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조금 듣기 언짢은 말들이 돌아다닙니다.”
어느 날 첨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연이 두루마리에서 고개를 들자 그는 곤란한 표정으로 소문에 대해 신중한 단어를 써서 고해 왔다. 말을 돌리고 돌렸지만 소문은 간단했다. 이연이 엄인, 즉 고자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태자인 그가 한 여인, 그것도 태자비만을 두고 있는 건 그 탓이라고 수군거리는 무엄한 인간들을 뿌리 뽑자는 첨사를 보며 이연은 픽 웃었다.
“관둬라.”
“하오나 전하.”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귀찮았다. 그 소문은 이미 알고 있었다. 모후가 황후전으로 불러 길길이 날뛰었으니까. 그때도 이연은 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계속 화를 내던 황후가 불안해져 정녕 사실인 거냐고 물었을 때 이연은 희미한 웃음만 짓고 황후전에서 물러났다. 그러고 나서 황후전에서 난리가 났다는 걸 간자를 통해 들었지만 이연은 코웃음도 치지 않았다.
이연은 다른 여인을 안고 싶은 마음이 별로 들지 않았다. 동하지 않으니 손을 뻗지도 않는다. 서혜를 대상으로는 하고 싶은 게 많았다. 하지만 서혜는 너무 작고 연약하고 무엇보다 바른 사람이었다. 이연은 서혜에게 하고 싶은 많은 것들을 꾹 눌러 참고 있었다. 그녀의 발가락부터 삼키고 싶은 욕망을 매일 눌러 삼키면서 적당한 잠자리만을 해 왔다. 그게 아니라면 서혜가 놀랄 것 같았으니까.
엄인이라고 하기엔 마음속 욕망이 너무 거셌다. 서혜를 생각하면 그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싶고 짐승처럼 교미하고 싶기도 했다. 강하게, 혹은 더 질척하게. 더 울리고 싶고, 애원을 들어 보고 싶기도 했다. 욕망이 계속 커져 고개를 드는 것을 힘으로 내리누르고 있다. 가면 갈수록 욕망은 강해지고 인내의 힘은 약해져 간다.
언제까지 이 줄다리기에서 이길 수 있을까. 결국은 지는 날이 오리라고 이연은 생각했다. 그럼 서혜는 놀라고 어쩌면 잠자리를 싫어하게 될 수도 있다. 이연은 그렇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잠자리에서 서혜는 편안해 보였다. 이연의 품에 안겨 있는 서혜는 마치 세 살 때의 그녀처럼 모든 걸 내맡기고 있다. 그 완벽한 신뢰를 받고 싶었다.
아아, 그 신뢰. 그 완벽한 신뢰의 시선.
이연은 첨사를 손짓으로 내보내고 손으로 눈가를 눌렀다. 눈을 감으면 서혜가 떠올랐다. 무척 총명한 여인이다. 후궁 암투 속에서 교활함이 아니라 바른 처신으로 우뚝 설 수 있다는 건 보통 총명함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도리에 어긋나지 않으면서도 후궁 암투에 휩쓸리지도 않았다. 대단한 처신이었다, 정말로. 이연 자신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서혜가 간자를 사용하는 방식은 참 독특했다. 간자를 사용할 때는 다들 협박을 하기 마련인데 서혜는 그들의 곤란한 점을 해결해 주는 방식으로 간자를 사용했다. 그러면서도 그 곤란한 점을 완전히 해결해 주지는 않아서 간자를 요긴하게 사용했다. 그녀는 이용당하지도 않았고 타인을 이용하지도 않았다. 언제나 정당한 거래만을 했다. 간자가 일주일 간 간자 노릇을 한다면 일주일 치의 곤란함을 해결해 주는 식이었다. 이런 방식도 있다는 걸 이연은 서혜를 통해 배웠다.
서혜는 늘 특이했다. 길이 없으면 만들어 냈다. 그 길은 다소 변칙적이나 분명 반대편에 있는 사람도 득을 보는 길이었다. 서혜는 홀로 득을 보는 걸 선택하지 않았다. 그녀는 도리를 알았다. 이 황궁에서 그렇게까지 바르게 사는 사람은 그녀 한 명뿐이다.
빠지지 않을 수 없다.
