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몽중연 (36)화 (36/100)

36.

제가 회임했다는 소식은 온 황궁 안에 찬란히 퍼졌습니다. 일주일쯤 지나자 황도 전체에 퍼졌고요. 태자 전하께서 동궁의 문을 폐쇄하신 것도 더는 소용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모든 사람이 저를 보고 싶어 했으니까요. 위로는 황상부터 아래로는 관리의 부인들까지, 저를 만나고자 하는 이는 무척 많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저의 대외 활동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태자 전하께옵서는 내키지 않으시는 듯했어요. 제가 어른들께 아침 문안을 드리러 가기로 한 날의 아침, 저는 전하의 품에 안겨 있었습니다.

눈을 떠 보니 등 뒤에서 전하의 몸이 느껴졌어요. 전하의 팔을 벤 채 자고 있었던 거 같아요. 팔 하나는 제 머리 아래, 다른 팔은 제 허리 위에. 두꺼운 금금으로 저를 둘둘 마신 채 전하께서는 정작 아무것도 덮지 않고 주무시는 중이셨어요.

“전하.”

제가 금금을 풀어 그분께 덮어 드리려고 했지만 몸이 안겨 있어서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겨우 꼼지락거릴 뿐이었어요. 제 허리에 둘러져 있는 팔을 조심스럽게 누르면서 전하를 부르자 전하께옵서 제 목에 입을 맞추셨어요.

“예.”

그 목소리가 아주 선명했어요. 깨어 계셨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주무시다 깨셨어도 이런 목소리를 내셨겠지, 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이분은 늘 그러시니까요. 저와 주무실 때조차 바로 잠에서 깨시는, 옆에 검을 두고 주무셔야 안심하는 분이시니까요. 언제나 정신이 깨어날 준비가 되어 있으신 분. 저는 그분 쪽으로 돌아누웠어요. 제 움직임에 전하께옵서 팔을 들어 주셨어요.

“날이 추운데 어찌하여 이리 춥게 주무시나이까.”

제가 여쭙자 태자 전하께서 제 이마에 입을 맞추셨어요.

“별로 춥지 않습니다.”

“그래도….”

“태의가 따뜻하게 계셔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괜찮은데 태자 전하께서는 많이 걱정하시는 것 같았어요. 따뜻하게 있어야 한다고 하시는 말씀 뒤에 다른 걸 느끼고 쌀쌀한 바람에 흔들리는 물결처럼 마음이 흔들렸어요. 태자 전하는 저의 안위를 걱정하시는 거예요. 회임까지 한 제가 누군가에게 해코지를 당하지는 않을까 염려하시는 게 느껴졌습니다.

“따뜻하게 계십시오.”

안전하게 있으라는 말을 다르게 하시는 태자 전하의 품속에서 저는 나지막이 속삭였어요.

“반드시 지키겠나이다.”

제 태내에 있는 태아는 태자 전하의 피를 이어받은 아이. 저는 이 아이가 황위를 물려받지 않아도 동궁의 주인이 되지 않아도 좋아요. 하지만 아이는 반드시 살아서 나와 행복해져야 합니다. 조금 더 자유롭기를. 저와는 다르게 더 많은 행복을 맛보길.

저는 성장하는 내내 의무에 짓눌린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태자 전하께서 주시는 정을 알아볼 수 없었어요. 그런 정을 받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게 뭔지 알 만한 안목을 기르지도 못했지요.

제 아이는 그렇지 않기를. 많은 정을 받기를. 모정이든 부정이든 우애든 연정이든 간에요. 그러려면 살아서 태어나야 합니다. 그건 어미인 제 몫이지요.

“저는 당신이 가장 중요합니다.”

태자 전하께서 제 머리카락을 손가락빗으로 빗겨 주시며 말씀하셨어요. 제가 고개를 들자 그분과 시선이 닿았어요. 전하께옵서는 웃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그 눈은 저를 걱정스럽게 들여다보고 계셨어요.

“어느 때라도 무리하시지 마십시오.”

무리해야 하는 때입니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어요. 저를 이토록 걱정해 주시는 분께 그런 대답을 할 수는 없지요. 저를 이토록 아껴 주시는 분께 제가 어떻게 그렇게 대답할 수 있겠어요.

