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몽중연 (46)화 (46/100)

46.

서혜의 열이 내렸다는 이야기는 사흘 뒤에야 들을 수 있었다. 태의가 서혜를 진맥하고 열을 내릴 수 있음을 확언한 다음에야 이연은 황궁으로 향했고 부황으로부터는 큰 꾸지람을 들었다. 승전연은 없었던 것이 되고 큰 상을 받을 것이라고 예상되었던 이연은 두 손이 빈 채로 남게 되었다.

세인들은 태자가 정혼녀를 살리기 위해 상을 포기했다며 역시 도리를 아는 대장부라고 칭송했다. 그리고 황궁의 사람들은 도대체 태자가 무슨 꿍꿍이로 저 시점에서 그동안 본 척도 하지 않던 심가에 직접 찾아갔는지 그 속셈을 알아내려고 고군분투했다. 그중에는 태자의 친모인 황후도 있었고, 운왕의 어머니인 혜비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태자의 속내를 알아내지는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의 계산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고작 여인의 열병을 치료하기 위해 전리품도 공도 포기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불가능의 영역이었다. 이연도 황궁의 상식을 잘 알고 있었기에 자신의 속내가 알려질 거라고 생각도 하지 않았다.

7년이나 보지 않았던 정혼녀를 찾아가 그 열을 내리게 하고 돌아온 일을 가지고 연모지정을 운운하는 이가 있을 리 없었다. 이연이 가진 감정은 황궁의 상식으로는 전혀 이해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연 자신도 종종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런 게 연모지정일까, 그는 황궁으로 돌아와 살아 있는 법도라고 불리는 생활을 하면서 후궁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마치 어항을 들여다보는 사람처럼 아주 고요하게 그들의 삶을 한 발짝 너머에서 바라보았다.

황제의 총애를 두고 다투는 사람들. 그중에는 자신의 모후도 있었다. 그리고 때마다 다른 여인을 총애하는 황제. 그의 간택에 울고 웃는 여인들. 그 여인들의 눈물과 웃음에 놀아나는 대신들. 오가는 청탁들. 돌고 도는 권세.

한 달 뒤, 서혜가 그를 직접 찾아왔다. 아비인 심재경이 끌고 온 서혜는 매우 불편한 얼굴을 하고선 제 어미처럼 나붓하게 절을 했다. 이상한 것은 둘의 태가 참 닮았다고 느끼는 데도 주는 느낌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었다. 심서혜의 모친은 밟아 죽이고 싶더니 서혜의 절하는 모습은 그 잠깐 무릎을 굽히는 것조차 안쓰러웠다.

이연에게 한마디라도 더 말을 붙이고 한 번이라도 더 눈도장을 찍히고 싶어 하는 심재경을 기어코 멀리 쫓아내고서 이연은 서혜와 단둘이 정원을 걸었다. 서혜는 보폭이 작아서 이연은 평소보다 훨씬 느리게 걸어야 했다. 그게 마치 꿈결을 헤매는 것 같은 걸음이라고 이연은 생각했다.

“저를 기억하십니까?”

이연이 묻자 서혜가 예, 하고 웃었다. 그 웃음이 이연의 심장을 덜컹 흔드는 것도 잠깐.

“어릴 때 은행잎이 물들었던 길목에서 처음 뵈었던 것을 기억하나이다.”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심장이 쿵 떨어졌다.

처음? 처음이라고?

이연은 그들이 처음 만났던 때를 분명하게 기억한다. 그들은 동궁에서 처음 만났다. 서혜는 멀리서 이연이 서연에 든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가 말했었다. 외로우셨나 봅니다. 누구는 그 말이 심장에 꽂혀서 지금도 뺄 수가 없는데.

“그러시군요.”

