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몽중연 (41)화 (41/100)

41.

저는 서신을 집어 들었어요. 그 서신을 일단 태워야 했습니다. 서신을 드는데 손이 떨렸어요. 친왕의… 목을 잘랐다고요? 시신을 훼손했다고요? 운왕 전하께옵서는 자진을 하신 거지, 죄인으로 인정되신 게 아닙니다.

혐의는 혐의일 뿐이었어요. 그런데 그 목을 자른다는 건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다는 의미입니다. 이제 운왕 전하께옵서는 망자로서의 한이 맺히시겠죠. 영원히 안식을 가지실 수 없으시겠죠. 그런 일을 저지르신다고요? 그분은 영원히 이승을 떠돌게 되실 거예요. 그런 일을, 하신다고요?

서신을 태우고 그 재가 서안에 고인 걸 보면서 휘청거리며 일어났습니다. 문을 열고 나오자 모두가 의아한 얼굴로 저를 바라봤어요. 저는 제가 혼령이 된 기분이었어요. 냉궁에 있을 때 꿨던 꿈을 지금 깨어 있는 채로 꾸는 것 같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죠?

당시 저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꿈속에 떨어져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필사적이었습니다. 그때의 그 기분이 생각납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눈앞이 캄캄하진 않았었어요.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얼얼하진 않았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어떻게 태자 전하께옵서.

이 황궁의 최고 권력자일 수가 있죠?

그게, 어떻게, 가능하죠?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싶은데 친왕의 목을 자르는 건 황상께옵서도 하시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 일을 어떻게 태자 전하께옵서 하실 수 있죠? 무엄하게도 제가 지금 광증을 입에 담아야 할 순간인가요? 아니요, 아닐 겁니다. 답례품은 당일에 갔고 저는 그 뒤에도 태자 전하를 계속 뵈었어요. 그분은 아주… 아주, 괜찮으셨어요. 제가 아는 태자 전하셨습니다. 우아하고 아름답고 당당하고 초연한. 그런 분이셨어요.

친왕의 목을 자른 태자가 현재까지 멀쩡하다는 건 태자의 권력이 황상의 권력을 넘어섰다는 뜻입니다.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어요. 당금 황궁의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죠? 저는 제가 촉각을 세우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저는 눈멀고 귀먹어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이가 되어 있었던 거예요. 어떻게, 이런 일이.

알아보도록 하지요.

제가 지금 보호받고 있는 것인가, 갇혀 있는 것인가.

아는 방법은 사실 간단합니다.

휘청거리며 동궁의 문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궁녀들이 따라왔어요.

“비전하, 어디로 행차하시나이까?”

“전하, 날이 아직 춥사옵니다.”

궁녀들이 조잘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소리는 마치 봄바람처럼 제 귓가를 의미 없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제가 문으로 다가갈수록 제 등 뒤에 있는 궁녀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졌습니다. 난처한 기색들이 역력했어요.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고요히 따르는 자는 혀가 잘려 말할 수 없는 월아뿐이었습니다. 아니, 그녀는 아마 혀가 잘리지 않았어도 아무 말 하지 않았을 겁니다.

“비전하, 차를 드실 시간이옵니다.”

서 상궁이 문에 거의 가까워진 저를 보며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을 억지로 누르며 말했습니다. 억지웃음이 아주 가득했어요. 하…. 서 상궁은 제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녀는 제가 어떤 처지인지 알고 있었던 겁니다.

저는 역적의 딸이라서 혹은 역적이라서 보호받고 있었던 게 아니에요. 다른 이들로부터 공격받지 않도록 동궁에서 보호받는 그런 것이 아니었던 겁니다. 제가 궁의 문을 나서려 하자 금위병들이 아, 하고 눈을 질끈 감더니 창을 양쪽으로 엇갈려 제 길을 막았습니다.

“……?”

저는 고개를 치켜들고 그들을 똑바로 노려봤습니다. 무슨 짓이냐는 제 서슬 어린 시선에 그들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어요. 하지만 창을 열어 주진 않았어요. 동궁에는 제 위에 태자 전하밖에 안 계십니다. 그러니 이건 태자 전하의 명이겠죠. 확인해 볼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비전하, 뫼시겠….”