돌아보면 새로운 모습이 있는 여자에게 어떻게 안 빠질 수 있을까. 아름답고 정의로우며 자기 주장을 내세우지 않지만 결코 물러나지도 않는다. 태어나서 내내 학대받았으나 타인을 갈취하지 않는다. 찬란한 여자.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 작은 몸으로 자신을 보호하려고 하던 그때부터 이런 사람이라는 걸 예감했었다.
다른 여인을 안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다. 안아 볼 생각을 하지는 않았지만 아마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를 아주 조금이라도, 손톱만 한 조각이라도 잃게 되는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라면 그럴 가치가 있는가? 애초에 그는 다른 여인을 안고 싶지도 않은데. 한 번도 그것을 바라 본 적도 없는데.
그러니 황궁에서 그는 반쯤 엄인인 셈이다. 자신의 정실만 안는 남자라니, 황궁에서는 고자 취급을 당하고도 남았다. 이연은 굳이 소문을 잠재우려 들지 않았다. 황궁의 기준에서는 반쯤 고자이기도 하고 그게 아니더라도 차라리 고자라는 소리를 듣는 게 편했다. 서혜가 아닌 다른 여인을 안으라는 압박을 받는 건 지겨웠다.
어떤 여인을 안으라는 것인가? 서혜를 마음껏 안아 본 적도 없는데, 서혜도 안기 위해서 온 힘을 기울여 시간을 내야 하는데, 그런 시간을 다른 여인을 안기 위해 낸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연은 그 소문에 대응하지 않았다. 결국 반쯤은 사실이니까.
그 소문에 대응한 건 의외로 서혜였다. 서혜는 놀라서 그녀답지 않게 주변을 샅샅이 뒤졌고, 결국 소문의 근원지를 찾아내고야 말았다. 늘 그렇듯 소문의 근원은 가까이에 있었다. 이연의 내관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벌을 내렸다. 자신이 쫓아낼 수 있는 사람들은 쫓아냈지만 이연의 내관은 그녀가 쫓아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그녀는 자신이 내릴 수 있는 가장 큰 벌을 내렸다.
그 일을 알게 되었을 때 이연은 너무 즐거워서, 가슴이 두근거려서, 괜히 정원을 돌아다녔다. 마음이 달음박질치고 있어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또 그를 구하고 싶어서 보호하고 싶어서 온 힘을 다했다. 그녀는 세 살 적의 일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나 여전히 그를 보호하고 싶어 했다. 세상에서 유일한 그의 편.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계산하지 않는, 그의 온전한 사람.
도무지 이 연모지정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다.
누군가가 자신을 이 연모지정의 늪에서 빼내려고 손을 내민다면 이연은 그 손목을 잘라 버릴 것이다. 이곳에 빠져 죽겠다. 이 달콤한 늪에서.
***
이것이 이연이 서혜에게 자신을 드러낼 수 없었던 이유였다.
서혜는 올바른 사람이었고 이연은 그렇지 않았다. 이연이 서혜를 잃었을 때 그는 전장에 있었다. 서혜가 냉궁에 갇혔다는 걸 들었을 때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누가 냉궁에 갇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는 당장 황도로 향하려 했지만 장수들이 그를 뜯어말렸다. 지금 가면 항명이라는 말에 이연은 멈출 수밖에 없었다. 항명. 그건 반역을 의미한다.
나이 든 호랑이라고 부황을 말했지만 그는 결국 맹수의 왕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고작 그의 아들에 불과했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황도로 귀환할 수도 없고 이 전장을 이기기 전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게 현실이었다.
오지 말았어야 했다. 아무리 모후가 곤란한 지경에 처했어도 오지 말았어야 했다.
이연이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든 전쟁을 빨리 이겨서 돌아가야 한다고 그가 이를 악물었던 밤, 그는 꿈을 꿨다.
언젠가는 모든 것이 아름다웠고.
한때는 모든 것이 완벽했었던 과거와.
갑자기 찾아온 끝인 현재.
그리고 모든 것이 퇴색된 미래까지 보여 주는 꿈이었다.
꿈속에서 그는 서혜를 잃었다. 그리고 황제가 되었다. 강산의 주인이 되었는데 그는 매일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서혜가 없었다. 하라는 대로 했다. 알지 못하는 어떤 여인과 성혼을 했고 다른 여인들과도 잠자리를 했다. 아이가 계속 생겼다. 서혜와의 아이만 생각해 봤었는데 그런 아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다른 여인의 아이들. 이연은 도무지 애정을 가질 수가 없었다.
