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저녁노을이 물러가고 하늘은 흑보라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연은 초조한 속내를 감춘 채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의 발에는 마치 구름이 붙어 있는 듯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이연이 뛰어내리자 그의 수하들도 어쩔 수 없이 말에서 내렸다. 그들은 모두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무구에 가려져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전우들끼리는 눈빛만으로도 서로의 상황을 알아볼 수 있는 법이었다. 모두, 이 상황이 한없이 불편했다.
“태자 전하, 승전을 감축드리나이다.”
심씨 종가의 가주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나타났다. 태자가 승전 행진 도중 이 저택에 들렀다는 말에 가주도 무척 놀란 터였으나 그는 결코 그런 내색을 비추지 않았다. 놀라서는 안 되었다. 그의 딸은 태자의 정혼녀였다. 태어난 순간부터 그리 짝지워졌으니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 딸의 처신이 올바르지 않아 칠 년 전 입궁이 금지된 걸 빼면.
황제조차 서혜의 처신이 아니라 그녀를 좌지우지하려는 후궁들을 비난했지만 서혜의 부친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서혜가 처신을 잘못했다고 생각했다.
후궁에서 어떻게든 처신을 잘했더라면 아이는 계속 황궁을 오갔을 것이고 자신의 입지도 커졌을 텐데 어리석은 아이가 처신을 잘하지 못하여 자신이 피해를 봤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세 살이라는 것도 그 아이가 무척 많은 고난을 겪었다는 것도 이 아버지에게는 알 바가 아니었다. 오로지 그에게는 자신의 득실만이 중요했다.
7년. 자그마치 7년간이나 딸은 부름을 받지 못했다. 황제나 황후는 물론이고 이 태자조차 마치 정혼녀가 없는 것처럼 행동해 왔었다. 서혜의 아비는 무척 분했었다. 물론 서혜가 다섯 꽃잎인 이상 태자비 자리는 그녀의 것이었다. 그러나 총애받는 태자비와 그렇지 않은 태자비의 입지는 천지 차이. 그는 비싸게 팔리리라 생각했던 딸의 무가치함에 짜증이 났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이 처신이 칼 같기로 유명한 태자가 승전 행진 중에 황제에게도 들르지 않고 자신에게 들른 게 아닌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태자는 의외로 태연했다. 그는 투구를 벗으며 시선을 흘끔 서혜의 부친에게로 돌렸다.
“오랜만이군.”
“예, 태자 전하. 이렇게 강녕하신 걸 뵙게 되오니 소인, 그저 눈물만이….”
“관둬라.”
태자가 말을 뚝 끊었다. 듣기도 같잖다는 어투였다. 서혜의 부친, 심재경은 불편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전하, 이렇게 소인의 여식을 찾아 주시니 그 광영이….”
“관두라고 한 번만 더 말하게 하면 네 목을 베겠다.”
“…….”
“못 할 것 같으냐?”
심재경은 서둘러 고개를 수그렸다. 완벽한 법도, 효의 표상, 그렇게 알려져 있는 태자지만 그의 냉철함에 대해 모르는 조정 신료는 없었다. 어릴 때부터 전장을 드나들었고 선봉에 서서 적을 거침없이 벴다. 다른 태자들도, 현 황제까지 포함하여, 모두 전장에서 커 왔다. 그러나 그들은 뒤에서 전과를 차지했을 뿐이지 선봉에 서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태자는 달랐다. 그는 마치 전쟁을 즐기는 것처럼 해치웠고 그의 앞에서는 일방적인 살육만 벌어졌다고 전해졌다. 태자의 무용이 얼마나 무시무시하던지, 그의 존재만으로 전세가 기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정도였다.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정작 그 기적을 일으킨 태자는 무표정했고 기뻐하지도 않았다고 전해졌다.
“어디 계시냐?”
심재경은 기묘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에게는 하대 정도가 아니라 아예 목숨을 빼앗아 버리겠다고 말할 정도면서 정작 자신의 딸자식에게는 존대를 하고 있지 않은가. 이 황자가 존대하는 상대는 부모 혹은 서모에 해당 되는 후궁들 정도일 텐데.
“침소에 있사옵니다. 아이가 아파서….”
“안다.”
“…….”
“하나밖에 없는 딸의 열이 한 달을 내리지 않고 있는데 유곽에서 기녀를 끼고 노는 맛이 나더냐?”
태자가 무심히 물었다. 화도 내지 않았고 싸늘한 시선 한 번 주지 않았으나 그래서 더 무서웠다. 심재경이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태어나자마자 걸음마와 함께 목검을 들었던 태자와 심재경은 그 기세에서 이미 차이가 났다.
“그, 그것이 아니오라….”
