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몽중연 (44)화 (44/100)

44.

그리하여 태자 이연과 그의 정혼녀, 서혜는 어색하게 상을 받았다. 궁중 법도상 둘은 각각 상을 받아야 했는데 상과 상이 서로의 사이에 있어 거리는 더욱 멀게 느껴졌다. 수라상궁의 시중을 받으며 식사를 하던 이연의 눈에 거슬린 건 서혜의 시중을 드는 상궁의 태도였다.

상궁은 서혜의 시중을 드는 게 아니라 감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서혜가 어떤 반찬을 조금 더 먹을라치면 흠, 하고 헛기침을 하여 눈치를 주었고, 서혜는 그때마다 조심스럽게 젓가락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물러나라.”

다들 진짜 적당히 하는 걸 모르시는군.

본인도 그렇게 커 왔으면서 서혜가 당하는 걸 보고 있자니 짜증이 치밀어 오른 이연은 상궁들을 쫓아냈다. 어리지만 존귀한 태자의 서슬 퍼런 목소리에 수라상궁들이 재빨리 예를 갖추고 물러났다.

이연은 서혜와 단둘이 남았다.

“드시고 싶은 걸 드세요.”

홀로 남은 서혜가 벌을 받는 아이처럼 식사를 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수저를 내려놓지도 못한 채 우물쭈물하고 있는 걸 보고 있던 이연이 한마디 툭 던졌다.

“생치(꿩)를 좋아하시는 것 같았는데.”

“…….”

“집어 드려야 드시려나요?”

이연이 생치 산적을 집어 서혜의 밥 위에 올려 주었다. 평생 처음 받아 보는 다정함이었는데 그 다정함을 베푼 사람이 미래의 지아비이자 태자였다. 송구했다. 그러나 그 과분함을 밀어내고 싶지는 않았다. 서혜는 이연의 아름다운 얼굴을 한 번 본 뒤 천천히 산적과 함께 밥을 먹었다.

맛있었다. 평생 먹어 본 그 어떤 것보다 맛있는 것 같았다.

“전하께옵서는….”

겨우 산적 하나를 먹고 발그레하게 웃는 얼굴이 귀여워서 보고 있자니 서혜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이연은 “응?” 하는 얼굴로 서혜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서혜가 젓가락을 든 채 물었다.

“전하께옵서는 무슨 찬을 즐기시옵니까?”

한마디로 저가 지금 집어 주겠다는 뜻이다. 너나 많이 먹어라, 라는 말이 목 끝까지 나왔으나 이연은 그렇게 말하는 대신 서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게 분명한 수척하게 곯은 얼굴인데 무엇이 좋다고 환하게 웃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궁 안에 좋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이연 자신도 좋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고.

여덟 살인 이연에게는 세 살인 서혜가 참으로 어려 보였다. 그러나 어른들에게 시달릴 대로 시달리다 이연에게 구해진 서혜에게는 그래도 제 나이에 가까운 태자가 친근했고 또 자신을 구해 줬다는 점에서 영웅처럼 보였다. 서혜는 뭐라도 해 주고 싶어서 손을 허공에 든 채 이연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의 작은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생치 좋아합니다.”

사실 이연은 꿩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 굶으면서 이연은 식탐을 부리는 대신 식욕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이연은 빨리 먹을 수 있는 걸 선호했고 육식 자체를 즐기지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서혜가 맛있게 먹는 걸 보고 있자니 무슨 맛인지 궁금해져 그렇게 말해 버렸다.

서혜가 고개를 들고 활짝 웃었다. 고작 찬 하나, 좋아하는 것이 공유되었을 뿐인데 엄청난 걸 공유한 것처럼 아이가 어쩔 줄 몰라 하며 기뻐했다. 저도, 저도 좋아합니다. 서혜가 말했다. 세상을 나눠 가진 사람처럼.

그날, 이연은 처음으로 고기가 맛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천천히 서혜가 먹는 것을 따라 먹다가 결국 상 하나를 밀어 버리고 서혜와 같은 상에서 먹었다. 평생 처음 해 보는 일이라 어색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둘이 상 하나에 앉아 도란도란 먹고 있자니 서혜가 세상에 행복이란 행복은 다 가진 얼굴로 웃었다.