모든 게 싫어졌다. 그렇다고 무언가를 포기할 수도 없었다. 서혜를 잃고 얻은 자리였다. 참으로 값비싼 자리. 속이 뒤집히는 건 그만한 가치를 보여 주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황제라고 모든 걸 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예를 들면 냉궁에서 죽은 가여운 정인을 되살리는 일 따위는 황제가 아니라 그 무엇이어도 해낼 수 없었다. 잠도 오지 않았고 음식의 맛도 알 수 없게 되었다. 나랏일 따위도 관심에서 멀어졌다. 어찌하란 말인가. 그 나라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서혜가 없는데.
사람들은 성군이라고 칭송하는데, 도리어 아무런 관심이 없으니까 나라가 잘 돌아간다. 권력에 대한 의지도 없고 가지고 싶은 것도 없으니 아무도 이연을 좌지우지할 수 없다. 약점도 없는 황제는 그저 해야 할 일을 무심히 할 뿐이다. 도리대로 행하니 모든 것은 순리대로 이루어진다. 그러니 거기에 이연의 행복은 없었다.
이연은 꿈속에서 꿈을 꾸는 날만을 기다렸다. 단 하루, 서혜의 기일에는 푹 잘 수 있었다. 그날에는 서혜를 꿈꿨다. 서혜가 꿈속에 있었다. 꿈에서 나올 수가 없어서 이연은 서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저 단둘이 있기만을 소망했다. 꿈속의 꿈. 그 아스라이 먼 곳이라도 좋으니 그저 단둘이, 그저 영원히. 그것만을 소망했다. 꿈속에서 꿈을 꿀 때 행복했다.
서혜야. 평생 불러 보지 못한 이름을 불러 보았다. 서혜가 말갛게 웃었다. 여전히 그의 봄이었다.
그렇게 살던 꿈속의 어느 날.
신궁의 궁주가 찾아왔다.
***
“만세, 만세, 만만세. 홍복을….”
“관두어라.”
궁주의 얼굴을 보는 건 괴로웠다. 이연은 법도대로 절하는 것을 관두라고 명했다. 궁주의 얼굴에서 희미하게나마 서혜의 얼굴이 보였다. 궁주는 서혜의 고모였으니까 둘은 조금 닮을 수밖에 없다. 심씨 가문은 본디 그 미색으로 유명세를 떨쳤으니 당연한 일이다. 종가로 갈수록 미색이 대단했다. 특히 서혜의 미모는 온 황도를 뒤흔들었다.
“무슨 일이냐?”
빨리 내보내고 싶어서 이연은 다짜고짜 용건을 물었다. 사실 알현도 허하여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궁주는 끈질기게 알현을 청했고 마지막에는 ‘황제 폐하께서 바라시는 바를 이루어드릴 수 있다.’라고 까지 말해 왔다. 이연은 결국 만나지 않을 수 없었다. 너 따위가 뭔데, 꼴 보기 싫은 심씨 일족의 생존자 따위가 내가 원하는 게 뭔지나 알고 그딴 소리를 지껄이는 건가, 해서였다. 그때 궁주가 말했다.
“폐하,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어디로 가시겠나이까?”
궁주는 순종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희끗희끗한 머리를 보며 이연은 잠시 눈을 뜬 채 꿈을 꾸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어디로 갈 것이냐고.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는 어디로 갈 것인가.
참으로 우습게도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그가 돌아갈 지점은 정해져 있었다. 이 무가치한 황제 자리를 위해서 서혜를 포기했던 곳, 그 전장이다. 반역이라고 해도 좋으니 서혜를 찾으러 가겠다. 이걸 생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 이건 본능이었다. 머리가 움직이기 전에 가슴이 내달렸다. 서혜를 찾을 수만 있다면 이 모든 걸 내버려도 좋았다. 머리는 멈췄다. 그저 혼이 외치고 있었다.
그때 궁주가 고개를 들었다. 나이에 비해 훨씬 늙은 듯한 그 얼굴이 이연을 보며 아주 조심스럽게 말했다.
“소인, 폐하의 소망을 들어드리러 왔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