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태자는 살아남았다.
그 잔혹한 밤, 태자를 살린 건 냉궁에 있던 태자비였다. 그녀는 문을 열고 나와 불길을 뚫고 태자를 구하러 동궁에 들어갔다. 그녀는 태자를 구하는 데 성공했지만 본디 몸이 약했기에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연기를 마셨고 고초를 겪었다. 냉궁에서의 생활과 추국장에서의 압박이 지나쳤던 탓에 태자비는 쓰러졌고 그대로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동궁은 그 어느 때보다 삼엄한 경비 체제에 들어갔다. 태자의 모든 장수들이 가택 연금에서 풀려났다. 누군가가 태자를 죽이려 한다. 그건 황제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사실 그게 누군지도 너무 뻔했다. 운왕이 노골적으로 행동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태자는 운왕이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그리고 부황이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그 밤을 가슴에 묻는 조건으로 태자비를 냉궁에서 꺼냈다. 누군가는 그녀가 역적의 딸이라 했고 누군가는 그녀가 역적 그 자체라고 했다. 어느 쪽이든 이제 이야기는 끝난 것이었다. 태자가 자신의 목숨값으로 그녀를 구하기로 한 이상 그녀는 다시 동궁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그년이 죽어야 돼.
황후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년. 태자비라고 칭하고 싶지도 않은 그년 생각만 하면 부아가 치밀었다. 처음 본 순간부터 한 번도 마음에 든 적이 없었다.
모두가 그토록 아름다운 여인은 본 적이 없다고 칭송했다. 그 미모 탓일까, 아들은 처음부터 그 계집아이를 어지간히 싸고돌았다. 칠 년을 보지 못하게 했으면 어린 시절 정도 다 떨어졌으리라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아들은 이번에 목숨을 걸고 그년을 구하기 위해 항명했다. 세 치 혀로, 그리고 그 잘난 재주로 황제가 부정할 수 없는 핑곗거리를 내놓기는 했지만 그게 핑계라는 건 조정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아들은 그년을 구하러 온 것이다.
하, 그년이 뭐라고.
다섯 꽃잎? 그게 뭔데. 세 꽃잎이든 다섯 꽃잎이든 꽃잎은 다 똑같이 신성하다. 그저 어쩌다 보니 점 한두 개가 더 찍혔을 뿐인데 점 두 개가 더 찍혔다고 벌벌 떠는 모습들이라니. 그 모습들만 보면 구역질이 났다. 모두가 그년을 두고 완벽한 태자비라고 했다. 은근히 국모인 자신과 비교도 해 댔다. 자신은 황후다. 지엄한 자리에 서 있는 자신을 어찌 그래 봤자 아랫것인 그년과 비교를 한단 말인가.
그년이 있는 한은 안 되는데.
황후는 우아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녀는 심씨 종가를 무너뜨리려 했다. 위험한 도박이었다. 역모를 한 가문은 구족을 멸하게 되고, 그 구족에는 그녀의 가문도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녀의 가문에는 꽃잎을 밴 임부가 있었다. 꽃잎을 밴 이가 있다면 가문을 빼낼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 있었다. 꽃잎을 역적으로 그냥 죽이고 싶진 않을 테니까.
황후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다섯 꽃잎이 태어났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의 황제의 얼굴을. 그 얼굴을 보는 순간 그녀는 그의 속내를 빤히 알아챌 수 있었다. 황제는 사실 그 다섯 꽃잎을 운왕에게 보내고 싶었다. 그리고 동궁을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어서 무척 괴로워했다.
이번 기회를 놓칠 리가 없다. 운왕의 비로 세 꽃잎을 준다면 그 가문을 역적으로 몰 수도 없다. 그러니 자신의 가문은 살아남으리라. 그녀는 확신했다. 처음으로 운왕이라는 존재가 자신에게 보탬이 된다며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더러운 것도 약에 쓰일 때가 있긴 있는 모양이야, 하고 그녀는 자신의 오라비에게 소곤거렸다.
심씨 종가는 정말 지긋지긋했다. 방계는 종가에 무조건 복종해야 했다. 자신이 황후인데도 오라비는 종가에 꼼짝도 못 했다. 오라비는 언제나 종가의 명령을 받아 왔다. 그리고 자신에게 요청했다. 들어줄 수도 없고 들어주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그 종가에서 태자비를 내세웠다. 종가가 태자비를 얼마나 제 인형처럼 키웠는지는 이미 훤히 다 알려진 사항이었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 황후도 상궁을 내려 보내 훈육하려 했으나 만만치가 않았다.
심씨 종가는 워낙에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곳이라 상궁들도 제 뜻을 펼치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차라리 싸고도는 것이면 상궁이 무어라 말해 보겠는데 툭하면 교육을 한답시고 굶기고 때리고 가두니 상궁은 결국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지 못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종가의 인형 같은 태자비가 심지어 태자의 총애까지 받고 있다. 제 가문이 어떻게 몰락했는지 알면 그 태자비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가문의 몰락과 함께 그 스스로도 냉궁에 유폐되었었으니 아마 원한이 태산같이 높을 터.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나!