하지만 저는 무리하지 않겠다고도 대답할 수 없었어요. 저는 태아를 지켜야 하고 이분을 지켜야 합니다. 지킬 상대가 하나 더, 아니 둘이나 더 늘었지요. 태아를 지키려면 저 자신도 지켜야 하니까요. 저를 버린다는 선택지는 없어졌습니다. 이제 저는 저 자신을 지키면서 어떻게든 태자 전하께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서혜야.”

태자 전하께서는 초조하게 저를 부르셨어요. 제가 대답이 없는 게 불안하셨던 것 같습니다. 저는 고개를 들어 그분의 입술에 제 입술을 대었어요. 대답 대신이었어요. 무리하지 않겠다는 약조 같은 건 드릴 수 없으니까 대신에 입을 맞췄습니다. 제 마음을 다 드렸어요. 약조 대신에.

태자 전하께서 서혜야, 라고 저를 한 번 더 부르려 하셨어요. 그분은 제게 대체로 존대를 하시지만 부를 때만은 서혜라고 부르는 걸 좋아하셨어요. 제 이름을 입에 담을 때 그분은 마치 달콤한 걸 입에 머금은 아이 같은 얼굴을 하세요. 그 얼굴에 제 마음이 녹아나는 걸 전하께서는 아실까요. 아마 모르시겠죠.

저는 전하의 입술에 제 입술을 한 번 더 댔습니다. 그러자 태자 전하의 목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어요. 완고한 팔이 제 허리를 잡아채는 게 느껴졌어요. 태자 전하의 입술이 제 입술을 집어삼켰습니다. 안쪽을 빠짐없이 훑으면서 제 목을 잡아 당신 쪽으로 누르셨어요. 응. 제 입에서 신음이 새자 조금 웃으셨습니다.

눈을 감으면 어느 물 위의 전각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세상에 단둘이 있는 곳에 있는 그런 기분이.

“황후마마께 문안 올리옵니다.”

법도에 따라 절을 하는데 일어나라는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무릎을 꿇은 채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황후마마께옵서 노여워하시리라는 건 올 때부터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모로 노여우실 게 틀림없었어요.

일단 제가 태자비의 자리에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문제입니다. 제가 태자비라는 건 태자 전하의 입지에 아주 커다란 흠이 됩니다. 그리고 제가 역적으로서 제거되었다면 이 역모 사건은 그것으로서 마무리가 지어졌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남았고 따라서 이 역모 사건은 마무리가 지어지지 않았습니다. 그건 즉 언제든지 황후마마의 집안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게다가 제가 회임까지 하였으니 황상께옵서 언제 마음을 돌리시어 제가 아닌 황후마마의 집안을 배척하려고 드실지는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애초에 황상께서 제거하려 하신 건 저희 집안이 아닙니다. 황후마마의 배경이지요. 단지 저희 집안이 황후마마의 큰 배경이 되기 때문에 제거되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저 또한 황후마마께는 빚이 있습니다. 제 집안이 몰락하는 동안 그분은 살아남으셨습니다. 아직 태아에 불과한 꽃잎을 바치시고요. 구족을 멸할 사건에서 자신의 집안을 빼내려면 철저한 배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분은 누구보다 먼저 앞장서서 저희 집안사람들을 해하셨을 게 분명합니다. 무엇이든 이용하셨겠지요. 집안만 살릴 수 있다면요.

저는 그 마음을 탓하지 않습니다. 저 또한 태자 전하를 구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했을 테니까요. 하지만 우리가 대척점에 선 건 사실이지요.

“뻔뻔하기가 이를 데 없구나.”

황후마마께서 혀를 차시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저는 순종적으로 고개를 더 낮췄습니다.

“역모에 가담한 것으로 모자라 회임을 해? 세상 이리 뻔뻔할 데가 있나.”

“…….”

“여봐라, 저년을 당장…!”

황후마마께서 찻잔을 집어 던지셨어요. 찻잔이 머리에 부딪치면서 찻물도 조금 쏟아졌습니다. 많이는 아니었어요. 이미 날아오면서 찻물이 떨어졌으니까요.

“마마.”

서둘러 지밀상궁이 황후마마를 달래는 게 들렸습니다. 그 목소리에는 당혹감이 가득했어요.

“고정하시옵소서.”

“내 어찌 고정을 한단 말이냐?!”

“마마…!”