그날 이후 이연은 가능한 한 서혜와 조반을 같이했다. 수라상궁들이 이연의 눈치를 보느라 서혜에게 조심스럽게 대했지만 서혜 자신이 상궁의 눈치를 보느라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여 결국 그는 상궁들을 모두 내보내고 서혜의 식사 시중을 들어 주었다.

“하저(젓가락을 내리다. 음식을 먹는다는 뜻)하세요.”

서혜는 처음에 어쩔 줄 몰라 했지만 금세 익숙해졌다. 아이이기도 했고 이연이 워낙 태연하게 행동했기 때문에 서혜도 이연과 있을 때는 이런 건가, 라고 적응해 버렸던 것이다.

“좋아하는 걸 드시면 됩니다.”

이연의 말버릇이었다. 좋아하는 걸 먹어라, 좋아하는 걸 해라. 이연과 있을 때 서혜는 좋아하는 것만 하면 되는 사람이 됐다. 이연은 서혜에게 아무런 제한도 두지 않았고 상궁들이 그녀에게 엄격하게 구는 걸 싫어했다.

그는 수라상궁들이 해 주는 걸 모조리 대신해 주었다. 서혜에게 휘건(수건)을 둘러 협자(집게)로 고정시키는 것까지 손수 했다. 화로에서 전골을 만들어 떠 주는 것도 그가 했다. 서혜는 해 본 적이 있으시냐고 조심스럽게 물었고 이연은 없다고 대답했다. 서혜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을 보는 눈으로 이연을 바라보았다. 이연은 쑥스러워져 고개를 돌린 채 대꾸했다.

“한 적은 없지만 평생 봤지요.”

이연은 여덟 살이고 그에게 평생이란 고작 팔 년을 말하지만 서혜에게는 대단한 시간이다. 아이는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낮것상(점심상)은 잘 받습니까?”

서혜는 본디 입이 짧다. 이연은 서혜와 조반을 같이하게 되면서 괜히 다른 이복형제들을 눈여겨보게 되었다. 서혜와 동갑내기쯤 되는, 두세 살, 서너 살 되는 아이들의 체구나 그들의 행동거지를 보면서 마음속에서 서혜와 비교했다.

서혜는 입이 매우 짧아서 좋아하는 고기나 나물을 조금 먹을 뿐, 그 외에는 거의 식사를 하지 않았다. 그나마도 상궁이 없을 때나 제 마음껏 먹지, 그게 아니면 법도만큼만 먹었다. 그러니 서혜는 작을 수밖에 없어서 벌써 또래와 체구 차이가 났다.

“잘 받사옵니다.”

“싫은 일이 있으면 어찌하라고 했습니까?”

“전하께 아뢰오라고.”

“싫은 일은 없었고요?”

“없었사옵니다.”

싫은 게 뭔지는 알고 있을까?

이연은 의심스러웠다. 서혜는 좋은 것도 싫은 것도 명확하지 않은 아이였다. 아니, 좋은 건 명확했다. 서혜는 이연 자신을 좋아했다. 서혜의 눈에 이연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서, 이연은 종종 서혜의 앞에서 뿌듯해졌다.

자신이 태자라서가 아니었다. 자신이 황제의 아들이라서, 황후가 낳은 적자라서가 아니라 서혜는 오롯이 이연이라는 사람을 월등하고 훌륭한 사람으로 보았다. 서혜의 세상에서 이연은 황제보다 신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걸 이연은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이연은 서혜에게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이연은 매일 서혜를 챙겼다. 어릴 때부터 황후에게도 냉정하였던 태자가 자신의 정혼녀를 애지중지한다는 소문이 돌자 후궁에는 이상한 바람이 불었다.

태후와 황후가 서로 이 작은 아이를 제 편으로 삼으려 애쓰고 후궁들도 눈여겨보면서 서혜의 고난은 일단 멈춰졌다. 그러나 그녀의 난처한 상황은 계속되었다. 사람들은 계속 태자를 데려오라고 요구했다.

서혜는 눈치가 빠른 아이였고 이연이 후궁을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연에 대해 무언가를 해 보라고 요구할 때마다 마치 귀머거리처럼 그냥 입을 다물었다.

