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한밤중에 돌아오신 태자 전하께옵서는 조금 취해 계셨어요. 아무래도 봄맞이 연회에서 웃어른들이 주시는 술이 꽤 많았나 봅니다. 술에 본래 약하신 분이세요. 아마 주량만으로만 따지면 저보다 약하실 겁니다. 워낙 몸을 정갈하게 하는 분이시니까요.
늘 일정대로 움직이시고 식사에 대해서도 호불호가 거의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무엇을 싫어하시는지 거의 드러낸 적이 없으세요. 지금도 사실 저를 좋아하신다는 걸 제외하면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또 무엇을 싫어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운왕 전하께옵서는 태자 전하를 무척 싫어하시지만 정작 태자 전하께옵서는 운왕 전하를 싫어하신 적이 없을 정도였어요. 그저 피하실 뿐이었죠. 운왕 전하께옵서 워낙 적대시하시니까요.
“전하!”
전하께옵서 궁인들의 부축을 거절하시며 약간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제게 다가오셨어요. 놀라서 그분을 부축하자 배시시 웃으셨습니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웃음이었어요.
“기다리고 계셨습니까?”
저는 태자 전하의 등 뒤로 팔을 둘러 궁인들을 손짓으로 내보냈습니다. 눈치 빠르게 서 상궁이 모두를 내보내고 마지막으로 문을 닫으며 물러났어요.
그들이 모두 사라진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태자 전하를 부축하여 침상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전하께옵서는 저에게 몸을 기대고 계셨지만 무게를 실고 계시진 않으셨어요. 몸이 닿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꺼우신 것 같았습니다.
“도화주가 나왔습니다.”
태자 전하의 탈의 시중을 들려고 했지만 전하께서는 거절하시더니 혼자 의복을 벗기 시작하셨습니다. 태자의 의복은 상당히 복잡하지만 전하께옵서는 사실 스스로 옷을 착의하고 탈의하시는 데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십니다. 여인인 저보다 더 자신의 의복을 잘 다루세요. 전장에서 계셨던 경험 때문이라고 하시지만 제가 보기엔 본디 손재주가 좋으셨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구운 떡이 맛있더군요. 서혜, 당신도 좋아할 것 같았습니다.”
태자 전하의 목소리가 나른했어요. 음식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시는 건 처음이라 웃음이 나왔습니다. 무엄하지만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분은 느릿한 어조로 조곤조곤 연회 때 있었던 일을 말씀하시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참석했었는지, 어떤 일들이 특별하였는지. 누가 누구와 이야기를 나누었고, 누가 첩실을 대동하여 왔는지. 그리고.
“저만 혼자더군요.”
태자 전하께서 제 옷을 벗기셨습니다. 겉옷이 털썩 발치에 고였어요. 저는 옷이 벗겨지는 것보다 태자 전하의 쓸쓸한 음성에 놀라 귀를 기울였습니다.
“이전이 생각났습니다. 당신이 눈을 뜨시지 못하던 때. 백방으로 당신을 살릴 방도를 찾던 때. 저는 그때 당신을 잃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자 이상한 꿈을 꾸게 되었는데….”
“…….”
“그 꿈은 지옥과도 같아서, 저는 정말로….”
태자 전하께서 피식 실소하셨습니다.
“제가 별소리를 다하는군요. 금야, 달이 너무 밝고 술이 너무 달았던 듯합니다.”
태자 전하께서 꾸신 꿈이 무엇이었는지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꿈을 꾼 적이 있어요. 아주 오랫동안 꿈을 꿨었죠. 그리고 그 꿈으로 현실을 바꾸었으니 저에게는 은혜와도 같은 꿈이었습니다. 그것이 제가 죽은 뒤의 삶이었다 하더라도 저는 조금도 원망스럽지 않습니다. 무섭지도 지옥 같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꿈은 조금 외롭긴 했습니다. 저는 죽어 있었고 말 한마디 할 수 없는데 모두가 저에 대해 제멋대로 이야기했으니까요. 안 좋은 건 모두 제 탓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전하, 신첩도 꿈을 꾼 적이 있사옵니다.”
제 말에 태자 전하께서 저를 내려다보셨어요. 위로하기 위해 하는 말일까, 진정일까. 가늠해 보시는 듯한 눈길이었습니다.
“그다지 유쾌한 꿈은 아니었으나….”
“아니었으나?”
“그 꿈에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상한 말이지요?”
조심스럽게 여쭙자 태자 전하께옵서 잠시 생각하시더니 고개를 저었습니다.
