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어둠이 내렸을 때 이연은 자신의 몸이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그는 침소에서 일어나야 할까, 잠시 생각했다. 그러나 일어나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몸 상태를 보려면 어쩔 수 없이 태의를 불러야 하는데, 그럼 눈에 반드시 띌 것이다. 하룻밤만 버티면 된다. 아침이 와 내관들이 자신의 상태를 보고 태의를 부르면 그때부터는 부황도 명분이 없다. 자신은 살아남을 것이고 그때부터는 자신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이 밤만 버티면 돼.
이연은 눈을 감았다. 몸이 꺼져 간다. 약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문제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잠에 들기 전 문득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가 발목을 붙잡는 느낌이었다.
조금 더 생각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조금 더….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던 게 아니었을까? 간자들은 자신이 토하는 걸 보지 못했다. 그 정도는 충분히 안배했으니 하룻밤만 넘기면 되는데 마음속에 어른거리는 이 불길함은 무엇일까.
도대체 무엇이지….
눈을 뜨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을 때, 이연은 물속의 수초에게 발목이 잡혀 끌려 들어가는 것처럼 속수무책으로 잠에게 끌려 들어갔다. 부지불식간 그의 인생 처음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그의 처소에 그를 도울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그 밤.
어느 내관 하나가 이연의 처소 문을 열었다. 예민하기로 유명한 태자가 잠에 취해 일어나지 못한다. 내관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웃으며 태자에게 살금살금 다가갔다. 그는 태자의 조각해 놓은 듯 완벽한 코 밑으로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뻗어 보았다.
숨을 쉬고 있어? 내관은 의아한 듯 눈을 크게 떴다. 그의 뒤, 장지문에 일렁이는 그림자들이 보였다. 누군가는 결박되어 있고 누군가는 서 있었다. 내관은 흘끗 뒤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장지문을 닫고 나온 내관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찌 된 일이오?”
많은 이들이 결박되어 무릎이 꿇려 있었다. 그중 가장 앞에 있는 이는 태자부를 책임지는 태자부 첨사 이응선이었다. 이응선이 눈을 날카롭게 치뜨고 물었다.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
착, 소리와 함께 뺨을 후려 맞은 이응선의 얼굴이 돌아갔다. 문관인 이응선은 매에 약하나 강단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한 대에 시뻘겋게 부어오른 뺨을 한 채로 내관을 노려보았다. 내관의 손짓에 따라 이응선의 뺨을 때린 무관이 내관을 흘끗 보았다. 한 대 더 때릴까요, 라고 묻는 얼굴에 대고 내관은 탈처럼 웃는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관두려무나. 첨사 나리 얼굴이 이게 뭐냐.”
“…….”
“어차피 날이 밝으면 비천해질 몸, 지금이라도 하고 싶은 말은 하게 두는 게 좋지.”
이응선의 몸이 덜덜 떨렸다. 두려움이 아니라 분노로 그는 떨고 있었다. 존귀한 동궁에 시정잡배 같은 놈들이 내관이니 무관이니 하는 옷들로 갈아입고 쳐들어와 자신들을 결박하고 있는 것이다. 입궁은 누가 허락했으며 이 옷들은 누가 제공하였는가. 눈에 선했다.
운왕, 이놈.
그동안 태자 전하께 무엄하게 굴었던 것도 전하의 하해와 같은 아량으로 넘어갔거늘, 감히 이런 짓을 도모해?!
아무리 황상의 총애를 입었다 해도, 아무리 장황자의 몸이라 하여도,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는 태자가 아니다. 한때 태자의 자격을 논하였던 존재였을 뿐이다. 결국 그가 태자의 자리에 올라가는 대신 동궁은 빈 채로 유지되었고, 적자인 현 태자가 태어나 동궁의 주인이 되었다. 단순히 장자라는 이유만으로는 동궁의 주인이 될 수 없다.
그걸 평생 억울해하더라도, 한때 제 어미가 정실이었고 자신이 적장자 자리에 있었음을 아쉬워해도,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는 적장자였던 시절이 있다. 황자의 아들로서, 그는 적장자의 그릇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황제의 아들로서는 적자의 그릇을 가지지 못했다. 조정은 그렇게 판단했다. 그걸 마치 저가 어쩌다 놓친 사냥감인 양 아쉬워하는 것은 봐주기 어려운 노릇이다.
그때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겨울에 느껴지는 이 화기에 이응선은 커다란 눈을 돌렸다. 처소에 불이 붙고 있었다.
“이러고도, 이러고도 너희가 무사할 거 같으냐?!”
태자의 처소에 불이 붙는 게 보였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험악한 놈들이 황궁에 들어와 동궁을 차지하고, 태자의 사람들을 결박하고, 그리고 불을 붙이다니. 평소라면 어림도 없을 일이었다. 동궁은 태자의 요람이니까.
