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몽중연 (42)화 (42/100)

42.

태자, 정이연은 도대체 왜 심서혜에게 자신을 숨기게 되었는가.

이 이야기를 하려면, 무척 오래전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붕새다, 붕새가 나타났다.”

주변이 시끄러운 가운데 태자 이연은 가만히 그 새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전설 속의 붕새는 하루에 구만리를 난다고 하였는데, 과연 그만한 크기였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새를 올려다보던 이연은 문득 그 새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고 느꼈다. 새와 눈이 마주치는 건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 새의 눈이 자신의 것보다 훨씬 크고 무시무시해 보인다는 건 더욱 낯설었다.

새에게도 표정이라는 게 있다면 저 새는 무척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것 같다. 이연이 그렇게 생각했을 때 새가 하늘에서 크게 날갯짓을 했다. 그 순간 바람이 몰아쳤다.

“전하! 저하! 마마!”

시립해 있던 이들이 제각기 챙겨야 하는 상전들을 목 놓아 부르며 한달음에 몰려들었다. 이연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지만 그는 새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새는 여전히 이연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새까만 눈. 그 눈이 이연을 바라보다 살짝 웃는 것 같았다. 새가 웃는다는 게 가능한 일인지 알 수 없지만 이연은 분명 그렇게 느꼈다.

펄럭, 새가 바람을 일으키며 멀어졌다.

“저하, 이리로 오시어요.”

사람들이 이연을 불렀지만 이연은 멀어지는 새를 집요하게 바라보았다. 새는 분명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한 것 같았는데. 그건 자신만이 느끼는 일이었을까?

새는 태자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궐 밖으로 유유히 날아가 황성을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 북소문의 대갓집 위에 한참이나 머물렀다. 그 집에서 응애, 하는 아가의 울음이 터지고 나서야 새는 안심한 것처럼 높이 날아올라 먼 곳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리하여 황성의 모든 사람이 한 아이의 탄생을 알게 되었다.

***

붕새가 나타난 것은 3년이 지나서도 두고두고 회자될 일이었다.

가끔 이연 태자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늘 그날을 떠올리고는 했다. 그 새가 자신을 바라보았던 것, 조금 웃는 것 같았던 것, 그리고 자신을 떠난 그 새가 자신의 정혼녀가 된 심서혜의 탄생을 기다리듯 그 집 위를 오랫동안 맴돌았다는 것 등을 늘 생각했다. 그러다 보면 그의 생각은 자연스럽게 심서혜라는 아이에게 다다랐다. 아이는 이제 세 살이 되었을 텐데 어떤 아이로 컸을까.

이연은 올해 여덟 살이 되었다. 다섯 살 아래의 정혼녀는 이제 아장아장 걷는 것이 고작일 나이. 그러나 이연은 그녀가 걷는 것보다 더 많은 걸 할 줄 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심씨 집안을 일으켜 세우려는 모후가 상궁을 보내 아이의 교육을 독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끔 이연도 정혼녀에 대해 얻어듣는 것이 있었다. 아이가 자수를 조금 놓을 수 있게 되었다던가,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했다던가. 태자인 자신 못지않게 열심히 배우는 중이었다.

아이니까 좀 놀아도 될 터인데.

태자도 아니고 태자비인데. 조정에 나가는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이리 치댈 것이 무언가. 이연은 자신의 친모지만 모후의 방침이 잘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부터 그러했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모후가 시키는 대로 외숙부나 외가의 편을 들었다가 부왕에게 불호령을 듣고는 했다. 석고대죄를 해야 했던 적도 있었다. 동궁에 감금되거나 단식령을 받은 적도 있었는데 모후는 그때마다 무척 미안해하고선 조금 뒤에는 똑같은 걸 또 부탁하곤 했다. 이연이 단호히 끊어 내지 않았다면 그녀는 영원히 그리했을 것이다.

“입궁이라고요?”

모후만 심한 줄 알았더니.

이연은 눈살을 찌푸릴 뻔한 걸 겨우 참아 냈다. 고작 세 살밖에 안 된 아이를 입궁시키라는 황명이 떨어졌다는 말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세 살밖에 안 된 아기를?

이연 자신은 세 살에 이미 논어 등을 읽었으면서도 자신의 정혼녀는 아기라고 생각했다. 천자문을 떼거나 자수를 놓게 하는 건 아기에게 가혹한 일처럼 느껴졌다. 그것이 자신의 비가 되기 위해서라면 더더욱.