황후는 혀를 찼다.
그년은 태자가 돌아오기 전에 나가 뒈졌어야 했다. 그리고 태자는 전장에서 훌륭하게 공을 세우고 돌아와 새로운 여인과 혼인을 올려야 했다. 황후는 새로운 태자비를 이미 마음속으로 점지해 두었다. 금력으로 대륙에서 첫손에 꼽힌다는 가문이었다. 그러나 조정에서 입지는 불안정하여 황후가 후원을 받기 좋으면서도 입맛대로 다룰 수 있는 며느리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랬는데 갑자기 태자는 돌아왔고 황제는 사약을 내렸고 태자가 그 사약을 피하자 운왕이 불을 질렀다. 미쳐 버린 밤이었고 그 끝의 승자는 태자였다. 사람들은 그년이 태자를 구했다고 수군거렸지만 천만에, 자신의 아들은 그런 데서 죽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건 누구보다 어미인 자신이 더 잘 알았다. 도리어 그년이 끼어들지 않았다면 아들은 이 상황을 밀어붙여 운왕을 끝장냈을 것이다. 그러나 아들은 제 여인을 지키기 위해 이 모든 걸 묻기로 했다.
오늘 아침, 아들은 문안을 왔었다. 황후는 자비로운 얼굴로 태자비의 차도를 물었다. 그러자 아들은 잠시간 말이 없이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 말했다.
“오직 한 가지만 부탁드렸는데.”
아들의 목소리에 고저가 없었다. 그게 위험 신호라는 걸 잘 아는 황후는 바로 선수를 쳤다.
“이 어미도 위험하였어요. 어찌 그런 무정한 말을 합니까.”
그러면서 황후는 자신이 얼마나 위험했는지, 얼마나 곤란하였는지 말했다. 그런 역적이 자신의 며느리라서 자신도 참 힘들었다는 것까지도 은근하게 덧붙이면서 아들이 마음을 바꾸길 바랐다.
물론 안 되리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마음속 깊은 곳에 의심의 씨앗이라도 심어 보려는 심산이었다. 그년은 모든 걸 망가뜨릴 것이다. 황후는 확신하고 있었다. 황후인 자신이 있어야 태자인 아들도 있는 법. 아들은 정신을 차려야 했다.
긴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아들이 조용히 말했다.
“소자가 안이했습니다. 진정으로.”
그 말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년에게 마음을 준 것이 안이했다는 뜻은 아닐 텐데, 무엇이 안이했다는 것인지. 뭔지 모르겠는데도 소름이 끼쳤다. 지금도 그 목소리만 생각하면 팔에 소름이 돋았다. 그 조용한 목소리.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한마디.
아들은 문안만 드리러 왔다는 듯 가 버렸고 황후는 몇 시진째 자리에 앉아 입술만 깨무는 중이었다. 그년이 죽었어야 했는데, 그년은 살아남았고 심지어 태자비로 복권되었다. 심씨 종가를 모조리 도륙 냈어야 방계인 자신의 가문이 종가가 되는데 그년이 살아남았다. 이제 그년이 모든 이의 어른이 된 것이다. 물론 황궁에선 자신이 더 높으나 가문에서는 그년이 더 높다. 이런 빌어먹을 상황이 다 있나.
그년을 도대체 어떻게 처리하지.
황후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소스라쳐 눈을 떴다. 감은 눈 속에서 아들의 시선이 보였다. 그 준엄한 심판자의 시선. 모든 걸 알고 있는 듯한 시선에 몸서리가 쳐졌다.
***
이연은 수레가 들어오는 걸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천하의 진귀하다는 약재를 모조리 끌어모았으나 서혜의 상태는 특별히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뜨지 못했다. 탕약도 겨우 먹였고, 그 탕약이 그녀의 목숨줄을 붙여 놓는 것과 같았다.
자신에게 상단이 있었으니 망정이지, 황제의 허가를 받아 약재를 구해야 하는 입장이었다면 서혜를 살리는 데 더욱 어려움이 있었으리라. 동궁의 예산만으로는 약재를 다 구할 수도 없었을 게 분명했다. 그 정도로 귀한 약재들이 동궁에 쏟아져 들어왔다.
“전하. 신궁의 궁주가 뵙고자 하나이다.”
만나야 할 사람이 왔다는 예감이 들었다.
이연은 찬바람을 맞으며 수레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만나야 한다는 건 아는데 만사 귀찮았다. 서혜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섰다. 모후가 서혜를 노리고 있다. 사가의 부흥을 위해 종가를 끝장낸다는 야망을 이룬 모후가 대단했다.
서혜라면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했을 방식이다. 종가의 마지막 남은 생존자, 서혜를 노리고 있을 모후를 생각하면 불쾌한 것이 손끝과 발끝에 기어 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서혜는?”
