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서연각에 머무른 지 이 주쯤 된 어느 날, 월아가 착의 시중을 들며 제 옷자락에 서신을 넣어 주었습니다. 저는 모두가 사라질 때까지 그 서신을 꺼내지 않았어요. 평소와 똑같이 아침나절을 궁녀들과 보내고 그녀들이 탄 배가 제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다음에야 서신을 꺼내 들었습니다.
저는 월아에게 부탁을 해 놨었어요. 황궁의 동향에 대해 알려 달라고 했는데 현재 상황을 제대로 알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서 상궁에게 부탁을 할까, 월아에게 할까, 좀 고민했었어요.
굳이 월아에게 했던 것은 서 상궁이 누구의 압력을 받고 있을지 확실하지 않아서예요. 태자 전하나 황제 폐하, 황후마마 등 서 상궁에게 압력을 가할 사람이 너무 많았어요. 차라리 제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서 상궁에게 더 나을 것 같았습니다.
월아의 서신을 보면서 저는 대충 황궁의 상황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일단 저는 공식적으로 역적이 된 건 아니었습니다. 제가 정말 역적이었다면 냉궁에 가는 것으로 끝났을 리가 없지요. 저는 비공식적으로 역적이었을 뿐 공식적으로는 역적의 딸 정도의 위치였습니다.
아마 이건 전설의 다섯 꽃잎이 역적이라는 건 하늘의 뜻이 현재의 황제와 태자를 원치 않는다는 식으로 민심이 호도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차단하신 것 같았습니다. 즉 저는 현재 공식적인 명분은 없는 셈이 됩니다. 이건 중요합니다. 언제나 명분과 대의의 싸움이니까요.
둘째, 운왕 전하의 상황이 나빠진 건 운왕비 전하의 일만이 아닙니다. 그전부터 운왕 전하의 사정은 좋지 않았어요. 운왕부에 불이 나기도 했고 공물을 산적에게 강탈당하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로 운수 나쁜 일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운왕 전하께서 거금을 투자하셨던 사업들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면서 큰 빚도 지시게 된 거 같아요.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이제 친왕이라는 직책만으로는 부족해지신 것 같습니다.
머리가 복잡하지 않게 굴러갔어요.
태자 전하께옵서는 황제 폐하를 제외하시면 이 제국 제일의 부자이실 겁니다. 복잡한 상속 문제가 걸려 있는데 황후마마의 할머니, 그러니까 태자 전하께는 외증조모님되시는 분께서 태자 전하께 모든 재산을 넘기시면서 태자 전하의 개인 재산이 엄청나게 증식해 버렸습니다. 무척 장수하셨던 외증조모님께서는 자식들을 먼저 보내셨고, 그 상태에서 손주들이 당신의 먼저 간 자식들에게 어떤 도리로 제사를 지내는지 등을 보셨습니다.
다들 도리를 지키셨지만 아마 그분 마음에는 안 차신 거 같아요. 그리고 마음에 차신 분은 단 한 분, 태자 전하셨던 듯합니다. 그래서 외증조모님께서는 태자 전하께 모든 재산을 넘기셨는데, 이 외증조모님께서 대륙 최대의 거상으로 알려지신 분이라 태자 전하께서는 어마어마한 상단을 물려받으시게 된 거죠. 태자 전하께서는 황궁에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본인의 개인 재산이 아닌 동궁의 재산으로 상단을 돌리셨고요.
운왕 전하의 상황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은 동궁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그럼 대륙 최대의 상단이 운왕 전하의 것이 되니까요.
셋째, 혜비마마께옵서 병석에서 일어나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운왕 전하의 일로 석고대죄를 계속 고집하시던 혜비마마께옵서는 결국 병을 얻어 쓰러지시고 말았는데 근래에 쾌차하셨다는 소식이 적혀 있었습니다. 병석에서 일어나시자마자 운왕 전하의 일로 또 폐하께 청을 올렸는데 늘 혜비마마를 가련하게 여기시던 황상께옵서 이번에는 괘씸하게 여기셔서 금족령을 내리셨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괘씸하게 여겼다? 아니, 또 석고대죄를 청할까 봐 걱정되신 것이겠지요.
