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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중연 (37)화 (37/100)

37.

황후마마는 아무 말도 못 하신 채 가만히 서 계셨습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자 태자 전하께서 황후마마께 대답을 재촉하셨어요.

“모후.”

그 목소리는 아주 싸늘하고 무서워서 불린 사람이 제가 아닌데도 저도 모르게 어깨를 떨었습니다. 태자 전하께옵서 황후마마께 무슨 짓을 할 리는 없어요. 절대로. 알면서도 그 순간에는 태자 전하의 손이 황후마마의 목에 가 닿는 느낌이었어요. 그대로 졸라 버릴 것 같았습니다. 그 정도로 목소리는 아주 살벌했어요.

“태자.”

황후마마의 목소리가 한껏 누그러졌습니다. 화가 풀리신 게 아니라 아들의 화가 너무 커서 그 화를 먼저 달래야겠다는 생각이 드신 것 같았어요.

“이 어미는 그저 잠시 자리를 비운 것뿐입니다. 아무렴 내가 태자비를….”

“반 시진(한 시간)이나 말입니까?”

황후마마의 말씀을 태자 전하께서 차디차게 잘랐습니다. 저는 다른 의미로 놀랐어요. 태자 전하의 말씀은 황후전에 간자가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그걸 아예 노골적으로 드러내신 것이었어요. 반 시진이나 꿇어앉혔다고 누군가가 보고를 한 것이니까요. 아니나 다를까, 황후마마의 언성이 높아졌습니다.

“내게 간자라도 붙인 것이냐!”

어깨가 움찔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간자는 저도 붙였습니다. 황후전에는 제 간자도 있어요. 그리고 황후마마께옵서도 아예 모르시진 않으실 겁니다. 당연한 일이죠. 그분께서도 제 궁에 간자를 붙이셨을 텐데요. 우리는 서로에게 간자를 붙이며 사는 그런 족속들인 겁니다. 하지만 생활이 그러한 것과 말로 드러내는 것은 천지 차이입니다. 특히나 웃어른이신 경우 더하겠지요.

“모후께서는 제게 간자를 안 붙이셨다고 말씀하실 작정이십니까?”

“아무렴, 이 어미가 아들에게 간자를….”

“끌고 올까요?”

그 말에 뚝 대화가 끊겼습니다.

황후마마께서 붙이신 간자가 누군지 아니 끌고 와서 대조 신문을 해 볼까요, 라고 물어보는 태자 전하의 말씀에는 독 바른 가시가 날카롭게 서 있었습니다. 저도 그걸 느끼는데 황후마마께는 더욱 강렬하게 와닿겠지요.

“태자….”

“제가 동궁에 들어갔을 때부터 누가 언제부터 언제까지 간자였는지, 읊어 드릴까요?”

“그걸, 간자라고 합니까. 그저 아들이 어디 아픈 데는 없는지, 걱정하는 이 어미의 마음을 정녕 모르는 겁니까.”

황후마마의 목소리에 서운함이 깔렸습니다. 아주 정교한 거짓말이죠. 그러나 저런 걸 못 하면 이 황궁 생활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태자 전하께옵서 저를 단단히 잡고 계셨기 때문에 저는 무릎을 꿇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가능한 법도에 맞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하여 목소리밖에 들을 수 없었지만 그 목소리가 꾸며내는 말들이 얼마나 간교한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습니다.

모정 따위는 없는 곳.

저는 그래서 꿈속의 그 황후마마를 미워할 수가 없었어요. 유음 황녀를 사랑하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어색한 한편 좋아 보여서. 제가 아는 모정이란 이런 것이었기 때문에. 모정도 부정도 다 이런 것이라서.

권력은 정을 무정으로 만듭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죠. 문득 생각합니다. 태자 전하께서 저에게 주신 정은 어디서 온 걸까요. 모후도 부황도 주시지 않은 그 정을 태자 전하께옵서는 어디서 피워 내신 걸까요. 씨앗이 있어야 꽃이 필 텐데, 정이라는 꽃은 어느 근원에서 피어 제 팔 안 가득 피게 된 걸까요.

“이 아들 또한 모후를 염려하는 효심이었다는 걸 어찌하여 몰라주십니까?”

태자 전하께옵서 천연덕스럽게 물으셨습니다.

“뭐?”

황후마마께옵서 귀를 의심하시는 듯한 목소리로 되물으셨어요.