불탄 처소는 금세 복구가 되었는데 여전히 서혜는 눈을 뜨지 못했다. 이연은 자신의 새 침전을 지나 태자비의 침전으로 올라가 서 상궁을 만나 어제도 물었고 그제도 물었던 말을 꺼냈다. 그때마다 서 상궁은 저가 죄라도 지은 것처럼 어찌할 바 모르는 얼굴로 고개를 수그렸다.
“송구하옵니다.”
이연은 서혜의 얼굴을 볼 때마다 다시 물어보고 싶어졌다. 왜 왔습니까? 그는 서혜를 연모하였으나 서혜는 아니었다. 서혜는 그들이 적당한 부부 사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마다 이연은 마른 웃음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천하의 멍청이가 된 기분이 들어서였다. 아무리 연정을 바쳐도 서혜는 알지도 못하니 밑 빠진 독에 물을 붓고 있으면 이런 기분이 들까.
그래도 좋았다. 꿈결 같은 생활. 늘 밤이 되면 서혜와 만났다. 밤에 처소로 돌아오는 길은 땅을 밟는 게 아니라 별빛 위를 걷는 듯했다. 아스라이 아름다운 길을 걸어오면 정인이 있었다.
잠도 자지 않은 채 늘 자신을 기다리는 여인. 자라고 아무리 말해도 통 듣지 않는 그녀를 위해 이연은 늘 서둘렀다. 모든 걸 빠르고 정확하게 처리해야 했다. 시간을 끈다는 건 서혜가 밤을 지새울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걸 의미했으므로.
서혜를 안고 있으면 마냥 좋았다.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몰라도 괜찮았다. 사실 알려 주지도 않았다. 그녀가 아는 건 좋지 않았다. 그녀는 속내를 잘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었으나 이연은 그녀의 속마음을 늘 알 수 있었다. 그가 그녀를 아끼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녀가 유독 맑은 사람이어서인지는 알 수 없다. 여하간 그는 그녀를 금세 알 수 있었다. 그러니 남들도 그러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이연은 자신의 감정을 철저하게 숨겼다.
서혜가 몰라도 좋았는데… 그게 독이 됐다. 서혜는 냉궁으로 끌려가면서도 자신에게 연통을 넣어 달라는 부탁 한마디 하지 않았다. 물론 이연이 붙여 놓은 이들이 바로 연통을 보내왔으나 이연은 서혜가 태자인 자신의 비인데도 어떤 조치도 취하지 못한 채 순순히 끌려갔다는 데 충격을 받았다. 하다못해 지아비인 자신에게 연통을 넣어 달라는 말 정도는 해 볼 법도 했는데,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그런 사이라고 그녀를 속인 건 나 자신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정작 절체절명의 위기 순간에 서혜는 모든 걸 뛰어넘었다. 늘 체념하고 순종하던 서혜가 냉궁에서 뛰쳐나왔다. 서혜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게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알리라.
서혜는 안 된다고 하면 평생 그림자도 밟지 않을 그런 사람이었다.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끊임없이 그 과정을 추구해 나갈 수 있을 정도로 신실하고 인내심이 있는 만큼 결코 예법이나 법도에 어긋남이 없는 이이기도 했다. 그런 이가 모든 걸 버리고 망치고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 뛰쳐나와서 모진 꼴을 당했다.
서혜는 모르는 것 같았으나 그녀는 이미 화상으로 엉망이었다. 옷은 타 버렸고 온몸에 화상 자국이 남았다. 하지만 자신이 아프다는 걸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그녀는 고난을 겪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 속이 뒤집어졌다.
뭐 하러 구하러 왔어? 널 구하지도 못하고 불에 타 죽고 있는 모자란 작자를 뭐 하러 구하러 와? 너는 아무것도 몰랐잖아. 이다음에 뭐가 있을지, 그런 계산도 없었잖아. 그저 구하려고만 했잖아. 그런 짓을 왜 했어. 너는 분명 목숨을 걸었을 텐데, 내게 연정 한 조각 준 적 없으면서 뭐 하러 목숨을 걸어.
그녀를 구할 수 없었던 자신의 비루함에 대한 분노가 폭발했을 때 그녀가 쓰러졌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이후로 그녀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이연은 서혜를 내려다보고 물수건을 받아 그녀의 얼굴을 닦아 주면서 속삭였다.
“일어나셔야지요.”
지아비가 미치게 두시렵니까. 정녕 그러하시렵니까.
아무리 불러도 서혜는 대답이 없다. 화상이 다 사라져도 그녀는 눈을 뜨지 못했다. 사약을 토할 때 오물을 다 토해 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들이 모여 있던 곳에 무엇이 남았는지 생각을 못 했었던 모양이다. 서혜가 일어나지 않을수록 그 빈 공간에 광기가 쌓여 가고 있었다.
그때, 첨사가 들어와 나지막이 고했다.
“운왕부에서 서신이 왔나이다.”
드디어 시작이었다. 이연의 눈이 서슬 퍼렇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