꽃잎이 태어날 예정이고 그 꽃잎이 운왕 전하의 정혼녀가 된다는 건 아직 아랫사람들에게는 퍼져 나가지 않은 모양입니다.
“살아야 부귀도 영화도 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산다는 건 숨을 쉰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지요. 사람에게는 살아가는 데 있어 불가결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인의든 도리든 뭐든…. 사람은 그래서 사람이고, 저 또한 제가 필요로 하는 것이 있어 그것이 없다면 인간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저는 짐승으로 살 수는 없습니다. 그건 너무나… 지옥입니다.”
언젠가 전하께옵서 하셨던 말씀이 떠오릅니다.
“차라리 죽으라고 하세요. 그게 덜 지옥이니까.”
서연각에서도 지옥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지요. 그분이 지옥을 입에 담으신 적은 그때 두 번뿐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분의 마음이 진심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저를 안고 가실 요량이시라면 저는 이제 마음을 달리 먹어야 합니다. 저는 태자 전하께옵서 행복하시길 바라는 것이지 그분을 지옥에 밀어 넣고 싶은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하아,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쉬어 봅니다. 물 냄새가 제 코와 입으로 들어왔어요. 물 위에 있는 전각이라 늘 물 냄새가 떠돕니다. 그건 마치 제가 세상의 끝에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을 하게 해요.
저는 노력해야 합니다. 완벽한 태자비, 그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전하께옵서 정녕 황상과 황후마마를 모두 적으로 돌리실 거라면 우리는 이겨야 합니다. 지면 낭떠러지밖에 없으니까요. 저는 떨어져도 돼요. 어차피 제 목숨은 그저 조금 늘어났었던 것에 불과하니까요. 그러나 태자 전하는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황제 폐하, 황후마마, 혜비마마.
당금 황궁의 가장 강한 세 명의 권력자를 적으로 돌리고 어찌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제가 아는 걸 총동원해서 생각해 봐야겠어요. 제가 아는 저분들의 약점이 무엇일지. 그게 도움이 될지.
그리고 고모님. 고모님도 쉽게 포기하실 분이 아니니 잘 달래 보아야겠지요. 그리고 가능하다면 고모님의 도움도 좀 받고요. 저는 지금 손을 가릴 처지가 못 되니까요.
일단 조금 누워서 복잡한 머릿속을 비워 봐야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생각을 해 보지요.
꿈?
금세 꿈이라는 걸 알 수 있었어요. 아니 꿈이라기보다는 가위에 눌린 것 같았습니다. 눈을 감고 있는데 여러 사람이 저를 둘러싸고 있는 게 느껴졌어요. 벌써 아침일까요. 눈을 감은 채 생각에 빠졌어요. 곧 그럴 리가 없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태자 전하께서 돌아오시지도 않았었는데 궁녀들이 돌아올 정도의 아침 시간이 되다니 그럴 리가요.
“나는 반대야. 아직 어리다고.”
저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 중 누군가가 말했어요. 아주 탐탁잖은 목소리였습니다.
“스물한 살인데 어리긴 뭐가 어려. 적당해.”
다른 사람이 코웃음을 쳤어요. 그는 적당하다고 말했지만 걱정스러운 것 같았어요. 목소리에 염려가 묻어져 나오는 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스물한 살? 그건 제 나이인데 그럼 저를 두고 이야기하는 건가요?
“상황이 별로 좋지 않은데.”
또 다른 사람이 중얼거렸습니다. 내키지 않는 태도였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어. 지금 이 상황을 헤쳐 나가야 돼.”
“꼭 그런 방법만 있는 건 아니잖아.”
“이제 우리에겐 이 아이밖에 없어.”
“거짓을 말하면 안 되지. 우리에겐 아직도 꽤 많은 아이가 존재해.”
