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몽중연 (40)화 (40/100)

40.

이 밧줄이 무슨 밧줄인지 금세 알았습니다.

맙소사.

손이 파들파들 떨렸습니다. 이 밧줄은 그러니까… 운왕 전하가 목을 맨 그 밧줄이겠죠.

“비전하!”

놓칠 뻔한 상자를 겨우 붙들었으나 밧줄은 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뱀처럼 떨어진 밧줄이 스르륵 제 발치에 고였어요. 그게 소름이 끼쳐서 저는 서둘러 뒤로 물러났습니다. 저만 소름이 돋은 게 아닌 듯 월아가 제 옷자락을 잡아 거칠게 뒤로 잡아끄는 게 느껴졌어요.

삿된 것에 닿지 않도록 모두가 주의하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회임한 몸이니까요. 하지만 누군가가 저 밧줄을 줍긴 해야 합니다. 서 상궁이 재빨리 궁녀에게 눈을 부라렸어요. 그러자 궁녀가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천을 가져와 자신의 손에 닿지 않게 조심조심 밧줄을 천 위로 감싸서 들었어요.

“답례는… 따로 드리도록 하마.”

저는 선물을 받았고 이제 오늘 내에 답례품을 올려야 합니다. 회임한 저에게 이런 삿된 물건을 내린 분께 어떤 답례를 드려야 할까요. 저에게는 삿되나 그분께는 한이 된 물건. 이 물건이 내포한 뜻을 알아야 합니다.

…저에게 왜 밧줄을 주신 걸까요.

운왕 전하께서 돌아가신 날, 황후마마와 제 사이에 하하, 호호 선물이 오갔다는 것에 분하실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 밧줄은 증거품입니다. 혜비마마께서 사사로이 빼돌릴 물건이 못 됩니다.

이 밧줄이 저에게 들어올 수 있는 경로는 두 가지. 첫째는 혜비마마께서 청을 올리시어 황상께옵서 마마께 하사하신 경우. 아니면 마마께옵서 빼돌리신 경우. 둘 중에 하나인데 어느 쪽일까요.

혜비마마의 상궁이 집요하게 저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허리를 숙이고 있는 그녀를 내려다봤어요.

“물러가라.”

상궁이 저를 보는 눈길이 뱀의 눈길처럼 싸늘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장황자 운왕 전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태자 전하께 대적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분이셨죠.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운왕 전하께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분이 장황자시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그분의 특별한 위치 때문이었죠.

혜비마마께옵서는 한때 황상의, 당시에는 태자셨습니다만, 어쨌거나 그분의 정실이셨습니다. 그러니 운왕 전하께서는 늘 분하실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분의 생각에 동궁은 그분의 것이거든요.

“물러가라.”

한 번 더 말하자 상궁이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났습니다. 상궁은 지금 저에게 화가 날 수밖에 없어요. 그녀는 혜비마마라는 배에 올라타 있는 선원입니다. 혜비마마는 배이자 선장이죠. 그리고 그 배의 동력은 운왕 전하였습니다. 지금 그 배는 동력이 사라졌지요. 한마디로 멈췄습니다. 저는 배를 안 타 봤습니다만 망망대해에서 멈춘 배 위에 있는 선원들이 얼마나 막막할지는 굳이 겪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상궁이 사라지고 나서 저는 궁녀들의 부축을 받아 자리에 앉았습니다. 서 상궁이 날카롭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차를 가져와, 어서!”

그녀가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속이 안 좋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속이 울렁거렸습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마셨지만 울렁거리는 속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월아가 제 얼굴을 보더니 뛰쳐나갔습니다. 어디를 가는 거지, 하고 모두가 의아히 여길 때쯤 그녀는 태의를 데려왔습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었나 봐요.

침상에 앉아 태의의 진맥을 받았습니다. 태의는 아주 신중하게 저를 진맥했습니다. 그때 문이 열리고 태자 전하께옵서 드셨어요. 모든 이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으려 했지만 전하께옵서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어 절을 거절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한달음에 제게로 다가와 저를 바라보셨어요.