“어마마마께서도 아바마마께서도 강건하신데 이리 서두를 필요가 있었사옵니까?”

이연이 내키지 않는 얼굴로 물었다.

황후는 아들인 태자 앞에 있으면 왠지 안절부절못했는데, 그가 어머니인 황후를 전혀 봐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그의 눈에는 지난날 그녀가 그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던 것에 대한 원망이 서려 있는 듯해서 황후는 늘 아들 앞에서는 괜스레 움츠러들었다. 오늘도 마찬가지라 그녀는 “어미가 서두른 게 아닙니다.”라고 다급히 변명했다.

“폐하께옵서 내리신 어명입니다.”

“어찌하여서요?”

태자의 질문에 황후는 입을 달싹거렸다.

그녀는 왜인지 알고 있었다. 지아비인 황상은 심씨 가문을 싫어했다. 어쩔 수 없이 왕실의 친척을 관리하는 연돈녕부사의 자리도 주었고 돈녕부를 뜻대로 하게 두었지만 그뿐이었다. 그 이상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

뇌물이라도 받았다 하면 불같이 화를 냈다. 뇌물을 받지 않는 관리가 어디 있다고. 다들 적당히, 민심에 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만 받는 것인데 황제는 심씨에 대해서는 엄격한 기준을 적용했다. 외척, 외척. 늘 그는 외척이니까 더 조심해야 한다고 이르곤 했다.

황제가 심씨를 싫어하는 건 혜비 때문일 것이다. 혜비는 황후보다 먼저 아들을 낳았다. 그것도 셋이나. 장자도 혜비의 몸에서 났다. 황제는 그 장자를 태자로 삼고 싶어 했지만 심씨 일족을 비롯한 많은 문무 대신들이 반대하여 그럴 수 없었다.

혜비는 그때 무척 상심하였고 그 이후로 황제와 혜비 사이는 결정적으로 무언가가 틀어졌다고 했다. 지금은 다시 사이가 좋아지기도 했지만 그때처럼 완전히 화목할 수는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좋던 사이가 깨진 걸 황제는 심씨 집안과 황후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혜비의 아이라고는 해도 그 아이는 엄연히 적자가 아니다. 그러니 태자가 될 수 없다. 그 당연한 이치를 왜 황제는 모른 척하는 걸까.

그 때문에 황제는 심씨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태자비가 또 심씨에서 나오자 심씨의 물이 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가능한 한 어릴 때 궁에서 관리하려 하는 게 분명했다. 한마디로 황후와는 달리 심씨 집안의 사람으로서 행동하지 말라는 뜻이다.

내가 있는 한은 어림도 없지!

후궁은 자신의 것이다. 황후는 태자비를 철저히 심씨 집안의 사람으로 가르칠 생각이었다. 어차피 지아비의 총애를 받기는 글렀다. 그렇다면 황후에게는 막강한 배경이 필요했다. 그것이 심씨였다. 태자비는 그 막강한 배경의 강력한 대들보가 되어 주어야 했다.

“모후.”

태자가 대답을 재촉해 왔다. 황후는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리며 찻잔을 들었다.

“황명을 내리신 건 폐하십니다. 어찌하여 어미에게 물으십니까?”

이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제 어미의 생각이 손에 잡힐 듯 그려졌다. 또 심씨 집안인가. 아들이 굶겨져도 감금당해도 포기할 수 없는 그 집안. 이제는 자신의 정혼녀가 그 꼴을 당할 모양이었다.

“그럼 지금 편전으로 갈까요?”

이연이 지금 편전으로 가서 황상에게 여쭐까 묻자 황후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이연은 그러고도 남을 아이였다. 황후가 왈칵 치솟은 분에 못 이겨 “진정 이러실 겝니까!”라고 고함을 지르자 이연이 달칵 소리가 나도록 찻잔을 내려놓았다. 평소 전혀 소리를 내지 않는 이연이니 일부러 소리를 낸 것이 분명했다. 그 작은 소리에 황후가 흠칫했다.

“어마마마.”

“…….”

“소자의 정혼녀는 연치가 이제 세 살이라 들었습니다.”

“…….”

“세 살은 굶기에 너무 어린 나이입니다. 소자는 사내아이라 며칠 굶어도 괜찮지만 여아는 또 다르니 어마마마께옵서는 부디 체통을 지키십시오.”