“늘 문안을 드릴 수는 없는 처지인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제 일정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받고 계시니. 그러나 아들이 된 자의 도리로서 어찌 어마마마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겠습니까. 하여 보고를 좀 받은 것이 무어 그리 잘못된 일이라 하십니까?”

“내 걱정을 했다…?”

“물론입니다.”

“그래서 네 비를 좀 꿇어앉혔다고 이렇게 바람같이 달려왔느냐?!”

황후마마께서는 가면을 집어 던지셨습니다. 그분은 더 이상 자애로운 척하실 생각이 없어 보이셨어요. 본인이 시작하신 말씀이시지만 아들이 같은 논리로 나오는 것에 무척 불쾌하신 듯 어디 해 보자는 듯이 노골적인 말씀을 꺼내셨습니다.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리시는 건 분명 노여움으로 인한 것이겠지요.

“상상도 못 한 일이 아닙니까.”

태자 전하께서 코웃음을 치시며 제 팔을 손가락으로 문지르셨어요. 저는 미약하게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러시지 말라고 말씀드리는 거였지만 그분은 아마 본 척도 안 하신 것 같습니다. 제가 고개를 들어 전하의 반응을 살피지는 못했지만요.

“회임을 하라고 그렇게 노래를 부르시더니 정작 회임을 해 온 기특한 태자비를 반 시진이나 꿇어앉히실 줄은. 말려 죽이려고 회임하라 하시는 줄 알았더라면 회임시키지 않았을 겁니다.”

강산을 이을 후계를 만드는 건 황상에게도 태자에게도 매우 중요한 임무입니다. 그것을 부정하는 말에 황후마마께서 고함을 지르셨습니다.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그러나 태자 전하는 아주 나직하게, 이를 가셨어요.

“다시는 문안 오라 하시지 마십시오. 이번에 제 비가 험한 일을 당했더라면 이렇게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협박하는 겁니까?”

“모후.”

태자 전하께서 픽 웃으셨어요. 눈에 보이지 않는데도 황후마마께옵서 흠칫하시는 기척이 느껴질 정도로 태자 전하의 목소리가 무시무시했습니다.

“저는 협박도 경고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인지 아십니까?”

“…….”

“시시하니까요.”

태자 전하께서 갑자기 저를 안아 올리셨어요. 황후전에서 저를 안아 올리시다니요!

“저, 전하!”

제가 깜짝 놀라 태자 전하를 외치다시피 불렀지만 그분은 들은 체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그분은 저를 달래듯 속삭이셨어요.

“조금만 참으세요. 곧 처소에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언제나 효자의 표상으로 불리던 분이 이렇게 황후마마께 이를 드러내실 줄은 몰랐습니다. 반 시진을 꿇어앉았었다고는 해도 별로 힘들지 않았어요. 다리가 좀 저리긴 했지만 저는 많이 훈련되어 있었습니다. 충분히 견딜 수 있었고 그걸 태자 전하께옵서도 잘 아실 텐데.

이미 안겨 있기까지 한 마당에 법도가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고개를 들어 태자 전하를 보니 그분의 얼굴은 무섭도록 굳어 있었습니다. 사람을 죽일 것 같은 얼굴이었어요. 그 얼굴로 그분은 황후마마를 똑바로 노려보고 계셨습니다. 슬쩍 황후마마를 바라보자 그분은 도리어 시선을 피하고 계시는 게 보였습니다. 황후마마께옵서 아드님이신 태자 전하의 시선을 감당하지 못하고 슬그머니 피하신 겁니다.

“불효자 같으니!”

황후마마께서 이를 가셨습니다. 그 말씀에 태자 전하께서 웃음을 터뜨리셨습니다.

“콩 심은 데 콩 나는 법이지요.”

“태자,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어쩌다 이리 변했습니까. 도대체, 왜, 이런…!”

태자 전하의 웃음이 뚝 그쳤습니다. 그분이 아주 고요한 얼굴로 말씀하셨어요.

“제가 출정할 때 단 한 가지만을 부탁드렸습니다, 모후. 기억나십니까.”

“그, 그건, 이 어미가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일이 아니었습니까. 저 아이가 역모를 저질렀는데 내가 도대체 어찌,”

“모후, 말장난하자는 게 아닙니다.”

태자 전하께옵서 말을 뚝 자르시더니 후, 하고 한숨을 쉬시고 다시 말을 이으셨어요.