그러나 이번에 태자는 전장에서 돌아왔고 그 항명의 진정성을 인정받기 위해 그의 모든 장수를 가택에 연금하는 것에 동의했다. 그리하여 지금 동궁에는 온통 적뿐이었다. 물론 위험천만한 일이었으나 아무리 그래도 며칠 안에 무슨 일이 생길까, 싶었다. 독이나 암살 같은, 몰래 일을 저지르는 것만 떠올렸지 이렇게 횃불을 대낮처럼 밝히고 그 횃불로 태자의 침전에 불을 붙이는 걸 선택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무사하지 못하면?”
내관이 뱀처럼 비열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럼 너 따위가 어찌할 요량이냐?”
내관이 고개를 까딱하자 무관의 옷을 입은 놈이 이응선의 얼굴을 후려 찼다. 퍽, 소리와 함께 어딘가가 잘못된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턱이 나간 듯했다. 더 이상 말하는 것이 무리라 이응선은 놈들을 노려보기만 했다.
내가 여기서 죽는다면 원혼이 되리라.
이응선은 결심했다. 아무도 구해 줄 수 없다는 건 알고 있다. 절체절명의 위기, 여기가 마지막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누구도 태자를 구할 수 없다. 태자가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그는 일어났을 것이다. 워낙 예민한 성정이다. 분명 일어나 바로 나왔으리라. 그러나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이런 화기를 느끼지 못할 정도라면 그는 약에 취한 것이다.
아무도 구할 수 없어.
동궁이 불타오르는데 누구도 달려오지 않는다. 이것이 어찌 된 일인지 너무나 뻔했다. 누가 계획한 일인지, 그 계획을 누가 승인하였는지. 결국 운왕은 이 자리를 가져갈 모양이다. 이런 더러운 수로 동궁의 자리에 오르고 황위에 올라서 얼마나 대단한 성군이 되겠는가. 그런 나라에 있느니 차라리 태자 전하를 보필하러 저승에 가겠다…!
그저 분할 뿐이다. 이런 노골적인 수에 당하는 것에 그저 노여울 뿐이다. 태자는 완벽한 태자였다. 그의 전공은 역대 최고였고 그는 무엇을 하든 완벽한 사람이었다. 황제가 되는 길을 모든 태자가 걸었으나 이 태자만큼 찬란히 걸은 태자는 없었다. 그런 이가 고작 이런 더러운 수에 희생되어야 하다니.
그저 하늘이 무심할 뿐이다.
이응선은 눈을 내리깔았다.
“자, 슬슬, 떠나자. 증거를 남기지 말도록 하라.”
내관 옷을 입은 협잡꾼 앞잡이가 즐거운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 들렸다. 그것이 치욕스러워 이응선은 혀를 깨물어 죽어 버리려다가 사내답지 못하다는 생각에 고개를 들었다. 아직 주인이 돌아가시지 않았다. 그분도 이토록 고통스러운 죽음을 당하시는데 그분을 지키지도 못한 자신이 먼저 죽을 수는 없다. 그것만은 용납되지 않는다.
뒤를 돌아보자 동궁 관리들은 모두 이를 악문 채 태자의 침전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 양팔을 이런저런 놈들에게 결박당한 상태였다. 포승줄에 묶인 이도 있었고 이응선처럼 양쪽에서 팔을 붙잡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모두 눈을 커다랗게 뜬 채로 불타는 침전을 바라보았다. 이 광경을 죽어서도 잊지 않겠다는 듯이.
이응선을 비롯한 동궁 관리들은 동궁 담 한쪽으로 끌려갔다. 태자가 죽은 게 확인되면 다 같이 참수되리라. 이 화재의 죄를 뒤집어쓸 사람은 누구일까. 이응선은 자신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국문을 당하게 될까, 아니면 참수된 다음 그냥 뒤집어쓰게 될까. 대리시에 끌려가서 모함을 당할까? 어느 쪽이든 이미 다 꿰어 맞춰진 곳에 끌려갈 뿐이다. 고신 끝에 잘못된 말을 꺼내느니 주인이 돌아가시면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이응선이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담 뒤에서 망을 보고 있던 협잡꾼 중 한 명이 어, 하고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가 너무나 당혹감에 가득 차 있어 이응선은 저도 모르게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절망감이 사라진 건 아니었는데도 적의 당혹감에 호기심이 들었다. 목숨이 다해 가는 순간에 호기심이 들 정도로 그 목소리는 정말 무척 놀란 것처럼 보였다.
“왜 그러느냐?”
