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몽중연 (43)화 (43/100)

43.

서혜가 기억하는 첫 만남이 있었던 날 오후, 태자는 태후전에 들었다.

“태자가 여긴 웬일입니까?”

태후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조반 시간(오전 10시 이후)에 말도 없이 태자가 문안을 오는 건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태자는 늘 아침 일찍 문안을 왔고 그 외에는 문안을 오지 않았다. 정확한 아이였기에 태후는 당연히 오늘은 더 이상 태자를 볼 일이 없으리라고 여기고 있었다.

“태후전의 음식이 그리워서 왔습니다.”

장지문 밖에서 태자는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는 걸 태후는 잘 알고 있었다. 태자는 애초에 태후전의 음식을 먹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태후는 그제야 눈앞에 무릎을 꿇려 놓은 어린아이의 존재에 눈이 갔다. 아무래도 태자가 소문을 듣다못해 온 모양이 분명했다.

사달이 날 거 같긴 했지.

태후도 알고는 있었다. 이 어린 것을 석 달이나 달달 볶았으니 황제든 태자든 누군가가 한마디쯤 하고야 말 상황이 오리라는 걸. 세 살밖에 안 된 아이가 제대로 먹지도 못해 얼굴이 늘 하얗게 질려 있었다. 무슨 말을 들을지도 모르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아이는 그저 입만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아이의 상황이 녹록하지 않다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나 태후도 물러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심씨가 아니었다. 꽃잎을 지닌 자가 아니었기에 국모의 정통성에서 늘 밀렸다.

그리고 꽃잎 석 장을 가진 며느리는 늘 그놈의 정통성을 앞세워 시어머니인 자신의 뜻을 꺾으려 들었다. 마치 후궁이 제 것인 양 휘두르고 싶어 안달이 난 모양새가 꼴 보기 싫었는데 이제 다섯 꽃잎의 손자며느리가 들어온 것이 아닌가. 이 손자며느리가 아주 제 손의 칼인 것처럼 구는 며느리에게 본때를 보여 줘야 했다.

물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는 가여웠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여인들끼리만 있는 자리에 태자가 동석할 수는 없습니다. 법도에 어긋나지요.”

“그 여인이 저의 정혼녀가 아니라면 옳으신 말씀입니다만 제 정혼녀라면 이제 소개를 해 주실 때가 되지 않으셨습니까, 할마마마. 후궁을 드나든 지 석 달이 지났는데 아직 목소리도 듣지 못했사옵니다.”

“그리 애가 닳으셨습니까?”

태후가 웃으며 찌르는 말에 태자가 활짝 웃었다.

“예, 사별할까 봐 무섭습니다.”

한마디로 태후와 황후가 이렇게 괴롭히다가 애를 잡겠다는 뜻이었다. 태후는 혀를 찼다. 태자는 고작 여덟 살밖에 안 되었지만 혀에 칼날을 문 아이였다. 쉽게 보았다가는 책잡히기 좋았다. 그 며느리도 이 태자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처럼 온순해진다 하지 않는가.

“들라 하라.”

태후의 명에 장지문이 열렸다. 여러 장지문이 소리 없이 열리자 태자는 장지문들을 지나 태후전의 안쪽, 서혜의 옆에 앉았다. 그는 일부러 서혜에게는 시선을 주지 않은 채 태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오늘은 자주 보는군요, 태자.”

“예, 마마.”

덕분에, 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었다. 태후는 쓴 물이 넘어오는 것 같은 기분으로 태자를 바라보았다. 태자는 정혼녀의 안위가 걱정되어서 왔다기 보다는 후궁에서 귀찮은 일이 생기기 전에 손쓰기 위해 왔다는 인상이 훨씬 강했다. 번거롭다는 감정이 표정에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어 태후는 자존심이 상했다.

“이렇게 자주 볼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옳으신 말씀입니다.”

“…….”

“태후전의 소주방(음식 중 주식을 만들던 곳) 솜씨를 보고 싶다 하니….”

“생과방(후식을 만들던 곳)이면 됐습니다.”

태후는 아직 식사 전이었다. 물론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태후는 오늘도 아이에게 심한 매질을 했고 미안한 마음에 식사라도 좀 많이 먹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매질은 매질이고 미안한 마음은 또 남아 있었다.

원래도 자그마했던 아이는 이제 뼈밖에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제대로 못 먹는 게 틀림없어서 태후도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물론 며느리인 황후와의 신경전에서 질 수는 없다. 하지만 그래도 이 어린 것이 식사도 못 하고 있다니.

하여간 이게 다 그 밉살맞은 황후 때문이다.

