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몽중연 (48)화 (48/100)

48.

눈이 번쩍 뜨였다.

이연의 눈에 보인 것은 막사의 천장이었다. 막사? 고개를 돌리자 혼비백산이 된 장수들이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누군가가 뛰쳐나가 외쳤다.

“전하께서 깨어나셨다!”

그 목소리의 다급함에 이연은 자신이 언제 잠들었었는지 깨달았다. 잠들었었다는 표현은 옳지 않다. 그는 쓰러졌었다. 빨리 전쟁을 끝내고 돌아가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는 눈을 감았었다. 전쟁을 끝내야 하는데 머릿속에서 먹구름이 몰려왔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깨어나니, 지금이었다.

“전하?”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멀리 들렸다. 이연은 그 사람에게 손을 들어 괜찮으니 조용히 해 보라는 의사를 표하고는 생각에 빠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꿈이란 본디 깨어나면 흩어져야 하는데 모든 내용이 선명하게 기억났다. 서혜의 죽음. 그 죽음이 가져온 절망. 그다음에 찾아온 길고 지루한 생. 꿈에서 만난 서혜. 그것만이 행복하고 그걸 놓을 수 없어서 괴로운 삶. 그리고 찾아온 궁주.

…궁주.

이연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 눈에 보였다. 왠지 모르게 조금 늙은 것 같은 신궁의 궁주가 파리한 안색으로 웃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천천히 무릎을 꿇고 곡배했다. 그 모습이 너무나 느릿하게 눈에 감겼다. 신궁에 있어야 할 궁주가 왜 자신의 막사에 있는가? 이연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장수 중 한 명에게 시선을 주었다.

“전하, 나흘간이나 혼수상태셨사옵니다.”

“나흘?”

그 긴긴 생이 고작 나흘 동안 꾼 꿈이라고?

나흘이라는 말을 듣자 문득 목이 칼칼한 게 느껴졌다. 얕은 기침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누군가가 서둘러 잔을 올려 왔다. 물잔을 받아 벌컥벌컥 들이켜고 싶은 마음을 참고 천천히 들이마셨다. 물이 목을 축일 때마다 매캐하게 목이 아팠다. 그리고 천천히 머리가 돌아갔다.

그게 꿈이라고?

꿈이라고 하기엔 모든 것이 너무나 선명했다. 그건 다른 인생처럼 느껴졌다. 어딘가에서 살다 온 기분이 들었다. 모든 것이 구석구석 기억나는 건 아니었으나 주요 골자들은 분명하게 떠올랐고 무엇보다 감정이 여전히 온몸에 남아 있었다.

서혜를 잃고 그저 기다리는 자신. 절망이 사라지길 기다리는데 끝나지 않았다. 절망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더해지는 것이었다. 완전한 끝은, 여백이 없는 마지막은 도무지 적응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서혜가 냉궁에서 죽었다는 걸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은 이해도 못 하고 납득도 못 했다. 마음과 머리가 계속 분리된다.

한 해, 한 해. 미쳐 가고 있었다. 마음과 머리가 분명히 언젠가는 같은 곳에 겹쳐져 있었는데 점차 분리되고 다른 길을 가더니 그사이 공동에 광기와 절망이 들어앉아 시커먼 아가리를 벌리고 자신을 잡아먹으려 들었다. 무엇보다 더 무서운 건 자신의 태도였다. 그는 그 시커먼 것들에게서 도망치지도 반격하려고 들지도 않았다. 그저 무력하게 두 팔을 늘어뜨리고 있을 뿐이었다.

아아, 그래.

물잔이 비어 갈 쯤 그는 꿈속의 자신이 무엇을 원했는지, 꿈속의 자신은 끝까지 깨닫지 못했던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꿈속의 자신은 죽고 싶었다. 서혜를 바치고 이룬 것이라 차마 스스로 버리지 못했을 뿐 사실은 아주 간절하게 그 삶을 끝내고 싶었다. 그는 모든 걸 망치고 싶었다. 모두에게 침을 뱉고 싶었다. 아주 격렬하게 욕을 하고 싶었다. 너희가 그토록 바라는 황위가 이딴 것이라고 흙발로 짓밟고 싶었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지독히 절망적이었다.

그리고 그건 단순한 꿈이 아니었다. 그건 예지몽에 가까웠다. 서혜를 잃으면 자신은 분명 그렇게 되리라.

봄을 잃은 곳에는 결국 겨울만 머무르게 될 터이니.

“소인, 폐하의 소망을 들어드리러 왔나이다.”

분명, 궁주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었다…. 그리고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될 궁주가 나타났으니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연은 물잔을 내밀었다. 그러자 장군 한 명이 손수 물을 따랐다. 찰랑거리는 수면을 내려다보다 이연은 천천히 물을 한 잔 더 마셨다.

쿵,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운명이 거세게 흘러가고 자신은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꿈속의 삶과 똑같이 흘러갈 뻔했던 순간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왔다. 그리고 이연은 아주 강렬하게 예감할 수 있었다. 이 선택은 대가를 필요로 할 것이다. 그 대가가 뭔지는 몰라도 단순한 것은 아니리라. 가려는 길은 가시밭길이고 그 끝에 서혜가 있다는 보장도 없다. 하지만.