이연은 눈을 내리깔았다. 그 이후로도 조심스럽게 서혜를 떠본 결과 그녀는 세 살 때의 일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연은 실망했다. 그때에 목매달고 얽매여 있는 건 자신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연모지정이니 뭐니 하는 것들이 다 우습게 느껴졌다. 이런 것들에 목숨을 걸고 매일같이 그녀를 궁금해하던 자신도 어처구니없게 생각되었다. 그녀는 자신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녀?

사실 그녀라고 말하기에도 뭐한, 아이였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거야.

이연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는 첫 몽정을 한 순간부터 수많은 여인의 유혹을 받았고 모후의 노골적인 압박도 받았다. 영웅은 여인을 알아야 한다는 말에 그는 혀를 찼었다. 여인을 알아서, 조강지처와는 척을 지는 건가요. 아버지처럼? 그 소리가 혀끝에서 맴돌았는데 겨우 삼켰었다. 꽤 끈질긴 재촉을 모조리 뿌리치며 절조를 지켰는데 무엇을 위해 지켰나 싶었다. 이미 자신의 나이에 장황자인 운왕은 아이가 있었다.

심서혜가 아닌 여인.

이연은 순간 픽 웃고 말았다. 놀랍게도, 사실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상상도 해 보지 않았다. 심서혜가 아닌 여자. 물론 서혜를 대상으로도 그런 불결한 것들을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저 곁에 두는 여인이라고만 생각해도, 오로지 서혜였다. 꼭 정실이 아니라도 자신의 여인이라는 자리에 서혜가 아닌 다른 여인을 꿈에서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리고 그게 너무 당연한 나머지 지금 이 순간이 지나치게 어색했다. 심서혜가 아닌 여인이라는 선택지를 생각한다는 게.

“전하.”

그리고 그 선택지를 생각하는 게 현실적이라고 여기면서도 꽤 역겹다는 게.

심서혜가 아닌 여인이라는 게, 내 인생에 존재하긴 하는 건가?

이연은 속으로 미간을 좁혔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미미한 웃음까지 지으며 서혜를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었다.

아, 봄이군.

바람이 불어서 알았다. 아니, 꽃잎이 날아서 안 것 같기도 하다. 아니, 아니. 그녀의 머리카락이 날려서 알았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있었다. 빛이 그녀를 비추고 있었다. 새하얀 피부가 더 하얗게 빛났다. 그 빛이 햇빛이라는 걸, 조금 늦게 알았다. 세상이 환하다는 걸 그녀가 웃어서 알았다.

그녀가 웃고 있었다.

“꽃잎이…. 소녀가 잠시….”

그녀가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이연은 귀가 잘 들리지 않았다. 물속에 들어간 것처럼 귀가 먹먹했다. 소녀가 잠시? 그 봄바람에 흐려졌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서혜가 웃고 있었다.

소녀라고? 어이가 없었다. 서혜는 너무 어렸고, 자신의 여인이 되려면 앞으로 8년을 더 있어야 했다. 7년을 기다리는 것도 어마어마하게 지루했다. 심지어 그 7년 동안 서혜는 지난 시간 대부분을 잊어버렸다. 둘이 같이 밥을 먹었던 것도 이야기를 했던 것도 다 지워 버렸다. 앞으로의 8년간은 또 얼마나 많은 것을 잊을 것인가. 또 얼마나 많은 것을 이연 혼자 담을 것인가.

그런 건 싫다고 생각하면서도.

이 연정은 정말 강압적이고 폭력적이라서, 이연은 마치 목줄에 끌려가는 개 마냥 고개를 숙였다. 태자로 태어나 부황 외의 사람에겐 고개 한 번 숙여 본 적 없는데, 그냥 쉽게 숙여졌다. 마치 그게 당연한 것처럼.

서혜의 손가락이 다가와 이연의 머리에 붙은 꽃잎을 떼어 주었다. 서혜의 눈이 꽃잎에 한 번 닿더니 곧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엇을 찾는가 하여 이연도 고개를 들고 서혜의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 이윽고 서혜가 웃었다. 자신을 보고 웃을 때보다 더 환하게, 더 기쁘게.

