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몽중연 (38)화 (38/100)

38.

이틀 뒤 새벽, 황후마마의 지밀상궁이 매우 복잡한 경로를 통해 제 궁에 들렀습니다. 옷도 갈아입고 머리도 다르게 하여 언뜻 보면 전혀 다른 사람인 것처럼 꾸미고서요. 이틀이라니, 정말 애가 닳았군요. 서 상궁이 지밀상궁을 맞아 이야기를 나누고 일단 보냈다고 합니다. 저는 태자 전하와 함께 있었으니까요.

시간을 다시 정한 건 그다음 날 늦은 오후였습니다. 마침 연회가 열린 날이었습니다. 입춘이었거든요. 저야 당연히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태자 전하께옵서 제 외출을 금하시기도 했고 그게 아니어도 연회에 참석하기는 좀 애매한 입장이었어요. 정월의 대제사에 빠져놓고 연회에만 참석하는 건 보기에 좋지 않으니까요.

연회가 아니면 황후마마의 지밀상궁과 만나기가 쉽지 않지요. 지밀이란 말 그대로 지척에서 시중을 드는 사람이니까요. 사실 연회에서도 계속 시중을 들어야 하는데 이번만 다른 사람을 세운 게 틀림없었습니다. 그만큼 제 조치에 놀랐다는 이야기겠지요.

“비, 비전하를 뵙사옵니다.”

저는 웃으며 상궁을 맞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물론 저도 이 사람이 급하고 유용합니다. 그러나 저쪽에 비할 바는 아니에요.

“전하….”

“…….”

“전하, 소, 소인은….”

그래, 어디 한 번 이야기해 보려무나.

저는 아무것도 급하지 않습니다. 그저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서 상궁까지 포함해 모두를 물리고서 독대를 하며 따뜻한 차를 여유롭게 마셨어요. 사실 저도 마냥 여유롭지는 않지만 그럴수록 더 여유로운 척해야 한다는 걸 압니다.

“소인은….”

상궁이 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달싹거렸습니다. 변명을 해야 할지 아니면 제 상황을 늘어놓아 저의 자비를 구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는 와중이라는 게 분명히 보였습니다. 저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그녀가 머리를 쾅쾅 바닥에 박기 시작했습니다.

쾅, 쾅, 쾅, 쾅.

소리가 커져 갔지만 저는 내버려 두었습니다. 이 협박 같은 짓에 짜증이 났지만 여기서 감정을 드러내면 안 된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몇 번 그 짓을 더 하던 상궁이 쾅, 하고 머리를 박더니 머리를 처박은 채 울기 시작했습니다.

“다 했느냐?”

연극 같은 짓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압니다. 이 상궁은 지금 무척 곤란한 상황입니다. 제게 돈을 받아 놓고선 보고를 숨겼어요. 물론 그 뒷감당은 스스로의 몫입니다.

그녀는 돈으로 매수되는 자가 아닙니다만 그녀에게는 정인이 있습니다. 좀 젊은 금위병이죠. 그는 상궁과 밀회를 거듭하며 그녀의 돈을 모조리 가져갔습니다. 도박을 하고 있거든요.

이런 걸 알아내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어린 궁녀들을 평소에 잘 관리해 두면 됩니다. 그 아이들은 그게 뭔지도 모르는 채로 미주알고주알 저에게 불거든요. 궁녀 아이들은 상궁마마와 친한 금위병이 있다고 했습니다. 아는 사람인 것 같다고만 했어요. 거기서부터 추적해서 그들이 무슨 사이인지 알아내는 건 제 몫입니다.

저는 태자비로 허송세월을 보낸 게 아니니까요.

“비전하….”

상궁이 금위병과 밀회를 했다?

당연히 사형감입니다. 곱게 죽지도 못 하죠.

“더 해 보려무나. 네 머리는 아직 멀쩡하지 않으냐.”

“…비, 비전하….”

“아주 깜찍한 짓거리인데, 도대체 어디서 배워 온 짓거리인지 알 수가 없군.”

혀를 차며 한마디 하자 상궁의 어깨가 좁아 들었습니다. 죽을 각오를 했으니 자기를 놓아 달라는 뜻이었겠지만 놓아줄 수 없습니다. 저는 뭐든 이용할 거니까요.

이럴 줄 몰랐나요? 그럴 리 없습니다. 이 황궁이 어떤 곳인데, 약점 하나라도 잡히면 바로 이용당하는 곳인데, 여기서 밀회를 한다고요? 간자로 삼아 달라고 동네방네 소문을 내는 격이죠. 그럼에도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것은 저쪽입니다. 심지어 그 금위병은 유부남입니다. 불륜입니다.