“저 또한, 그렇습니다.”
유쾌하지 않은 꿈.
그러나 은혜를 입었다.
태자 전하께옵서는 제 말을 이해하신 것 같았어요. 우리는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수천수만 갈래의 뜬구름 중 둘이 똑같은 뜬구름을 잡은 것 같았습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우연 속에 우리 둘이 갇혀 있는 것 같았어요.
“서혜야.”
태자 전하께서 부르셔서 제가 그분과 시선을 마주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날 놓으면 아니 된다.”
“저는 전하의 비인데 어찌 전하를 놓겠사옵니까?”
이해할 수 없어 반문하자 전하께옵서 고개를 저으셨습니다.
“네 마음속에서 나를 놓으면 아니 된다. 약조하겠느냐?”
저는 망설이지 않고 그분의 입술에 입을 맞췄어요. 제가 입을 맞출 때마다 그분은 흠칫하시고는 했습니다. 저에게는 음란한 일을 마음껏 하시면서 정작 제가 입을 맞추면 소년처럼 굳고는 하시는 게 신기했습니다. 그분의 손에 제 손가락을 얽자 전하께옵서 또 팔을 딱딱하게 굳히셨어요.
“약조하옵니다, 전하.”
거리낌 없이 단호하게, 저는 약조했습니다.
***
한 주가 지나고 나서 혜비마마의 통곡이 온 황궁에 울려 퍼졌습니다.
감옥에 계시던 운왕 전하께서 긴 수감 생활을 이기지 못하고 목을 매단 것입니다. 의외의 일이었습니다. 그분이 자진하실 분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청렴하고 결백한 걸 추구하시는 분은 아니셨으니까요.
무엇보다 도대체 밧줄이 어디서 난 거죠? 지금 황궁의 최대 관심사는 그것입니다. 운왕 전하에게 밧줄을 제공한 인물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요. 혜비마마의 원한은 온통 그 사람에게 쏠려 있거든요. 제가 한참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서 상궁이 화분을 들고 왔습니다. 청자가 무척 아름다웠어요.
“황후마마께옵서 모란 화분을 하사하셨나이다.”
아직 입춘이라 모란이 피려면 날이 더 따뜻해져야 합니다. 웬 모란일까요? 제가 의아해하는데 서 상궁이 낮게 속삭였어요.
“백모란입니다.”
아아, 알 만하네요.
오월이 되면 황도에 있는 온 사람들이 모란을 보려고 합니다. 꽃 나들이를 하고 모란값은 폭등하지요. 아마 올해도 귀한 모란들이 나올 거예요. 그리고 황후마마께서 가지고 계시는 모란들이 특히나 귀합니다.
백모란은 아무리 아름다워도 화왕이 될 수 없다고 하지요. 화왕의 자리는 적모란의 것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화분에서 피어 내는 꽃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것은 백모란에 불과하다는 뜻입니다. 반항하지 말라는 암시지요. 태자 전하께옵서 제가 밖에 나가는 걸 꺼리시고 동궁에 손님을 일절 안 받으시니 이런 식으로 경고를 하시는 겁니다.
오랜만에 제가 황궁에 있다는 게 실감 나네요.
더 실감이 나는 부분은 보답을 드려야 된다는 거죠. 백모란에 대한 감사의 표시를 해야 합니다. 이 점이 어렵습니다. 적모란을 드리면 어떨까요? ‘황후마마께서 뭐라고 하시든 저는 적모란입니다.’라고 하는 걸로 받아들이실 수도 있죠. 물론 ‘황후마마께서 적모란이시라는 것을 이 며느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는 뜻으로 받아 주실 수도 있지만요. 그날 황후마마의 기분과 관대함에 따라 다르지요.
그렇다고 보석을 올릴까요? 보석도 각기 다 뜻이 있고 시일이 있는 법. 무엇을 올려야 할까…. 역사서에는 기가 막힌 선물 이야기가 많이 나오죠. 맹물 한 잔으로 황제를 감동시킨 후궁도 있고요. 하지만 저는 그만한 재치와 현명함을 가지진 못해서요. 그건 어림도 없는 소리입니다.
“어쩔 수 없군. 백학도를 가져와라.”
제 말에 서 상궁이 눈을 크게 떴어요. 저도 별로 그걸 내드리고 싶진 않지만 아무래도 백모란이 온 걸 보니 황후마마께서 단단히 화가 나신 게 분명했어요. 당연하죠. 태자 전하께옵서 황후마마의 배경을 무너뜨리려 하고 계시니까요.