길은 둘이고 한쪽에는 서혜가 아예 없다. 그리고 한쪽에는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 그렇다면 당연히 다른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 이 선택은 망설일 이유가 없다. 어차피 황위 따위는 자신이 바랐던 것도 아니다. 인생에서 많은 것을 빼앗기고 그때마다 황위 때문이라는 이유가 붙었으니, 그렇다면 황위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이연을 서혜만큼 매혹시키는 힘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애초에 그 자리가 누군가를 매혹시킬 수 있는 힘이 있기나 한지 이연은 의심스러웠다. 거기는 그저 꼭대기일 뿐이다. 산의 꼭대기. 의자 하나를 겨우 둘 수 있는 곳. 높고 가파르고 누군가와 나란히 설 수도 없으며 언제든 밑에서 의자를 끌어당겨 낭떠러지로 밀어뜨릴 수 있는 곳. 그 걱정을 언제나 해야 하는 곳. 모두의 위에 군림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꼭대기에 서려는 이유를, 사실 이연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쿵, 소리가 들리지 않아.

서혜를 만났을 때 그 소리가 들렸다. 그 폭력적인 연정을 기억한다. 아니, 그건 몸에 체득되어 있는 것이다. 벗어나 본 적이 없다. 보이지 않는 사슬이 이연을 묶고 있었다. 강제로 무릎 꿇게 만든다. 서혜의 앞에 기게 만든다. 이연은 한 번도 서혜에게 강자가 되어 본 적이 없었다. 서혜의 존재는 언제나 그 소리를 냈다. 쿵, 하는 소리. 이연의 인생도 운명도 심장도 모두 부숴 버리는 소리를.

그런데 정작 항명을, 반역을 생각하는 이 순간에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갑자기 우스워졌다.

푸하하하, 이연이 웃음을 터뜨리자 막사 안의 모두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이연을 바라보았다. 사내다운 미장부가 유려한 목을 꺾으며 웃고 있었다. 그는 환하게 웃고 있었고 후련해 보였다. 강건하기 짝이 없던 태자가 갑자기 쓰러지더니 나흘이나 사경을 헤맸다. 그러다 갑자기 일어나서 실성한 사람처럼 웃기 시작하니 모두의 마음에 불길함이 깃들었다. 광증이라는 단어가 모두의 머릿속을 새빨갛게 물들였을 때 이연이 웃음을 뚝 그쳤다.

즐거운 건 아무것도 없었다. 서혜가 냉궁에 있다. 몸이 약한 여인이다. 어릴 때부터 학대를 많이 당해서, 겉으로는 귀하게 컸어도 속으로는 곪을 대로 곪아 냉궁 같은 곳에서 버틸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그게 아니어도 냉궁이라니. 귀한 사람이었다. 다섯 꽃잎이어서도 아니고 천하제일미라서도 아니다. 그냥 심서혜는 귀했다. 이연에게 그녀는 가장 귀한 사람이었다. 그깟 황위보다 몇 배는 더.

빨리 깨달아야 했다.

서혜를 우위에 뒀더라면 그녀를 혼자 두고 이런 데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결벽한 사람이다. 고지식하고 완고하고 우직하기가 소 같은 이다. 태자비라는 존귀한 자리에 올라 있으면서도 정당한 거래를 하려 하고 정의를 찾고 싶어 하고 가능하면 모든 것을 도리에 맞게 행하고 싶어 한다. 순리에 따르려고 노력한다. 그런 여자가 겉으로나 호사스럽지 안은 황폐하기 이를 데 없는 황궁에 있으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야 했다.

결국 황위와 그녀를 둘 다 가지려고 했던 것이 이 사달을 만들었다. 심서혜는 그렇게 가질 수 있는 여자가 아니다. 둘 다 가지겠다는 그딴 마음으로는 가질 수 없고 지킬 수 없다.

사실은… 꽤 안이한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 서혜를 보며 둥글어졌던 것일 수도 있고 서혜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다. 아니, 서혜 탓을 하면 안 되지. 이연은 또 웃었다. 그가 신경질적으로 웃을 때마다 사람들이 어깨를 움츠렸지만 상관없었다. 이제 모조리 상관없어졌다. 이연은 높이 손을 들었다.

쨍그랑.

이연이 내던진 물잔이 땅에 전광석화처럼 내리꽂혀 산산이 부서졌다. 히익. 누군가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이연은 피식 실소했다. 흘러내리는 머리가 거추장스러워 한 손으로 넘기면서 그는 물잔이 깨지는 데에도 꼼짝하지 않고 있는 궁주를 내려다보았다.

“우연이라고 할 셈은 아니겠지, 궁주.”

남들은 몰라도 당신은 내 꿈을 알고 있겠지. 이 역겨운 상황을 당신은 이미 점치고 있었을 것이다.

이연의 말에 궁주가 고개를 들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었던 것인가. 이연은 그 얼굴을 부숴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다 한 가지 사실에 기분 좋게 웃을 수 있었다. 신궁의 궁주 또한 심씨 가문. 심지어 종가 출신이다. 가주인 심재경의 동생으로 심재경과 무척이나 사이가 좋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이 궁주가 심가의 반역을 미리 점쳤다면 그걸 좌시하고 있었을 리가 없다.

그녀가 무슨 궁리를 하고 온 것인지도 모르고 자신을 어찌 이용해 먹을 생각인지도 아직 모르나 하나는 확실하다. 그녀는 이 일을 예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대가로 가문을 잃었다.

심재경은 서혜에게는 참으로 악랄한 아비였으나 이 궁주에게는 무척 다정한 오라비로 알려져 있다. 사람이라는 게 참 간사하여 모든 사람에게 다 악랄하고 모든 사람에게 다 다정할 수가 없는 노릇이다.

심재경 같은 간신배에게도 소중한 가족 한둘쯤은 있고 그에게는 그게 동기간이었던 모양이다. 아내도 자식도 소중하지 않은 남자가 정작 형제와 남매들은 소중히 여겼다니 우스웠다. 어쨌든 심재경과 궁주는 사이가 매우 좋았다. 그러니 이 궁주는 지금 무척….

궁주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분노하고 있겠지. 이연은 웃는 낯으로 말했다.

“용건을 들어 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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