“그래. 찾아온 용건이 내 처소의 마룻바닥을 네 피로 더럽히겠다는 뜻은 아닐 거고.”

“…….”

“무엇이냐?”

금위병은 지금 도박장의 하수인들에게 붙잡혔습니다. 간단합니다. 제가 금위병의 도박 빚을 일부 갚아 주고 있었는데 그걸 갚아 주지 않겠다고 통보했기 때문이지요. 물론 그들은 저인 줄 모릅니다. 제 궁녀의 부친이 저를 대행하고 있으니까요. 그 본인도 저인 줄 모릅니다. 그저 딸의 부탁이라고만 여기고 있을 뿐입니다.

간자들은 늘 배신할 수 있기 때문에 언제나 모든 걸 줘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배신했을 때 숨통을 조일 수 있는 방도가 있어야 되지요. 상벌이 분명해야 합니다. 간자를 기르는 건 가축을 기르는 것과 같다고 어느 현인께서 말씀하셨죠. 저는 그 말에 동의합니다.

“소, 소인이 비전하께 벌을 청하러 왔을 뿐이옵니다.”

“놓아 달라는 뜻은 아니고?”

제가 고소를 머금으며 묻자 찢어진 이마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상궁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소인이 감히 그런 무엄한 청을 드리려 왔겠나이까!”

과연 황후마마의 지밀상궁입니다. 대범하기 이를 데 없기도 하거니와 안 될 것 같으니 바로 물러나는 모습 또한 일품입니다. 저는 이 상궁을 벌할 수가 없어요. 그녀는 아주 소중한 간자이면서 동시에 제 시어머니의 지밀상궁입니다. 그녀가 잘못되면 제가 간자를 붙였다는 걸 아시게 되고, 그럼 저는 진짜 호된 고초를 겪게 됩니다. 그건 빌미를 주는 일이니 할 수 없지요.

결국 간자를 사용한다는 건 서로 위험한 다리에 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

그녀는 위험한 다리에서 자신의 무모함을 보여 주려고 한 겁니다. 이마를 찢어서 이 판을 깨겠다고 선언한 거지요. 찢어진 이마를 보면 황후마마께옵서 의아해하실 거고 그럼 나와의 관계가 모조리 드러날 일이니까요. 서로 끝까지 가 보자는 식으로 나온 것이고 거기에 대해서 해 볼 테면 해 보라고 응수한 셈입니다.

그러니 그녀는 저를 시험한 셈이 되지요. 몸도 마음도 약한 데다 회임하여 더욱 약해졌을 저를 제멋대로 구슬려 보겠다는 심보였던 겁니다.

이걸 어찌해야 할까요. 매질이라도 해야 하나. 잠시 생각하다 거두었습니다. 저는 사람을 매질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호불호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저는 사람이 길게 고통받는 걸 보는 게 불편합니다.

“오늘은 이만하자꾸나.”

오늘은, 이라고 강조해서 말하자 상궁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습니다. 오늘은, 이라는 건 이 빚은 따로 달아 두겠다는 뜻이니까요. 그래도 어쨌거나 이번은 넘어가게 되었으니 상궁은 겨우 안심했습니다. 그녀는 서서히 고개를 들었습니다. 눈빛이 흐리던 아까와는 달리 매우 청명한 시선이었습니다. 그렇다는 건 고뇌는 끝났고 자신이 해야 할 몫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고해 보아라.”

제 말에 상궁이 입을 열었습니다.

“태자비 전하께 아뢰옵니다.”

반 시진 동안의 보고가 시작되었습니다.

황후마마의 지밀상궁을 내보내고 나서 답답함에 창문을 열었습니다. 날이 아직 쌀쌀하다며 궁녀들이 소란을 떨었지만 저는 그들을 내보내고 홀로 달을 바라봤어요. 달은 아름답고 서늘했습니다. 어딘가 태자 전하를 생각나게 하는 모습이었어요.

화용월태라. 꽃의 얼굴, 달의 자태. 대장부에게 붙일 미사어구는 아닌데 이상하게 태자 전하는 그 말이 잘 어울립니다. 그분은 아름다우시지만 여인 같지는 않으세요. 미장부시죠. 그런데도 그분의 얼굴은 어딘가 부드럽고 고와서 늘 아름답게 여겨집니다. 선남선녀, 라고 말할 때 선남이라는 말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분. 너무나 선하고 수려한 얼굴을 가지신 제 지아비.