서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늘 입을 다무는 걸 선택했다. 매질을 당하거나 광에 갇히거나 하는 것이 서혜에게는 일상이었다. 심씨 집안에 있을 때도 서혜는 혹독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우는 것도 떼쓰는 것도 용납되지 않았다. 아이의 인생에는 순종 외의 단어는 들어올 수 없었고 그래서 아이는 순종보다 체념을 더 빨리 배웠다.

그 탓에 서혜는 더 잘 버텼다. 태자 전하와 무슨 이야기를 했니? 전하께서 너를 아끼시지? 사람들이 물을 때마다 서혜는 난처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젓고 또 저었다. 이연과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서혜는 입궁하여 말을 전달하며 매질을 당했다. 말을 전달해도 매질을 당하고 말을 숨겨도 매질을 당했다.

그러다 이연이 그 일에서 서혜를 끄집어내면서 겨우 곤란에서 벗어났다. 그 일은 서혜에게 아주 큰 인상을 안겼다. 어떻게 해도 결론이 같다면 서혜는 자신이 원하는 걸 하고 싶었다. 서혜가 원하는 건 이연에게 보탬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서혜는 이연과 있었던 일 중 그 어떤 것도 입에 담지 않았다. 그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서혜는 알지 못했고, 이연이 자신처럼 매질이라도 당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연을 매질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후궁에 존재하지 않았지만 서혜에게 이연은 아주 대단한 사람임과 동시에 자신과 같은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그가 다칠까 봐 서혜는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이연에게 감동을 주었다. 이렇게 이연을 진심으로 위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모친인 황후조차 자신의 사가를 위해서 이연을 종종 위험한 길로 몰지 않았던가. 그런데 세 살짜리 여자애가 미래의 지아비랍시고 이연을 위해 버텨 주고 있었다.

그래서 이연은 매일 조반에 그 작은 아이를 위해 시중을 드는 게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큰 음식이 있으면 손수 잘라 주고 좋아하는 것 같은 음식만 밥 위에 올려 주었다. 석반도 같이 먹으면 좋을 텐데, 석반은 도저히 시간을 낼 수가 없어서 유감이었다.

어서 어른이 되어야 할 텐데.

이연은 자그마한 서혜를 보며 언젠가부터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서 어른이 되어 서혜와 가례를 올리고 자신의 보호 아래 서혜를 둬야 할 텐데.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고작 조반을 같이 먹어 주는 것밖에 없다. 조반을 같이 먹고 나면 이연은 서연에 들어야 하고 서혜는 또 태자비로서의 교육을 받거나 훈육을 빙자한 부름을 받아 시달려야 했다.

어서 어른이 돼서 너를 편안하게 해 줘야 할 텐데.

편히 먹고 편히 자게 해 줘야지. 안 불려 다니게 해 줘야지. 이연은 서혜에게 웃어 보였다. 그 웃음을 보자 서혜가 환하게 웃었다. 매일이 살얼음 위를 걷는 것과 같은데도 서혜는 이연이 한 번 웃어 주면 그것으로 모든 게 되었다는 듯이 행복해했다.

그게 미안하고 고마워서 이연은 가끔, 평생 처음으로 과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아이를 끌어안고 싶어졌다. 하지만 법도에 어긋나니 이연은 그러지 않았다. 대신에 서혜의 밥 위에 아이가 좋아하는 찬을 하나 더, 먹기 좋게 잘라서 올려 줄 뿐이었다.

사달이 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이연에 대해 함구하던 서혜에게 화가 난 황후가 어린 그녀를 무릎 꿇게 한 것이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에서 두 시진이 넘게 돌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서혜는 결국 쓰러져 버렸다.

이 일을 뒤늦게 전해 들은 이연도 무척 화가 났지만 이연의 화보다 더 문제가 된 것은 황제의 노여움이었다. 황제는 그 일을 계기로 서혜의 고난에 대해 모두 다 알게 되었고, 후궁을 쥐 잡듯 잡으며 모두를 비난했다. 그 비난에서 자유로웠던 사람은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는 혜비밖에 없었다.

서혜를 황궁으로 부르지 말라는 황명이 내려졌다. 황자를 생산하지도 못한 다섯 꽃잎이 후궁 암투에 목숨을 잃어서야 되겠느냐는 황제의 싸늘한 비난은 한동안이지만 후궁을 잠잠하게 했다.

그리고 칠 년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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