내관 옷을 입고 태자의 침전에 불을 지른 자가 무언가를 느꼈는지 담에 딱 달라붙어 담 끝에서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그러더니 에잇, 하고 혀를 찼다.
“저년이 왜 여기 있어?!”
한두 명씩 담 너머를 확인하더니 당황하여 서로를 돌아보았다. 이응선은 아주 희미한, 겨울 그믐밤의 달빛같이 아스라한 희망의 빛을 보았다. 그 정도로 그들은 당황하고 있었다.
이응선의 턱을 박살 냈던 사내가 입술을 달싹이더니 내관에게 속삭였다. 그러나 이응선은 태자부 첨사인 사내. 귀를 기울여 그의 목소리를 잡아냈다.
“어, 어, 어떡하죠?”
그러자 내관이 초조하게 담 너머를 지켜보았다.
“뭘, 어떡해. 제깟 년이 뭘 어쩌겠느냐. 벌써 저리 불타올랐는… 저년이 돌았나?!”
저년?
여인?
지금 이 불타는 동궁에 올 여인은 아무도 없는데. 누가 온단 말인가. 궁인이라면 누구나 이 상황을 알 수 있다. 아마 모든 궁의 활로도 막혔을 것이다. 병사를 요청하기 위해 도망쳤던 내관 두엇도 결국 끌려왔다. 그들이 말했었다. 궁에 아무도 없다고.
그건 혜비의 짓이다. 내궁에서 강력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는 혜비가 내궁을 비운 것이다. 이 일은 혜비와 운왕 그리고 황제가 벌인 짓이다. 그렇게 거대 권력자 세 명이서 작당하였으니 아무도 동궁을 구하러 올 수 없다. 특히 여인은 더욱.
“들어갔잖아?!”
들어가?
이응선은 고개를 돌렸다. 태자부 사람들이 눈을 마주쳤다. 들어갔다고? 저 불타는 동궁으로? 들어갔다는 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건, 태자를 구하러 갔다는 의미다.
태자가 저기서 살아 나온다면, 그가 정신만 차린다면 이 모든 건 뒤엎을 수 있다. 황제가 아니라 천지신명이라 할지라도 태자를 불태워 죽일 수는 없다. 태자가 살아만 난다면 그는 피해자가 된다. 그는 완전하게 되살아난다.
“서, 설마.”
태자부의 사람들이 결박되어 있고 어디서 온 지도 모르는 이들이 그들을 결박하고 있는 모습을 구경만 하고 있던 궁인들의 눈이 조금씩 일렁이는 게 보였다. 궁인들은 애초에 어느 쪽도 참견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현재 권력은 누구에게도 정착되지 않았고 이럴 때 참견하면 크게 불호령이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궁 사람들, 혹은 다른 쪽에서 일하는 궁인들은 그저 멀찌감치 서서 구경만 할뿐이었다. 동궁이 불타고 태자부의 궁인들이 끌려 나오고 동궁의 권력이 강제로 이양되는 이 엄청난 구경거리를 그저 즐길 뿐이었다. 그러나 현재 상황이 많이 달라지자 궁인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태자가 만약 되살아난다면? 구경만 하던 자신들이 멀쩡할 것인가?
구경하던 이 중 몇 명이 조심스럽게 나무 뒤에 숨어 상황을 확인하려 했다.
“죽고 싶으냐?!”
내관이 으르렁거리자 그들은 다시 물러났지만 그중 한 명이 아,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태자비 전하다!”
비전하?
이응선이 고개를 드는 순간 그 한 명이 다시 소리쳤다.
“비전하께서 태자 전하를 모시고 나왔어!”
그건 일종의 신호였다. 태자는 살아남았고 이 반란은 실패하였다는. 태자는 불길에서 나왔고 죽지 않을 것이다. 날이 밝아 그가 눈을 뜨면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그는 가차 없을 것이고 태자부는 영광과 함께 삼엄한 검을 지니게 되리라.
그걸 알게 되자마자 궁인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리고 태자부 사람들도 몸을 일으켰다. 더 이상은 수그릴 이유가 없었다. 태자는 살아남았다. 냉궁에 있는 태자비가 어떻게든 달려왔고 태자를 살려 냈다. 태자는 이 밤을 넘기게 된다!
이응선은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내관과 무관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 이 새끼가…!”
“풀어.”
이응선은 제대로 발음이 되지도 않는 입을 움직여 명령했다. 내관이 삿대질을 하려고 했지만 어디선가에서 구경하고 있던 금위병들이 나타났다. 그들이 창을 겨누었다.
“명령이다!”
아직도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어두운 절망은 없었다.
“비전하!”
누군가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 이응선은 자신의 팔을 양쪽에서 놓아주자마자 서둘러 태자와 태자비 쪽으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