한마디로 자신처럼 굶기지 말라는 뜻이며, 그렇게 애를 이용해 먹지 말라는 경고기도 했다. 황후의 얼굴이 분노와 수치로 새빨갛게 달아올랐지만 이연은 못 본 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

서혜는 이연의 정혼녀라는 이유로 참 많이도 불려 다녔고 상궁들에게 온갖 교육을 받았다. 이연은 그녀를 굶기고 싶지 않았다. 호사만 누리게 해 주고 싶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녀는 많이 굶었고 매질도 당했다. 언제나 그녀는 태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많이 곪아 있었다.

세 살짜리가 어떻게 후궁의 논리에 따라 처신을 잘할 수 있겠는가. 그저 휘청거리며 걸을 수밖에 없는 나이였다. 아장아장 걸을 나이에 서혜는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이리저리 불려 다녔다. 품계가 없기에 더욱 일은 심각했다. 비빈들까지 서혜를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세 살의 나이는 후궁에서 무게 중심을 잡기에는 아직 힘들 나이다. 아이는 노력하는 것 같았지만 결국 실패했고 태후전의 노여움을 사서 매질을 당하기도 했다. 매질을 당하게 된 건 순전히 황후 때문이다.

태후께 말씀 올려라, 황후께 말을 전하라, 이리저리 이용당하던 아이가 결국 경을 치기에 이른 것이다. 황후는 모른 척했고 태후는 황후 보란 듯이 아이를 매질했다. 반대의 경우도 종종 일어났다. 태후가 무언가를 시켰고 아이가 행하면 황후가 아이를 매질했다. 아이는 여러 번 매질당했다. 아이의 하얀 종아리에서 매질 자국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비현각(태자의 집무실)에서 서연(태자에게 하는 강의)에 들 때마다 이연은 후궁에 있는 자신의 정혼녀를 생각했다. 아직 가례도 전인데 벌써 후궁에 그녀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이연은 그녀가 아직 친부모 밑에서 보호받을 나이라고 생각했지만 황명은 절대적이었다. 이연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았다. 서혜의 고난은 계속되었다.

어느 맑은 가을날 오후, 분합문(주로 대청과 방 사이 또는 대청 앞쪽에 다는 네 쪽 문)이 위로 올라갔다. 문이 전부 올라가자 비현각은 마치 정자처럼 시원하게 트였다. 여럿이 하늘을 보며 웃었고 분위기는 평소보다 훨씬 유해졌다. 날카로운 성정인 이연도 평소보다 부드러워져 그 어느 때보다 서연이 물 흐르듯 흘러가고 있을 때였다.

강의를 하던 보덕이 말을 멈췄다. 그리하여 모두가 보덕을 쳐다보았고 그의 눈길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그곳에 그 아이가 있었다.

이연은 그 어여쁜 아이가 자신의 정혼녀라는 걸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동궁에 귀하게 차려입고 나타날 어린 여자아이는 오직 자신의 정혼녀 하나뿐이니까. 비현각 정문인 이모문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이 보였는데 왜 비현각에 그녀가 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비현각에? 후궁도 아니고 왜 동궁에? 의아한 건 그뿐만이 아닌 듯 모두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다섯 꽃잎의 귀한 이께서 어찌하여 비현각에? 그때 누군가가 말했다.

“외로우셨나 봅니다.”

태자비가 될 심서혜의 수난은 궁 안에 파다히 알려져 있다. 황상의 뜻에 따라 교육이라는 미명하에 궁을 드나드는 심서혜는 요즘 태후와 황후 사이에서 바람 잘 날 없이 휘둘리고 있다고 했다. 세 살짜리가 무엇을 알아 이 험난한 후궁에서 제 몫을 하겠는가. 아이는 그저 휘둘리는 대로 휘둘리고 때리는 대로 맞고 있을 뿐이다. 울지도 않고 떼도 부리지 않고 그저 감내하고 있다.

아이의 아비는 물론이고 집안의 어른인 황후도 심서혜의 안위에는 관심이 없다. 그저 매질만 당하며 온갖 꾸지람만 듣고 있으니 어린아이가 어찌할 바 모르는 상태에서 자신의 지아비가 될 이라는 태자를 먼발치에서나마 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외로우셨나 봅니다.

그 담담한 한마디가 이연의 마음속 깊이 박혔다. 심서혜가 온 지 두 달째 되는 가을날의 일이었으며, 그녀는 이미 잊은 첫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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