그녀가 들고 있는 꽃잎과 똑같은 꽃잎을 달고 있는 꽃을 보고 웃었다. 붉은 꽃이었다. 고작 저따위에 서혜는 웃고 있었다. 이연을 볼 때보다 더 기쁘게. 그게 정말 화가 나고 짜증이 나면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서혜가 웃고 있어서, 그게 너무 어여뻐서.

네가 웃고 있으니까.

아아, 그래. 나는 이 얼굴을 보고 싶었지. 그래서 사람을 죽이고 또 죽이고 뭐든 했나 보다.

이연은 고개를 숙였다. 서혜는 웃고 있는데 그는 울 것 같았다. 자신이 무엇을 원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건 너무 작았다. 태자인 자신이 원하기엔 참 작은 것이었다. 손에 쥐기에 너무 작고 연약하고 소중한 것. 강하게 쥐면 부서뜨릴지도 모르는 것. 그러나 절대로 잃어서는 안 되는 것.

“전하?”

“아아. 바닥에, 뭐가 있군요.”

이연은 그냥 그렇게 말했다. 거기에는 봄이 없었다. 땅바닥은 겨울이었다. 말도 안 되는 눈물을 삼키고 고개를 들면 봄이 웃고 있었다.

***

열 살의 심서혜가 열여덟의 심서혜가 되기까지, 이연은 한없이 인내했다. 심서혜는 천하제일미라는 수식어를 얻었고 온 황성의 찬사를 독차지했다. 서혜의 미모에 온 남자들이 부나방처럼 꼬여 들었다. 몇은 쫓아냈고 몇은 목을 잘랐다. 태자의 정혼녀라는 사실이 많은 사내의 불타는 마음에 찬물을 끼얹었지만 모든 불을 다 끄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태자가 천하제일의 미인과 정혼하였다, 라고 사람들은 소곤거렸지만 이연은 사실 서혜가 천하제일미라는 것이 실감이 되진 않았다. 일단 그는 세상의 모든 미인을 모아 둔 후궁에서 큰 탓에 여인의 미모를 평가하는 일에 매우 둔감한 편이었다. 왼쪽을 봐도 무슨 무슨 미, 오른쪽을 봐도 역대 가장 어떻다는 미인, 이런 식이었으니 그로서는 미인이라는 존재가 발길에 채이는 돌멩이 같은 존재였었다.

게다가 그는 평생 서혜 하나만 바라보았으니 애초에 여인의 미모나 매력에 대한 우열을 재 보는 법도 없었다. 하여, 그는 천하제일미가 자신의 여인이라는 데에 대한 자부심보다는 불만이 가득했다. 온갖 간이 부은 놈들이 서혜를 노리고 있으니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성혼하게 되었을 때, 그는 진심으로 안도했다. 그녀는 자신의 품인 동궁으로 들어왔고 더 이상 잃을 일 따위는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평생 아껴 주리라. 보호해 주리라. 이연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무렵에.

서혜가 쓰러졌다.

“비는?”

이연은 서연을 집어치우고 달렸다. 왜, 도대체 왜 쓰러진 거냐고 서혜의 상궁인 서 상궁을 윽박지른 결과 이연은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다.

서혜가 이연을 걱정하여 매일 신당에서 기도를 하다가 과로로 쓰러졌다는 것이다. 왜 신당에서 기도를 한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당황한 이연이 그 연유를 묻자 서 상궁이 더듬더듬 서혜의 마음을 설명하기 시작했는데 이연은 당혹하고 말았다.

이연은 부황과 사이가 좋지 못했다. 어릴 때는 그래도 조금 괜찮았던 적도 있었지만 이연의 세력이 강해질수록 부황은 이연을 더 싫어했다. 부황은 본디 운왕을 총애했는지라 더욱 이연의 모든 것을 마음에 들지 않아 했다.