갑자기 침묵이 감돌았어요. 이윽고 처음 반대라고 말했던 사람이 입을 열었습니다.
“이 아이가 아니면 안 되지.”
누군가가 제 머리카락을 쓰다듬었어요. 그 손길은 아주 조심스러웠어요. 뭔가 목소리들이 멀어졌어요. 소란스러운 목소리들이 더 많아졌는데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소리들은 마치 먼지구름처럼 뭉게뭉게 일었다가 사라졌어요.
그리고 어떤 아이가 서 있었어요. 바람이 부는 초원이었어요. 복사나무가 여러 그루 서 있는 풀밭 위에 어떤 아이가 서서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목소리는 알아들을 수 없었어요.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이는 가만히 저를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이윽고 아이는 제게 다가와 입을 벙긋거렸어요. 하지만 사이에 보이지 않는 두꺼운 벽이 있는 것처럼 아이의 목소리는 제게 닿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제게 손을 내밀었어요. 저는 조금 망설이다 그 손을 잡았습니다. 평소의 저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이었어요. 아이든 어른이든 저는 늘 경계하라고 배웠으니까요. 하지만 그 손은 너무 하얗고 보들보들해 보였어요.
무엇보다 아이는 왠지 태자 전하를 생각나게 하는 구석이 있었어요. 잘 차려입은 옷, 하얀 피부, 우아한 이목구비, 다 그렇긴 하지만 눈이 특히 그랬습니다. 사람을 직시하는 고요한 눈이 그분을 생각나게 했어요.
손을 잡자 손이 말랑말랑했어요. 제 손을 잡은 아이가 환하게 웃더니 저를 복사나무로 데려갔어요. 입을 벙긋거리는 아이의 말을 들을 수는 없었지만 복사나무는 적당한 높이에 복숭아가 달려 있었어요. 아이는 저를 올려다봤어요. 어떻게 하고 싶으냐는 듯이. 저는 아이에게 복숭아를 가리켰어요.
이게 갖고 싶으니?
제 목소리도 제 입을 통해 나오지 않았어요. 그저 입만 벙긋거려질 뿐이었어요. 다시 말해 보려고 했지만 여전히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어요. 뭔가 잘못된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무섭거나 당혹스럽진 않았어요.
바람이 제 머리카락을 흔들고 있었어요. 누군가가 만져 주는 것처럼 기분이 좋았습니다. 아아, 저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그 바람을 맞다가 손을 잡아당겨져 고개를 내렸습니다. 아이가 저를 바라보고 있었어요. 입을 벙긋거렸어요. 아이는 천상의 아이처럼 웃으며 눈짓으로 복사나무를 가리켰어요. 그리고 다른 복사나무들도 한 번 둘러보았어요. 그중에서 하나 고르라는 것처럼요.
저는 망설이다 아이를 안아 올렸어요. 아이는 깃털처럼 가벼웠어요. 아이를 안는 일은 저에게 몹시 드문 일이라 어색했는데도 아이는 마치 저에게 안기는 게 익숙한 것처럼 착 달라붙었어요. 안는 게 하나도 어렵지 않았습니다.
아이를 복숭아 근처에다 올려 주었는데도 아이는 도리질만 칠 뿐이었어요. 싫다는 듯이 저에게 더 파고들었어요. 이상하게도 아이의 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아이는 본인이 복숭아를 따기를 원하는 게 아니라 제가 하나를 골라 따서 주기를 원하는 듯했어요. 그리고 그건, 왠지는 모르지만, 아주 예쁜 복숭아여야 할 것 같았습니다.
아이를 안고 돌아다니며 복숭아를 구경했어요. 다 비슷하게 예쁜 복숭아였습니다. 소담하고 좋은 냄새가 나는, 이를 데 없이 어여쁜 복숭아 사이에서 하나의 복숭아를 보게 되었어요. 그 복숭아는 조금 작았고 아직 풋내가 나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아주 어여뻤고 무엇보다 반짝반짝 빛이 났어요.