지밀상궁이 뭐라고 황후마마의 귓가에 소곤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뭐라고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씨근거리던 황후마마의 숨소리가 잦아들었어요. 그분은 화가 많이 나신 것 같았지만 저에게 화를 낼 수는 없다고 판단하신 듯싶었습니다. 아마도 지밀상궁은 뭔가 황후마마께옵서 무시하실 수 없는 부분을 말씀드린 것 같았어요.

“꼴도 보기 싫다.”

쾅 소리를 내신 황후마마께옵서 자리를 뜨시는 게 들렸습니다. 곤란해졌습니다. 저는 그분이 허하실 때까지 일어날 수가 없어요. 그걸 아시면서 황후마마께옵서는 지금 심술을 부리시는 겁니다.

제 몸이야 버티면 되는 것이지만 제 배 속에는 태아가 있습니다. 버텨 줄까요?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생각해 봅니다. 제가 회임했다는 사실을 아는 궁녀들이 초조하게 제 앞으로 화로를 가져다 놓았습니다. 혹여나 찬 마루에 앉아 있다 태아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 대가는 누가 치르게 될까요? 황후마마는 아니실 겁니다. 분명 죄 없는 아랫사람 몇몇이 고초를 치르게 되겠지요.

“비전하, 잠시 무릎을 펴시와요. 저희가 망을 보겠사옵니다.”

궁녀가 소곤거렸습니다. 제가, 아니 자신의 앞날이 걱정되어 견딜 수가 없는 듯했어요. 저는 피식 웃었습니다. 아직 저는 입덧도 하고 있지 않고 배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어릴 때 몇 시진이고 돌바닥에 무릎을 꿇은 적도 있습니다. 저에겐 어려운 일이 아니었어요.

“도리가 아닌 말을 입에 담으면 아니 되지.”

제 말에 궁녀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어요. 그 얼굴을 보고 조금 웃음이 나왔습니다.

“마음은 고맙구나.”

“비전하….”

“하나 내 걱정을 할 것 없….”

쾅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습니다. 궁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어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듯했습니다. 자신이 한 일이 들통나 황후마마께 끌려갈 생각에 궁녀는 달달 떨면서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저는 고개를 숙였고요. 고개를 들라는 허락을 받지 못했으니까요. 그런데 궁녀의 떨림이 더 심해지는 게 심상찮아 보였습니다. 제 옆에 앉은 궁녀가 사시나무 떨 듯 떨면서 중얼거렸습니다.

“저, 저, 전하….”

전하?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 뻔하였습니다. 간신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누군가가 제 팔을 잡아 일으키셨어요. 고개를 들자 태자 전하가 서 계셨습니다.

“전하?”

하루의 일정이 몹시 촘촘하게 계획되어 계신 분인데 어찌하여 여길….

제가 멍한 얼굴로 그분을 바라보거나 말거나 그분은 무척 노여움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계셨어요. 무섭도록 굳은 얼굴로 저를 붙잡고 계신 바람에 제가 아, 하고 신음하자 태자 전하의 얼굴에서 아예 표정이라는 게 사라져 버렸습니다.

“어디가 아프십니까?”

“아, 아니, 아니옵니다.”

다리가 저린 상태에서 갑자기 일어나는 바람에 아팠지만 저는 이 상황에서 다리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는 눈치 정도는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 황후마마와 대적하는 건 좋지 않습니다. 가뜩이나 적대 관계신데 미운털이 더 박혀서야 되겠습니까.

저는 고개를 저었지만 태자 전하는 조금도 믿는 얼굴이 아니셨어요. 그분은 제 다리를 잡아 누르셨습니다. 그 순간 악, 하는 비명이 흘러나왔어요. 서둘러 입을 스스로 막았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뭐 하는 짓입니까?!”

뒤늦게 불청객의 존재를 알아채신 황후마마께서 들이닥치셨습니다. 그분은 무척 화가 나신 얼굴이셨어요. 제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려고 했지만 태자 전하께서는 저를 단단히 잡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개를 숙이는 것 외에는 할 수 없었어요.

“모후.”

태자 전하가 이를 가는 듯이 음산한 목소리로 황후마마를 불렀습니다.

“뭐, 뭡니까?”

“저는 모후께서 무슨 일을 하시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

“그건 모후께서 이 아들을, 무척 아끼신다고 믿었기 때문이지요.”

“다, 당연하지요.”

“제 비가, 그것도 회임한 제 비가, 이 수난을 겪고 있는데…. 험한 일이라도 겪으면 어찌하실 요량으로 이런 꾸지람을 내리셨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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