“귀중한 다섯 꽃잎이다. 잘못되면 나라의 손실인데 너는 무슨 대범함으로 제대로 모시지도 못했느냐?”
딸자식을 모시는 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리 말하고 싶었으나 심재경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태자가 너무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의 존귀함보다 기세가 두려웠다. 게다가 유곽에서 기녀를 끼고 논 것을 수만 리 너머 전장에 있는 태자가 어찌 알았단 말인가. 간자를 붙여 놨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화가 나지만 간자를 붙여 놓은 거냐고 역정을 낼 수 있는 상대도 아니니 그저 수그릴 수밖에.
“뵈어야겠다.”
태자의 말 한마디가 벼락처럼 떨어졌다. 심재경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열다섯 살의 소년 태자와 열 살의 정혼녀. 아직 추문이 나기에는 어린 나이지만 추문이 나지 못할 나이도 아니었다. 책봉도 받기 전에 황실 어른도 없는 곳에서 마주하다 잘못된 말이라도 나돌면 그 사달을 누가 책임진단 말인가.
그러나 태자는 심재경의 허락을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자신의 정혼녀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처음 온 이 저택의 구조를 훤히 꿰뚫고 있는 이처럼 그의 걸음걸이에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었다.
“어서, 일어나라니까. 이런 쓸모없는 계집이 있나!”
초조한 목소리가 먼 곳에서 들려왔다. 어릴 때부터 익힌 무공은 작은 소리도 크게 잡아냈다. 쓸모없는 계집. 그것이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이연은 천천히 걸었다. 콱, 볼 안쪽을 씹어 봤다. 피 맛이 났다. 꿈은 아니군. 그는 멍한 머리로 생각했다. 분한 마음 반, 떨리는 마음 반. 저기서 자신의 서혜를 괴롭히고 있을 무엄한 여인을 잡아 바닥에 내팽개치고 싶으면서도 정작 다리는 천근만근 무거웠다.
부황의 꾸지람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칠 년 만에 만나는 정혼녀가, 아니, 정혼녀가 아니다. 그 아이는 서혜다. 심서혜. 아니, 그냥 서혜. 심씨 가문의 서혜도 아니고, 다섯 꽃잎도 아니고, 정혼녀도 아니다. 그녀가 다섯 꽃잎이든 여종이든 상관없었을 ‘서혜’. 그 서혜가 어떻게 변했을지 알 수가 없어서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여덟 살에 만났던 정혼녀는 결국 칠 년간 볼 수 없었다. 이삼 년은 기다렸고 그 이후에는 이연 자신도 전장을 떠돌았다. 힘이 조금 생기자마자 간자를 붙여 보았지만 들리는 소식은 늘 속상한 것이었다. 서혜는 핍박받았다. 심씨 가문은 서혜에게 아무것도 해 주지 않았다. 그녀로 인해 부흥하고 있으면서도 그녀에게 무엇도 내주지 않았다.
심지어 그들은 그녀에게 제대로 된 음식도 주지 않았다. 황가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입 투정을 하면 안 된다는 이유였다. 서혜는 이 나라에서 가장 신비로운 존재면서도 종과 다를 바 없는 식사를 했고 그나마도 무척 제한받았다. 그녀는 아주 마르고 작아 아름다웠지만 연약했다. 제대로 먹지 못하고 툭하면 광에 갇히는 등 불안정한 삶이 계속되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를 구하고 싶었다. 그저 그 소망 하나로 적을 베고 또 베었다. 물러서지 않았다. 최고의 전공을 가져가야 했다. 어디서도 져서는 안 되었다. 그녀가 자신의 비가 되었을 때 누구도 그녀를 건드릴 수 없도록 강력한 태자가 되어야 했다.
산을 깎으려는 것도 대륙을 통일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 원대한 소망 같은 건 가져 본 적도 없었다. 그건 소임이지, 소망이 아니었다. 대륙을 통일하는 것도 하늘을 감동시키는 것도 태평성세를 만드는 것도 모두 이연에게는 소임이었다.
그가 태어난 순간부터 마르고 닳도록 들어 온 소임. 그건 그가 선택한 것도 아니었고 그가 저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러기 위해 태어났고 그가 그렇게 되도록 수많은 사람이 인생과 목숨을 바쳤다. 이연은 수천수만의 시신 위에 서 있었으므로 내려갈 길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이연은 이미 어린 나이에 그걸 알고 있었기에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혜가 있었다. 그녀조차 이연이 선택한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만이 유일하게 이연이 마음속 깊이 받아들인 것이었다. 이연은 그녀로 인해 두 가지를 깨달았다. 자신은 주어진 것들에 대해 그것이 소임이든 특혜이든 호불호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 심서혜만이 그에게 호불호를 알게 해 준다는 것.