그에게 이연은 황후의 아들이지, 부황 자신의 아들은 아니었을 테니까. 음독을 명한 적도 있고 그 외에도 심술궂은 하명이 여러 번 이어졌다. 이연은 죽을 고비를 넘겨 가며 강해졌다. 당연히 부자지간의 정 따위는 없었고 어린 호랑이와 나이 든 호랑이의 관계일 뿐이었다.

아직 발톱을 다 기르지 못하여 핍박받지만 결국 자신이 이길 것이라는 걸 아는 어린 호랑이. 지금은 강해서 핍박하지만 그 어린 호랑이를 죽일 수 있을 정도로 강하지는 못한 나이 든 호랑이. 그것이 바로 이연과 황제의 관계였다.

이연은 상처받지도 않았고 불편하지도 않았다. 모두가 서로를 이용하는 사이. 그것이 바로 황궁의 세계였으니까.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용당했고, 이용의 수단이었고, 이연 또한 그렇게 살아왔다. 거기서 예외가 된 존재는 서혜 한 명뿐이었다.

그리고 그 서혜가 자신을 위해 기도하다 쓰러졌다고 한다. 지아비인 자신의 드높은 뜻과 결백한 의지를 모두가 알게 되길 비는 마음으로 기도했다는 말에 이연은 어이가 없어졌다. 자신의 뜻은 드높지 않고 자신은 결백하지도 않다.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서혜는 바보가 아니다. 그녀는 태자비가 된 이래 놀라울 정도의 처신을 보여 주고 있었다. 후궁들 사이에서, 황후와 태후 사이에서, 올바른 처신으로 모두에게 완벽한 태자비라고 칭송받고 있는데 왜 이연의 일에는 이토록 어리석을까?

밤새도록 그녀를 간호하며 그녀가 눈을 뜨면 왜 이렇게 어리석은 짓을 했냐고 물어보려 했다. 그러나 정작 날이 밝아 올 때쯤에는 그럴 마음이 사라져 버렸다.

자신은 깨끗하지 않다. 결백하지도 않고 드높은 뜻도 없다. 권력도 좋아한다. 강한 힘을 싫어하는 사내가 있던가? 자신 또한 강함을 원한다. 이 강산을 소유하길 원한다. 이 나라를 가지지 않기에는 그가 살아온 세월의 희생이 너무 크지 않은가.

금력도 권력도 모두 원한다. 자신의 인생이 허비된 만큼 그 보상을 원한다. 그렇게 생각하다가 이연은 문득 깨달았다.

서혜는 아니라는 걸.

그들은 비슷하게 커 왔다. 거대한 소임에 짓눌린 채로 많은 것을 희생했다. 인생의 대부분이었다. 그들의 혼을 꺼내어 마주 보게 하면 정말 비슷하게 생겼을 것이다. 같은 곳에 생채기가 나 있을 것이고 같은 부위에서 피를 흘리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서혜는 금력이나 권력이 아니라 깨끗함을 원한다. 결백을, 드높은 뜻을. 그리고 이연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고 믿고 있다….

심서혜는 태자비가 된 이래 늘 처신이 올바르다고 알려졌다. 그리고 그녀는 매우 드물게도 알려진 것과 실제가 동일한 사람이었다. 법도를 지키고 예법을 존중하고 효도하고자 애썼다. 힘들어도 어려워도 자신을 달래고 달래서 옳은 길을 가려고 했다.

이연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그녀는 어떤 불이익 속에서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세 살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면 신에게 비는 일이라도 해 보자는 사람이었다. 기적을 일으키는 건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은 기적을 일으키려는 시도조차 해 보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기적을 일으키려는 시도라도 해 본 것이다.

나는 이런 인간이 될 수 없어.

이연은 서혜를 내려다봤다. 아직 날이 밝지 않아서일까. 마음이 한없이 어두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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