“몸은 어떠하십니까?”

저는 말없이 웃었습니다. 좋다고 하기엔 제 눈앞에 태의가 와 있습니다. 이 시간에 들르신 걸 보아하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들으신 것 같고요. 염려하시지 않도록 하고 싶은데 그게 쉽지가 않을 듯하여 마음이 무겁습니다.

“답례품은 제가 보내겠습니다.”

“전하.”

제가 고개를 저으며 만류하려 하자 태자 전하께옵서 제 머리를 잡아 품에 넣으셨어요.

“오고 있는데 태의가 출발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많이 놀랐습니다. 하니,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태자 전하의 말씀에 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

그래요, 그 답례품.

저는 그 답례품을 꽤 오랫동안 잊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보내셨는지 생각하지 않았어요. 태자 전하께서는 태교에만 힘쓰라 하셨거든요. 아니요, 사실 그분은 그렇게 말씀하시지도 않았습니다. 건강하라고 하셨어요. 늘 건강하라고. 그분은 태아의 안위에 큰 관심이 있어 보이시지도 않았습니다. 늘 제 걱정이셨어요. 제 몸이 혹시 탈이 나지는 않을까, 태의들을 앞세워 온갖 약재를 넣은 탕약을 먹이시곤 했습니다.

밤이 되면 직접 먹여 주시기도 했어요. 후후 불어서 한 숟가락씩 떠먹여 주셨어요. 저는 어릴 때부터 약을 많이 먹었습니다. 몸이 약했으니까요. 그에 비해 반드시 죽지 않아야 하는 몸이었고요. 귀중한 다섯 꽃잎. 저는 반드시 살아남아 태자 전하의 아이를 낳아야 하는 몸이었고 따라서 좋다는 약재는 다 먹었습니다. 아무리 써도 토하면 안 되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태자 전하는 달랐습니다. 안쓰러워하셨거든요. 단 당과를 먹여 주시며 수고했다고 제 뺨을 쓸어 주셨어요. 고작 약 먹는 게 무슨 수고이겠냐마는 그분은 정말 제가 뭐라도 한 것처럼 바라봐 주셨습니다. 저는 그분의 품 안에서, 동궁에서, 아주 편안하게 지냈습니다. 늘 황궁에서는 촉을 곤두세워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꽤나 안일하게 생각했던 게 분명했어요.

그날은 봄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오후였습니다. 날이 따뜻해져 오랜만에 털옷을 내려놓고 봄옷 차림으로 동궁 내에 있는 작은 산에 올랐습니다. 산에 올랐다고 하면 과장이고 산으로 향하는 오솔길을 조금 걸었을 뿐이에요. 오솔길에는 벚꽃나무가 있어 흐드러지는 꽃나무들 속에서 봄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석 달이 된 제 배는 여전히 납작했습니다. 배가 불러 오지 않으니 자신이 회임 중이라는 걸 실감하기 어려웠어요. 입덧조차 없어서 더욱 그러했습니다. 토하거나 혹은 특정한 음식이 당기거나 하면 제가 회임하였다는 걸 좀 확신할 수 있을 텐데 저는 언제나처럼 평온했습니다.

도리어 주변에서 조금 걱정했어요. 저는 입이 짧은 편이고 회임 때는 많이 먹어야 한다고 하니까요. 특히 제 식사량은 임부에게는 모자란 양이라 먹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먹으라는 태의의 권고에 따라 태자 전하께옵서는 전 대륙의 산해진미를 모조리 제 앞에 두셨습니다.

저로서는 나물이나 먹는 게 속 편하지만 그럴 수는 없어서 조금씩 먹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제 궁녀들은 몹시 즐거워했지요. 나머지는 모두 그녀들의 몫이니까요. 다 같이 산해진미를 매일같이 먹는 나날이 계속되고 있었어요. 분홍색 꽃잎이 흩날리는 오솔길을 걷는 지금처럼 평화로운 나날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월아가 제 옷에 슬쩍 서신 하나를 집어넣기 전까지는요.

“…….”