태후는 어린아이가 좋아할 만한 것을 주며 마음을 좀 풀어 주려 했는데 어른처럼 먹는 태자가 와서 눈살이 찌푸려졌다. 아이는 아직 식사도 못 했을 텐데 식사 시간에 와서 이게 웬 행패인지.

그러나 길게 말을 섞어 봐야 손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굳이 그 점을 지적하지 않고 지밀상궁에게 눈짓했다. 곧 상이 들어왔다.

이연은 그제야 자신의 정혼녀를 바라보았다. 이전에도 아이가 세 살치고 좀 작지 않은가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아이는 젖살이라는 게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홀쭉했다. 마음고생을 하고 있는 게 역력히 보여서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자지도 먹지도 못한 얼굴을 보자 짜증이 치밀었다.

“할마마마.”

이연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자 태후가 “말씀하세요, 태자.”라고 대답하면서 아이에게 흘끔 시선을 주었다. 누가 봐도 아이의 상태는 좋지 못했다. 황제가 지금 태자비가 될 아이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아이의 상태를 보았으면 한마디 하고야 말았을 것이다.

황제는 그녀와 며느리 사이의 싸움을 지긋지긋하게 여겼다. 황제는 심씨인 며느리도 꺼렸지만 후궁의 일에 여러 번 반대를 표하고 특히 혜비의 일에 사사건건 반대해 온 태후에 대해서도 불만이 심했다.

하지만 태후도 할 말은 있었다. 자신만 정통성에 대해 이런저런 소리를 듣고 지아비에게 폐를 끼쳤으면 됐지, 아들까지 그렇게 만들 수는 없었다. 황제는 몇 번이나 혜비의 소생을 태자로 삼으려 했지만 태후는 결사반대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결정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태자는 차갑기는 해도 혜비의 장자보다 훨씬 성취가 높고 문무 양쪽으로 훌륭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지 않은가. 혜비의 장자는 벌써 여러 번 여자 문제나 뇌물 건으로 사고를 쳤고 훌륭한 덕망을 보여 주지 못했다. 혜비는 그것이 태자가 되지 못한 실망감에서 오는 일탈이라 주장하지만 태후가 보기엔 그저 기본 성품이었다.

“요즘 궁에서 이런 말이 들려옵니다. 제 정혼녀 자리가 세답방(빨래방, 궁녀들의 보직 중 가장 험한 곳)보다 못하다고요.”

“…….”

“외명부의 제 귀에까지 들려오는 이 말을 내명부에 계시는 할마마마께서는 듣지 못하셨습니까?”

이연은 다과를 하나 들었다가 제 정혼녀, 심서혜 앞에 놔 주었다. 온 세상 사람들이 이 아이가 어여쁘다 난리인데 정작 이연은 어여쁜지 어떤지도 모르겠고 그저 무척 가엾기만 했다. 얼마나 말랐는지 태자비인지 성문 밖 거지 딸인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아이는 당연하게도 다과에 손을 뻗지 않았다. 제 이야기라는 걸 아는 듯 바들바들 떨고 있을 뿐이었다.

“그만 좀 하십시오. 세 살이지 않습니까.”

“이 할미는….”

“예, 내명부를 바로잡기 위해서였다는 거 압니다. 어마마마께도 말씀드리고 오는 길입니다. 내명부를 바로잡으시려면 어른들끼리 해결을 보셔야지, 세 살짜리 제 정혼녀가 무엇을 안다고 이리하십니까.”

“어린 태자가 참견할 일이 아닙니다.”

태후가 노여움이 깃든 음성으로 말했지만 태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서혜는 동궁에 들 사람입니다. 동궁은 저의 궁이고요, 마마.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그 말씀은 이 소손이 올릴 말씀이옵니다.”

태자의 목소리가 한껏 낮아졌다. 그제야 태후는 사실은 태자가 기분이 좋지 못하다는 걸 알아챘다. 오늘 아예 마음을 잡고 왔다는 사실도.

태후는 태자 이연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고작 여덟 살이지만 외명부의 대신들조차 함부로 하지 못할 정도로 존재감이 있는 태자다. 놀라운 성취도 성취지만 그 특유의 냉정한 성품이 더욱 대신들을 두렵게 했다. 이 총명하고 강인한 태자가 황좌에 올랐을 때 흠이 잡히지 않도록 벌써부터 대신들은 몸가짐을 조심할 정도였다.

“소손의 정혼녀이옵니다. 조반은 소손과 함께 동궁으로 돌아가 할 예정이오니 부디 할마마마께옵서는 물러나는 것을 허하여 주시옵소서.”