이거 할까?
아이에게 물어보자 아이가 눈을 빛내며 저를 바라봤어요. 제가 그 복숭아를 고른 게 무척 기쁜 것처럼요. 저는 복숭아를 따다 아이에게 건네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몸을 바둥거렸어요. 내려 달라는 것 같아 내려 주자 아이가 복숭아를 양손으로 품 안에 폭 끌어안았어요.
벙긋, 벙긋.
아이가 입을 우물거렸는데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제가 알아들은 것처럼 생긋 웃더니 하늘 높이 손을 들었어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자 하늘 위로 구름이 보였습니다. 아까 어떤 하늘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요. 맑았던가, 흐렸던가. 하늘은 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지금 하늘은 비가 올 것처럼 어두워져 있었어요.
우르르릉.
하늘이 으르렁거렸습니다. 천둥이 칠 것 같았어요. 아이를 안고 어디론가 피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이는 도리어 뭔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윽고 하늘이 번쩍했습니다. 제가 아이에게 손을 뻗으려는 찰나 아이가 아, 하고 반가워했어요. 왜 반가워하는 건지 몰라 저도 아이의 시선을 따라 하늘을 돌아봤습니다.
용이었어요.
용이 하늘에서 요동치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용은 허공에 뜬 채로 아이에게 앞발을 내밀었어요. 아이는 용에게 잡혀가면서도 기분 좋게 웃고 있었어요. 아니, 그건 잡혀가는 게 아니었어요. 용은 아이를 데리러 온 것이었어요. 그 증거로 용은 아이를 자신의 등에 태웠습니다. 아이는 많이 타 본 것처럼 용을 탄 채 한 손으로는 용의 목을 감싸고 한 손으로는 복숭아를 품에 안았습니다.
그렇게 아이는 떠나가고 있었어요.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손을 뻗었어요. 할 말은 없었어요. 하지만 아이에게 뭔가를 말하고 싶었어요. 떠나지 말라고, 여기에 있으라고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상실감이 컸습니다. 마음 한쪽이 떨어져 나간 것처럼 아프고 스산했어요. 가지 마.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어요.
가지 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가지 마.
아무리 노력해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가지 마!!”
벌떡 일어나자 보인 사람은 태자 전하였습니다. 제 머리를 만져 주고 계시던 그분은 놀라신 듯 눈을 조금 크게 뜨고 계셨습니다. 제 얼굴을 보신 그분이 이윽고 제 뺨에 자신의 손을 대셨어요.
“가지 마?”
이분께 하는 말이 아니었어요. 전혀 아니었었는데도 그분을 보자마자 저는 고개를 서둘러 끄덕였습니다. 가지 않았으면 했어요. 남겨지지 않았으면 했어요.
맞아요, 저는 괜찮은 척했지만 사실은 한 번도 괜찮은 적이 없어요. 역적의 딸이 되었을 때도, 냉궁에 남겨졌을 때도. 한 번도 괜찮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께서 제 이름을 빌려 혹은 태자 전하의 이름을 빌려 무엄한 일을 하실 때도 그 전에 태자 전하의 정혼녀가 되었을 때도 저는 한 번도 괜찮지 않았어요. 제 인생이 화려한 가시밭길로 끌려가는 동안 저는 숨도 한 번 제대로 못 쉬었고 손짓 한 번 맘 놓고 할 수 없었습니다.
“네, 가지 마셔요.”
제 가지 말라는 말에 태자 전하는 눈을 더 크게 뜨셨어요. 이윽고 그분은 세상을 다 가진 듯이 웃으셨습니다. 그리고 제게 달려드셨어요. 입맞춤은 갈급하였습니다. 목마른 자가 겨우 물을 맛보듯이, 물속에 있었던 자가 겨우 숨을 쉬듯이 그토록 다급하였어요. 저는 그 입맞춤에 열렬히 응했습니다. 저 또한 그 물이, 그 숨이, 너무나 기꺼웠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