가 태자의 손에 살해당하도록 수수방관할 수만은 없다. 그러나 태자는 지금 분노했고 그런 태자를 누가 말릴 수 있단 말인가. 태자를 구하려다 태자비의 목숨이 오락가락하고 있는데 궁주는 거기에 불을 지른 격이다.
이연은 정말 죽일 생각이었다. 그는 이미 부황, 모후와 척을 졌다. 더 이상은 두려운 게 없었다. 서혜가 죽는다면 자신도 죽을 생각이었다. 목숨을 반쯤 버렸으니 두려운 게 뭐가 있을까. 예전에는 자신이 수천수만의 시신 위에 서 있다는 걸 생각했었다. 자신을 태자로 만들기 위해 죽어 간 사람들을 떠올렸었다. 그 수많은 목숨의 무게가 무거웠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되었기 때문에, 도리 같은 건 전부 오물처럼 토해 버렸기 때문에 그는 그 목숨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이 원해서 목숨을 바친 것이다. 그들의 신념에 의해서. 자신은 바치라고 한 적이 없다. 이런 짐승 같은 이를 태자라고 옹립한 그들의 안목을 탓할 일이다. 이연은 완전히 모든 걸 놓아 버렸다.
서혜 하나만 품기에도 모자란 가슴이었다. 그 가슴에 도리니 수만 인명이니 따위를 생각하니까 그녀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애초에 원하는 건 하나뿐이었는데 이것저것 생각하다 가장 원하는 걸 놓칠 판이다. 수천수만의 목숨을 선택하여 이연이 얻은 게 뭐란 말인가. 꿈속의 이연은 그저 미쳐 갈 뿐이었는데. 아무도 그에게 서혜만 한, 아니 그녀의 백분지 일이라도 될 만한 만족을 주지 못하는데.
서혜가 있는 곳에 머무를 뿐이다.
이승이든, 저승이든.
이연의 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가 궁주의 목을 꺾어 버리려는 찰나.
“비, 전하… 살, 릴….”
아주 작은 목소리였으나 이연은 알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