“태자는 행소(궁중에서 고기나 생선이 없는 찬으로 밥을 먹는 일)하는 일이 잦지 않습니까? 오늘 할미는 빈궁에게 맛있는 걸 먹이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사실이다. 태후는 이 어린 태자비에게 미안한 마음이 한가득이었고 달콤한 당과니 떡이니 하는 것을 잔뜩 먹일 예정이었다. 생과방에도 미리 언질을 주었었다.

이연은 평소 문후만 드려 왔던 탓인지 다른 이들보다 이야기가 매끄럽게 끝나지 않는 태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문득 그의 얼굴에 한 가닥 미소가 피어올랐다. 달빛을 머금은 듯한 흰 얼굴에 신선 동자의 미소가 떠오르자 태후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겨 손자를 바라보았다.

신녀는 도화살이 있어야 할 수 있다 했다. 그리고 도화살이 있는 여인은 대체로 미색을 갖췄다 했다. 그런 탓일까. 신녀와 황후를 생산하는 심씨 집안의 여인들은 하나같이 미색이 고왔고 특히 꽃잎을 석 장이나 지닌 황후의 미색은 가히 후궁 최고라 할 만했다.

아무리 꽃잎 다섯 장을 가진 태자비가 어여쁜 아이라 할지라도 물이 오를 대로 오른 미인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법이다. 화용월태라 불릴 만한 미인의 얼굴을 그대로 빼닮았으면서도 황제의 사내다움 또한 타고난 태자는 시로 앞다투어 찬양되어질 만큼의 외양을 지니고 있었다.

그 태자가 웃으면서 말했다.

“한껏 매질한 다음에 배불리 먹이시면 마음이 풀어질 거라 생각하시다니. 제 정혼녀는 외양간의 소가 아니옵니다, 마마.”

악담이었다.

***

서혜는 처음 마주한 지아비가 될 소년에게 세 번 놀랐다. 멀리서 본 이연 태자는 호리호리한 소년 태자였다. 맛있는 걸 많이 먹어 나이가 어려도 풍채에 덕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연 태자는 덕망이 있는 풍채라기보다는 무예를 배워 나가는 소년 무사 같은 외양을 지니고 있었다.

잘생긴 거 같아. 아이의 감상은 매우 솔직하고 적나라한 것이었다. 멀리서 보았기 때문에 서혜는 태자의 얼굴을 제대로 보진 못하였다. 하지만 왠지 느낌에 그런 것 같아 아이는 조금 만족스러워졌다. 지아비는 잘생겼다. 자신이 겪는 엄청난 수난에 약간의 위로가 됐다. 서혜는 외모를 조금 밝히는 아이였다.

서혜는 영특한 아이였으나 고작 세 살이었다. 먼 곳의 어느 나라 나이로는 다섯 살로 치기도 하지만 선나라 나이로는 세 살인 서혜는 어린아이였다. 하라는 대로 하고 매질을 당하는 동안 아이는 많이 지쳤고 안절부절못했고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

궁은 무서웠고 아이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제껏 아이는 하라는 대로 하고 정해진 만큼을 이뤄 내지 못하면 매질을 당했는데 이제는 어떻게 해도 매질을 당하게 되었다. 아이는 혼란스러웠고 곧 포기해 버렸다. 그냥 매를 맞는 걸 선택한 것이다.

거기에는 서혜가 겪어 온 특유의 교육이 영향을 주었다. 서혜는 태어난 순간부터 태자비였다. 황후는 서혜에게 상궁을 보냈고, 상궁은 서혜가 갓난아기인 순간부터 키웠다. 상궁의 교육은 매우 엄격하였다. 서혜는 모든 것을 해내야 했고 아무런 불만도 말해서는 안 되었다.

그렇게 커 온 서혜이기에 그녀는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이유로 매질을 당하기 시작하자 그저 순종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자신은 아이고 태자비이니까. 그리고 그녀의 앞에 태자, 이연이 나타났다.

자신의 할 말은 다 하고야 마는 어린 독설가, 여덟 살의 이연 태자. 그의 아름다움에 놀랐고 그의 독설에 놀랐고 그가 자신의 손을 잡고 태후전을 성큼성큼 나서는 것에 놀랐다. 서혜는 그 순간 인생 처음으로 무언가를 결정했다.

태자는 몰랐겠지만 서혜는 태자가 자신을 당겼을 때 스스로 따라 나갔다. 원래대로라면 서혜는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연과 태후가 완전히 합의하여 태후가 나가 보라고 할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을 것이다.

그러나 서혜는 그러지 않았다. 소매 끝에서 바람 냄새가 묻어나는 것 같은 이 태자를, 미래의 지아비를 따라가고 싶었다. 서혜는 무언가가 뒤에서 민 것처럼 휘청거리며 태자를 따라 나갔다. 태후에게 예를 올리는 것도 잊어버렸다. 그저 홀린 듯이 태자만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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