이연은 서혜를 지우기 위해 많은 나날을 보냈었다. 한 여인에게 얽매이는 건 위험하다는 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발짝 걸으며 그녀를 잊어야지 하면, 다음 발을 내딛을 땐 이미 그녀를 돌아보고 있었다.
세 살의 심서혜. 고작 몇 주 만났을 뿐인데 그 아이가 눈에 걸렸다. 그 아이를 가끔 떠올리지 못하면 소스라쳤다. 어떻게 생겼었지. 한밤중에 일어나 미친 사람처럼 먹을 갈아 그림을 그린 적도 있었다. 얼굴을 기억해 내면 겨우 안심했다. 마음의 거대한 어둠이 미친 듯이 그 영역을 넓혀 나가다가 갑자기 내리쬐는 밝은 빛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녀에게서 두 발짝 멀어지면 그녀를 구하고 싶어서 검을 빼 드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무엇을 위해 베는지도 모르는 아수라장 속에서 그저 그녀를 생각했다. 세 살의 심서혜. 자신을 지키려고 아등바등하던 그 어린아이. 정혼녀라기보단 그저 아가였던 심서혜를.
쿵, 하고 세상이 무너지고.
쿵, 하고 운명이 결정되는 소리가.
머릿속에서 휘몰아쳐 귀를 통해 울리는 그 소리가 자꾸 전장에서 들려서. 위험할 때마다 그 소리가 마치 그를 구하는 것처럼 잡아끌어서 몇 번이고 그를 살려 내서. 도저히 이 운명을, 이 감정을 거스를 수도 이길 수도 없어서.
이런 게 연모지정이라면 정녕 연정이라는 것의 근본은 매우 폭력적인 것이 아닌가, 하면서도 목줄이 메인 짐승처럼 속절없이 끌려가서.
어느새 여기까지 왔다. 그녀가 한 달째 열병에 시달리고 있다는 말에 그녀를 잃을까 봐 무서워 미친놈처럼 무리에 무리를 거듭한 끝에 승전을 거머쥐고 달려왔다. 부황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무작정 여기로 와서는 그 처소로 가면서 바들바들 떠는 중이었다. 타인에게는 아닌 척할 수 있지만 자신에게는 숨길 수 없다. 그는 떨고 있었다.
그녀가 변했다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
그렇다면 감정을 멈추고 바꿀 수 있을까. 태자와 태자비로, 그저 안배된 삶을 살 수 있을까.
불빛이 어른거리는 게 보였다. 이연이 오는 걸 보았는지 서혜를 깨우던 목소리는 사라지고 모두가 재빨리 처소 밖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이연은 처소 안으로 들어가며 주변을 한 번 훑었다. 상궁들, 그리고 한 여인.
아마 서혜의 어머니로 추정되는 여인이 고운 옷을 입고 나붓하게 절을 하고 있는 게 보였다. 쓸모없는 계집. 그 소리는 아마 이 여인의 것일 테다. 그 생각이 드는 순간 이연은 그녀의 앞에 섰다. 그녀의 옷자락을 일부러 짓밟으며 서서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비가 될 분의 쓸모를 정할 정도로 네가 대단한 인물인지 내 그동안 몰랐구나.”
“아, 아, 아니, 그게 아니오라….”
“부황께 간하도록 하지. 너의 쓸모를.”
사시나무 떨듯 떠는 여인을 스쳐 지나 이연은 처소로 들어섰다. 생각 같아서는 심씨 일족을 모조리 다 죽여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심사가 뒤틀리는 것도 잠깐뿐이었다. 주렴을 지나 침상으로 갔을 때 보이는 건 파랗게 질린 얼굴의 여자아이였다.
소녀라고 하기엔 아직 조금 앳된 아이.
여자아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어여쁜.
후궁에서 언제나 어여쁜 여인들을 봐 온 이연의 눈이 커질 정도로 독보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아이였다. 창백하고 열에 들떠 있어도 그 미모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놀란 건 아이의 가느다란 손가락이었다. 아이의 손가락은 너무나 가느다래서 부러질 것 같았다.
그녀가 변했다면 마음도 변할까.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녀의 현재에 따라 자신의 마음이 움직일 것이라고 이연은 자만했었다. 그러나 그건 정녕 교만한 생각이었다.
“태의를 불러.”
“태자 전하, 황궁에 아직 보고도 하지 않으셨….”
말없이 태자의 뒤를 따르고 있던 수하 중 한 명이 그것만은 안 된다는 듯 현 상황을 일깨우기 위해 조심스럽게 고했다. 그러나 이연의 외침은 더욱 커졌다.
“끌고 와, 당장!”
그녀가 어떤 사람이든, 설사 나라를 망칠 악녀로 성장한다 하더라도.
이 연모지정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미 발목이 묶여 버렸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