“제가 그 역모의 일을 모른다고 생각지 마세요, 모후. 그 전모를 제가 아직도 파악하지 못하였다고 생각하시면 정녕 곤란합니다.”

“…태자….”

“그만하시죠. 제 비는 이런 이야기를 들을 이유가 없습니다.”

제가 모르는 일이 존재합니다….

저는 황후마마의 뒤에 있는 지밀상궁을 노려보았습니다. 제 간자는 그녀였어요. 저는 지밀상궁을 간자로 삼았습니다. 물론 돈만으로는 그녀를 간자로 삼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다른 방도를 취했었어요.

그녀는 저에게 보고를 숨겼습니다. 이번에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제 시선을 받은 지밀상궁이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저는 시선을 돌려 그녀를 외면했어요. 오래 쳐다보는 건 위험한 일이니까요.

태자 전하께옵서는 저를 안은 채 황후전을 뚜벅뚜벅 걸어 나오셨습니다.

“태자…!”

황후마마께서 애가 끓는 목소리로 태자 전하를 부르셨습니다. 분명 역모와 관련해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게 틀림없습니다. 황후마마께옵서 다급하게 태자 전하를 쫓아 나오셨지만 전하께옵서는 단호한 걸음걸이로 옥계를 걸어 내려오셨어요. 그분은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으셨습니다.

처소에 돌아오자마자 태의들이 대기하고 있는 게 보였습니다. 태의들은 제 다리에도 태아에도 이상이 없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태자 전하께옵서는 겨우 안심한 표정이 되셨어요. 그분을 그토록 걱정시킨 것에 대해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 되었습니다.

갑작스럽게 시간을 내셨기 때문에 태자 전하께옵서는 바로 돌아가셔야 했어요. 그분은 제 머리의 장식들을 하나씩 빼 주시기 시작하셨어요. 꽃 비녀 같은 것들이 침상 위에 한가득 쌓이는 동안 그분은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윽고 제 머리가 완전히 스르르 풀어진 다음에야 조금 웃으셨어요.

“힘드실 텐데 무리하시지 마세요.”

“무리하지 않았사옵니다.”

저는 태자비이고 당연한 의무를 행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전하께옵서는 그리 생각지 않으시는 듯 미간을 좁히셨어요.

“누가 괴롭히면 저를 부르시고요.”

“아무도 괴롭히지 않았사옵니다.”

“서혜야.”

늘 제 이름을 부를 때는 단 당과를 입에 머금은 아이 같은 얼굴이셨는데 오늘은 조금 쓴 약을 머금은 사람 같은 얼굴이 되셨어요. 제가 그분을 올려다보자 태자 전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당신의 지아비입니다. 부르세요.”

다소 명령조로 느껴지기까지 하는 말이었습니다.

“전하, 저는 정말 힘들지 않았나이다.”

“냉궁에 가실 때도 그러하셨겠지요.”

“…….”

“불러. …제발, 좀….”

태자 전하께옵서 속삭이셨어요. 많이 지친 목소리였어요. 제가 전하를 지치게 만든 걸까, 생각했습니다. 잘 모르겠어요. 잘하려고 하면 할수록 뭔가 잘 안 되는 걸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몸을 일으켰어요. 침상에 무릎을 꿇고 서서 앉아 계시는 태자 전하의 머리를 끌어안았어요. 그분은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거절하지 않으시리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제가 하는 일은 다 기껍게 받으시는 분이니까요.

“전하, 저는 전하를 부를 수 없사옵니다.”

“…….”

“하지만 최선을 다해 전하의 곁에 남을 것임을 약조 드리나이다.”

태자 전하의 팔이 제 허리를 안으셨어요. 그분은 가만가만 제 품 안에서 숨을 쉬셨어요. 겨우 숨을 쉴 수 있게 되신 것처럼요. 그제야 저는 그분이 정말로 걱정을 많이 하셨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전하께옵서는 제가 꿇어앉아 있다는 말에 정말 놀라고 걱정이 많이 되셨던 겁니다.

“약조로는 부족합니다….”

태자 전하께서 힘없이 웃으셨어요. 그분은 더 이상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첨사가 재촉하러 올 때까지 우리는 그렇게 끌어안고 있었습니다. 이렇게나 깊은 정으로 맺어져 있는데도 때때로 거리가 느껴지는 건 우리가 결국 다른 사람이라서 일까요. 연모지정이라는 걸 처음 겪는 저로서는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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