그분의 출정은 황후마마의 청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애초에 그 전쟁은 태자 전하께서 나서실 만한 규모가 아니었어요. 그런데도 태자 전하께서 나서셨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에는 황후마마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선 제국은 천지신명의 보살핌을 받으며 하늘님을 숭상합니다. 황후마마는 세 장 꽃잎이시니 더욱 정진하셔야 하지요. 심씨 가문의 여인은 누구나 그렇지만 특히 꽃잎이나 불꽃으로 태어나면 신궁의 교육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왜인지 모르지만 황후마마께옵서는 봉황이 새겨져 있는 자신의 팔찌를 먼 곳에 있는 도사에게 보내셨습니다. 그 도사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요. 문제는 그 팔찌가 봉황이 새겨져 있어 황후마마의 물건이라는 게 분명할 뿐만 아니라 대대로 즉위식에 착용하는 아주 유서 깊은 물건이라는 것입니다.

그 물건은 보고에서 함부로 꺼낼 수 없는 것인데 황후마마께옵서는 장부에 기재하지 않고 몰래 꺼내어 도사에게 보내신 겁니다. 그리고 중간에 팔찌는 적군에게 약탈당했습니다. 황상께서 아시면 황후마마는 아주 곤란한 입장에서 놓이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러자 황후마마께옵서는 황상께 태자 전하의 출정을 청합니다. 명분은 태자 전하의 용맹함을 적에게 보여 주자는 것이었고 사실은 팔찌를 회수하기 위해서였죠. 황후마마의 흠은 태자 전하의 입지를 좁히는 것이니 전하는 황후마마의 부탁에 응했습니다. 그러면서 단 하나의 부탁을 하셨죠. 저의 안위를. 그리고 역모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여기서부터 이야기가 이상해집니다.

상궁이 제대로 알면서 지금 말을 최대한 아끼는 것인지 아니면 몰라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상궁의 말에 따르면 태자 전하께서 출정하시고 난 뒤 역모가 일어났는데, 황후마마께옵서 꽃잎의 탄생을 언급하시며 자신의 가문을 빼내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저를 역모 주동자 중 한 명으로 몰아 사형을 주장하셨고요. 도리어 저를 냉궁에 가둔 채로 두고 보려 하신 건 황상이셨습니다. 그러니까 역모자를 황상께서는 도리어 감싸 주셨고, 황후마마는 빨리 사형을 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신 거죠. 태자 전하께 제 안위를 부탁받으셨으면서요. 마치 태자 전하께서 돌아오시기 전에 제가 죽어 있어야 하는 것처럼. 그 건을 두고 몇 번이나 청을 올린 듯 한데 황상께옵서는 다섯 꽃잎을 사형시킬 수는 없다며 거절하셨다고 합니다. 물론 그러실 수 있지만 뭔가 이상합니다.

왜 황후마마께옵서는 제 사형을 그렇게 강력히 주장하신 걸까요. 태자 전하께옵서 돌아오셨을 때는 무척 초조해하셨다고 합니다.

조금만 더 생각하면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한데….

머리에서 생각이 아슬아슬하게 수면을 넘어오지 못합니다. 뭔가, 알 것 같기도 하면서….

“비전하, 비전하!”

서 상궁이 갑자기 들이닥쳤습니다. 그녀의 눈이 커다랗게 뜨여 있었어요.

“심상운 대감의 배가 해적에게 나포되었다고 하옵니다.”

심상운 대감은 황후마마의 오라버니입니다. 제 꿈에서 국공이 되셨던 분이죠. 제가 눈을 크게 뜨자 서 상궁이 빠르게 말을 이었습니다.

“선원들이 오늘 오후에 도착했는데 작은 배에 태워져 뭍으로 보내졌다고 하옵니다. 한데, 대감의 그 배가 엄청난 양의 향료를 싣고 있었는지라… 파산이라는 소문이….”

요즘 황도에서는 향료가 상당한 인기입니다. 특히 이국적인 향료일수록 그렇지요. 그래서 돈이 많은 사람들은 향료를 사서 큰 이득을 보고 있었습니다. 심상운 대감도 아마 그 사업에 끼어들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배가 통째로 나포된 것입니다.

동시에 그는 황후마마의 배경이기도 합니다. 황후마마의 돈줄은 심상운 대감에게서 나오는데 어찌하여 이런 일이…. 생각하다가 문득 태자 전하의 목소리가 떠올랐습니다.

“저는 협박도 경고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인지 아십니까?”

“…….”

“시시하니까요.”

저는 손을 들어 입을 막았습니다. 아니면 소리를 지를 것 같았어요. 왠지 모르게 확신이 들었습니다. 저 배를 나포하게 한 사람은 태자 전하시라고요. 그분이 모후께 검을 빼 드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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