월아는 지밀상궁이었던 여인입니다. 그녀는 사각지대에서 서신을 전하는 법을 압니다. 아주 자연스럽게 행동하지요. 그녀는 뭐든 알지요. 한때 성총을 받았던 현비의 지밀상궁이었으니까요. 그런 자리에 있으려면 보통의 영특함으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현비는 사지가 찢겼는데 월아는 살아남았습니다. 그녀는 정말 엄청난 처신의 대가입니다. 혀를 좀 잘리는 것으로 끝났다는 건 월아의 능력을 보여 줍니다.

저는 월아를 가장 신임합니다. 의심하지 않고 신임하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지만 제 궁 안에 사람들 중 가장 그녀를 믿어요. 믿는 사람은 많지요. 서 상궁도 믿고 다른 궁녀들도 서 상궁만큼은 아니어도 일정한 믿음은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월아를 가장 믿는 건 어쩔 수 없는 만남 때문입니다. 우리는 냉궁에서 만났으니까요.

우리는 아무것도 없을 때 만났어요.

우리는 서로에게 별 도움이 될 수 없었고 우리 사이엔 득실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최소한 한 번은 그랬었죠. 그 이후에는 물론 득실과 이해관계가 발생했지만 그래도 한 번 순수했던 관계와 한 번도 순수함이 존재하지 않았던 관계는 다릅니다. 제게는 다르게 느껴져요.

월아 또한 그렇습니다. 월아는 제가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할 때가 있어요. 그녀는 제가 아프다고 생각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태의를 끌고 오고 제가 위험한 것을 만진다고 생각하면 무작정 뒤로 끌어냅니다.

그녀는 물론 저를 섬기죠. 그녀에게 저는 상전입니다. 그러나 가끔 그녀는 무엄한 행동을 해서라도 저를 보호하려 하고, 저는 그것에 노여워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아주 얇지만, 분명히 우정이라는 게 존재하니까요.

서신이 제 옷 속에서 바스락거렸어요. 제 귀에만 들리는 소리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분홍 꽃잎이 흩날리는 아름다운 날, 의외로 하늘은 흐렸습니다. 그것이 징조처럼 느껴졌어요. 이런 불길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지요.

처소로 돌아와 펼쳐 본 서신에는 월아의 고뇌가 적혀 있었습니다. 그녀는 저에게 고하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한참을 망설인 것 같았어요. 몇 번이나 확인하고 고민한 끝에 고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그녀는 아주 신중한 어조를 사용해 저에게 보고하고 있었습니다.

그건 태자 전하의 답례품에 관한 보고였어요.

저는 믿을 수가 없어서 그 서신을 세 번이나 되풀이해 읽었습니다. 제가 한자를 잘못 아는 것 같았어요. 특정 한자를요. 그럴 리가 없는데, 그 단어가 맞을 텐데, 그런데도 믿을 수가 없었어요.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그런 일은 일어나면 안 돼요. 왜냐하면, 왜냐하면….

왜냐하면….

태자 전하의 답례품이, 월아가 고한 대로라면….

제가 생각한 것과는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저는 우리가 약자라고 생각했어요. 우리가 핍박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우리는 황후마마께, 황상께, 운왕 전하께, 혜비마마께, 공격받고 있다고요. 우리는 겨우 방어하고 있고, 우리는 너무 힘들고, 우리는 우리밖에 없고, 우리는….

제 손에서 서신이 떨어졌습니다. 떨어지는 서신에서 보이는 한 줄.

태자 전하께옵서 답례품으로 운왕 전하의 목을 혜비마마께 보내셨나이다.

친왕의 목을 잘라서 혜비마마께 보낼 수 있다면, 태자 전하의 권력은 이미 황상을 넘어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밖에 없고, 우리는 공격받고 있고, 제 가엾은 태자 전하는….

아니요, 그런 분은 아니 계신 겁니다.

제 지아비는 이 바다의 물고기가 아니셨어요. 황궁이라는 바다의 포식자셨던 겁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저는 동궁에서 정말 보호받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갇혀 있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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