심상운 대감은 이번 사건으로 재산의 대부분을 잃었다는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항료 무역 자체가 무척 돈이 많이 드는 장사이기 때문이죠. 특히나 심상운 대감처럼 나중에 뛰어든 사람들은 더욱 불리하기 마련이었습니다.
“가져왔습니다, 전하.”
제가 자수를 놓은 백학도는 세 쪽짜리 병풍이었습니다. 꽤 시간이 오래 걸렸던 물건이기도 하거니와 탐내는 사람도 조금 있었고, 무엇보다 저 자신이 애정을 가지고 있었던 작업물이라 황후마마께 바쳐야 하는 게 약간 속이 쓰렸어요. 하지만 어쩔 수가 없어요. 지금 황후마마는 무척 기분이 상하셨고 잘 마무리를 짓지 못하면 나중에 그 대가를 크게 치르게 될 테니까요.
“백학의 자태가 정말 우아하옵니다.”
“이것이 그 백학도….”
궁녀들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어요. 백학도를 완성하고 나서 분에 넘치는 찬사를 꽤 받았었지요. 그 찬사보다 기분이 좋은 건 이 물건을 볼 때의 제 감정이었어요. 저는 이 백학도를 만드는 데 무척 심혈을 기울였고 모든 자수가 공을 들여 만들어졌어요. 정말이지 뿌듯했어요. 상당히 큰 물건인데도 제가 단 한 곳도 허술함이 없이 작업했다는 게요.
황후마마께 드리려고 만든 게 아닌데….
늘 어쩔 수 없이 진상품을 바치게 되곤 합니다. 제 보잘것없는 재주를 사용한 물건들을 올리고는 하지요. 그래도 늘 제 마음에 가장 들었던 것들은 남겨 두곤 했어요. 아니면 태자 전하의 물건으로 사용하든가요. 그런데….
“백학도는 누구에게 줄 겁니까?”
언젠가 태자 전하께서 하문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대답하지 않았어요. 사실은 조금 더 크게 만들어 보려고 했어요. 한 8쪽쯤 되는 병풍으로 만들어 태자 전하의 침전 한쪽에 두면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어요. 색감도 전하의 침전에 맞춰서 만든 것이었는데….
보고 있어야 마음만 아프죠.
“황후마마께 올려라.”
월아가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과하다는 눈이었어요. 저도 압니다, 과하다는 것. 그러나 황후마마께옵서는 지금 불안하시고 그 불안을 저에게 풀려고 하고 계세요. 그분은 후궁의 주인이시니 저는 그분께 맞추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래 봐 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어 등을 돌렸어요. 그리고 백학도에 대해서는 마음을 접으려고 애썼습니다. 오래 마음을 쓴 것이었는데, 그것도 태자 전하를 위해 쓴 마음이었는데. 입맛이 썼지만 어차피 끝난 일 잊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날 황궁에는 제가 백학도를 황후마마께 바쳤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어요. 저는 조금 더 생각해야 했습니다. 운왕 전하께서 옥에서 자진하신 날 황후마마와 제가 선물을 주고받은 게 누군가에게는 어떤 모습으로 보일지를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봐야 했어요. 그랬더라면 다음 날 저는 붉은 상자를 받지 않았을 겁니다.
“혜비마마께서 보내시는 선물입니다.”
붉은 상자.
그 상자가 불길하게 느껴지는 건 저만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월아가 제 앞을 막아섰어요. 그 상자에서 무엇이 나올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상자는 두 손을 합친 정도의 크기에 불과했는데도 그녀는 마치 거기서 자객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경계심이 가득했습니다.
저는 상자를 받자마자 제 실수를 깨달았어요. 하지만 황후마마께서 백모란을 보내셨는데 제가 어떻게 그날이 지나가도록 답례품을 보내지 않겠습니까. 그건 법도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황후마마께옵서는 윗전이시고 저는 아니니, 혜비마마께옵서는 그저 제가 미우시겠지요. 어쩔 수 없이 미움을 받아들이는 수밖에요.
한숨을 쉬며 상자를 받아 들었습니다. 월아는 만지지 말라는 얼굴이었고 서 상궁도 걱정이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요. 혜비마마께옵서 주신 선물을 어찌 아랫사람들에게 열어 보게 하겠습니까. 저는 선물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상자를 떨어뜨릴 뻔했어요.
그 상자 안에 든 건 피 묻은 밧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