서 상궁이 저를 조심스럽게 붙잡았어요. 그 순간 저도 모르게 그녀의 팔을 날카롭게 뿌리쳤습니다. 그녀도 저도 휘청거릴 정도로 격렬한 거부였어요. 제가 휘청거리자 월아가 재빨리 저를 붙잡았습니다.

화가 난 건 아니었습니다. 어쩔 수 없죠. 태자 전하의 명을 동궁의 그 누가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이성적으로는 아는데 감정적으로 납득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릴 거 같았습니다. 다들 알고 있었던 겁니다. 제가 무엇에 속고 있는지.

속았는가?

아니요, 엄밀히 말하면 속진 않았죠. 저는 역적이 맞으니까.

보호의 의미는 없었는가?

아니요, 보호의 의미도 있었죠. 동궁의 안에서 저는 가장 안전합니다. 그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에요.

속았…. 속진 않았어요. 황궁 생활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속는 게 멍청한 거지, 속인 쪽이 잘못한 게 아닙니다. 황궁 생활은 그런 거니까요. 그러니까 저도 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거죠. 그런데도 이 마음의 답답함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좋죠. 저는 도대체 이 감정을 어떻게 해야 좋죠.

저는 그분이 너무나 가여웠어요. 안타까웠어요. 무엇이든 다 해 주고 싶었고 그 때문에 제 목숨을 걸었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까 그분은 그럴 이유가 없으시대요. 기뻐해야 하는 문제인가요? 그렇겠죠! 그런데 제 마음이 왜 이렇게 서럽죠?

제 마음이 왜 이렇게 어둡습니까….

“월아.”

저는 월아만 부르고 등을 돌렸습니다. 제가 처소로 움직이자 제가 부른 월아만 종종걸음으로 따라왔어요. 서 상궁과 다른 궁녀들은 따라오지 못했습니다. 그녀들이 그럴 걸 알면서 저는 그들을 거기에 버려두고 월아와 둘이 처소로 돌아왔습니다.

“주무십니까?”

이른 밤, 저는 자는 척을 했습니다. 저녁도 먹지 않고 침상에 누웠어요. 태자 전하를 늘 기다리던 제 모습을 생각하면 무척 낯선 모습이었죠. 하지만 저는 도저히 태자 전하와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요? 저는 따질 수도 없습니다. 저는 아랫사람이니까요. 저는 그분에게 속해 있는 사람이니까요. 저에게는 그럴 권리도 자격도 없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은 북받쳐 올라서 참을 수가 없어요.

“서혜야.”

저는 대답하지 않았어요. 그분이 이대로 가 주셨으면 했습니다.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았어요. 제 마음을 설명할 수 없으니까요. 그분이 강건하신 것이 기뻐야 하는데 저는 별로 기쁘지 않았습니다.

“…노여움을 어떻게 풀어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

“이렇게 외면하지 마.”

태자 전하의 목소리가 낮아졌습니다.

그 갈라진 목소리는 마치 울 것 같았어요. 운다고? 제 생각에 스스로가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혔습니다. 운다니요? 그분은 황상보다 높은 권력을 가지고 있어요. 친왕의 목을 자를 수 있다고요. 정말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신데 우신다고요?

스스로의 말이 참 어이없다고 생각했을 때 뺨에 무언가가 툭 떨어졌습니다. 뜨겁지 않았는데 왜 그게 닿는 순간 제 뺨이 델 것 같이 느껴졌을까요. 감정. 그 말도 안 되는 것이 저를 이토록 어리석게 만듭니다. 미지근한 것에 데게 해요. 그 연정이라는 것이.

“서혜야.”

저는 어쩔 수 없이 눈을 떴습니다. 계속 외면할 수는 없었어요. 그분은 제가 자고 있지 않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계셨으니까요.

“예.”

“나는….”

“예, 전하.”

제 차가운 대답에 태자 전하의 눈이 조금 커졌습니다. 진심으로 그분은 상처 입으신 것 같았어요. 그걸 보면서 저도 같이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 순간 알게 되는 게 있습니다. 저는 이분을 정말로 연모한다는 것. 제 마음을 다해서 귀히 여긴다는 것. 이분은 누구보다 존귀하시지만 설사 이분이 더럽고 비천해지시더라도 제게는 세상에서 제일 귀한 분이실 거라는 것.

하지만 저의 그 마음은, 제게만 소중하리라는 것. 제 마음은 제게만 반짝인다는 것. 저분이 가지고 계시는 수많은 것 중 하나에 불과할 제 마음은….

“서혜야.”

태자 전하의 목소리에 물기가 섞였어요. 아주 조금이었지만 그 눅눅함이 저를 속상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어떡할까요. 네, 저는 못났습니다. 이분의 강녕함을 기뻐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태자 전하의 녹진한 목소리가 제 귓가를 파고들었습니다.

“그대를 속이려고 한 게 아닙니다.”

아니요, 속이신 겁니다.

저는 그분을 빤히 바라봤어요. 속이려고 한 게 아니라고요? 저를 여기에 가둬 두셨으면서요? 저는 여기에서 보호받은 게 아닙니다. 제 의사로 나갈 수 없도록 갇혀 있는 거예요. 저는….

이 마음을 도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아등바등 애썼습니다. 그게 보잘것없을 수는 있지만 저에게는 최선을 다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분께는 그게 필요가 없는 것이었어요. 제가 목숨을 바치든 혼을 바치든요.

저는 온 힘을 다했는데 그건 그냥 헛수고였던 겁니다. 왜 그걸 두고만 보고 계셨을까요. 적당히 모른 척하시면서, 그럭저럭 제게 맞춰 주시면서, 왜 그러셨을까요. 그러실 이유도 없는 존귀한 분이….

“서혜야, 정말 아니야.”

태자 전하께옵서 굳이 제 침상 앞에 무릎을 꿇으셨습니다. 저와 눈을 마주하시려는 건지 아니면 제게 무릎을 꿇으시려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 엄청난 모습을 보면서도 저는 만류할 생각도, 고맙거나 송구하거나 그런 감정도 전혀 들지 않습니다.

그래요, 이 감정은.

이해할 수 없다, 입니다.

이해할 수 없어요. 눈앞의 이 사람은 누구죠? 저와 그토록 오래 살을 맞대고 한 이불을 덮은 그분인가요? 제가 아는 그분이요? 그 이해할 수 없는 게 너무 커서, 그 아연함이 너무 높은 장벽이라 저는 눈물이 나지도 않고 그분의 눈물에 흔들릴 수도 없습니다. 그냥 이해가 다 안 돼요.

“저는 전하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사옵니다.”

“서혜야, 이러지 마.”

“어떻게.”

태자 전하께서 황급히 저를 말리셨어요. 이러지 마, 서혜야. 그분은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다급하게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잘못했어. 서혜야, 내가 다 잘못했어. 그분이 말씀하시는 목소리가 제 귓가를 의미 없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봄바람처럼요.

해서는 안 되는 말인 건 알아요. 그리고 아마 태자 전하께서도 대답하실 수 없는 말일 겁니다. 그 우문을 저는 입 밖으로 꺼내서는 안 되는데, 저는 묻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저는 마치, 평생을 가꾼 전 재산이 불타는 걸 보고 있는 심정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어?

“열 길 물속 알아도 한 길 사람 속 모른다지만.”

저는 언제나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걸 전제해 왔어요. 한 번도 믿은 적이 없었어요. 저는, 다 괜찮았어요. 아버지가 저를 팔아도, 제 인생이 모조리 저당 잡혀도, 역적의 딸이 되어 하루아침에 냉궁으로 끌려가도, 그대로 죽어야 해도! 다 괜찮았는데, 이것만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어떻게 당신이!

어떻게 당신이!!!!

눈물이 뚝 떨어졌습니다. 눈물은 눈에 고일 땐 뜨겁고 떨어질 땐 차갑고 남은 자국은 따갑기나 합니다. 그건 연정과 닮았어요. 이게 뭐라고 이렇게 아파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눈에서 나온 물 따위에 저는 이토록 마음이 찢어지고 태자 전하는 이토록 무너지는 얼굴을 하시고.

그런데 저는 묻지 않을 수가 없어서.

“어떻게 신첩이 전하를 이렇게 모를 수가 있습니까?”

원망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어떻게 신첩에게 이렇게까지 전하를 숨기실 수가 있습니까?”

나는 당신에게 다 줬는데.

“어떻게, 이렇습니까.”

당신은 이렇게 모든 걸 숨길 수가 있어. 당신이 태자이기 때문에? 존귀하기 때문에? 그래서 지금 나는 존귀한 이에게 마음을 주었던 그 수많은 어리석은 여인들이 치러야 했던 대가를 치르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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