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몽중연 (33)화 (33/100)

33.

저는 서연각이라는 곳에 갇혔습니다.

그곳은 동궁 소현지라는 연못 한중간에 있는 작은 처소였어요. 이런 데가 있는 줄도 몰랐던 이유는 딱히 동궁에 있는 후궁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태자 전하께서는 후궁을 들이지 않으셨고 그러니 저 또한 관리할 후궁이 없었으므로 후궁의 건물 하나하나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터였죠.

동궁에 들어온 직후, 옛날 어느 황제 폐하께서 태자 시절 홀로 계시고 싶으실 때를 위해 후궁의 연못 중간에 작은 전각을 하나 세웠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는 기억이 어렴풋이 났습니다. 그게 서연각이었나 봅니다.

후궁 안에 있는 전각인데도 여인의 취향에 맞춰진 곳은 아니었습니다. 책이 많았고 서안과 침상 그리고 탁자와 의자 정도만 있는 곳이었습니다. 전각까지는 배를 띄워 와야 했습니다.

“비, 비전하만 여기 남으신다고요?”

서연각에 온 첫날, 제가 도착하자마자 미리 도착해서 서연각을 단장하고 있었던 제 궁녀들에게 서연각을 떠나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당황한 서 상궁이 몇 번이나 이 명령이 확실하냐고 병사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 명령은 확실한 것이었고 결국 모두가 저만 남겨 두고 서연각에서 떠나야 했습니다. 저는 연못 한중간에 있는 전각에 남겨졌어요. 냉궁 시절에 비하면 꽤 호사스러운 도시락과 함께요. 한사코 떠나지 못하며 뒤를 돌아보는 서 상궁과 궁녀들을 보내 놓고서 저는 서안 앞에 앉아 생각에 잠겼습니다.

지금 상황을 냉궁에 비교하면 말이 안 되는 것이긴 해요. 그때에 비하면 비교가 안 되게 호사스러우니까요. 그러나 아무도 없는 것은 그때와 같았습니다. 그때보다 더 고립된 기분마저 느껴졌어요. 그때는 문밖에 누군가가 존재했지만 여기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전각은 연못 한중간에 떠 있고 전각 밖으로는 조금도 나갈 수 없었으니까요.

할 일이 없어서 전각 안을 돌아다녔습니다. 작은 전각을 여러 번 거닐다 보니 천천히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였어요. 진주로 된 주렴 밑을 지나다 문득 쪼그리고 앉았습니다. 문틀에 무언가가 새겨져 있었어요.

심서혜.

제 이름이 거기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칼로 새긴 그 이름은 어린아이가 새긴 것처럼 삐뚤빼뚤했어요. 아마 아이가 새긴 게 맞을 겁니다. 어른이 굳이 이렇게 낮은 곳에 새길 리는 없으니까요. 그리고 어른은 문틀 같은 데 이름을 새기는 짓을 하지 않지요. 그러니 어린아이가 한 게 맞다면 그 어린아이는 분명….

저는 쪼그리고 앉은 채로 고개를 들어 서연각 내부를 바라보았어요. 서연각은 상당히 호화로운 전각이었습니다. 규모는 작아도 있을 건 다 있는 곳이었어요. 이런 데서 어린 태자 전하께서 무엇을 하셨던 것이었을까요? 이 전각을 세우셨던 옛 선조처럼, 태자 전하께서도 홀로 편안히 계시고 싶으실 때 이곳에 계셨던 것일까요.

이렇게 낮은 곳에 제 이름을 새기실 때, 그분은 몇 살이셨을까요. 제 이름을 여기에 왜 새기셨을까요. 무슨 마음으로.

정이연.

저는 그 이름을 어디에도 써 본 적이 없습니다. 그 이름을 쓴다는 건 아주… 불경한 거죠. 하지만 제가 쓰지 않은 건 그게 무엄해서는 아니에요. 애초에 관례를 치른 대장부의 이름을 쓰는 경우는 별로 없으니까요. 대부분 자(字, 본 이름 외에 부르는 이름)를 부르죠. 특히 전하의 경우에는 직위가 있으신 만큼 아무도 그분의 이름도 자도 입에 담지 않습니다.

정이연이라는 남자 앞에 서 있다고 느낀 적이 있었지요. 그분은 종종 저를 보통의 여인 대하듯 하셨습니다. 마치 당신께서 보통의 사내인 것처럼요. 우리의 어깨에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은 것처럼 말씀하셔서 저는 그 달콤함에 속아 넘어갔습니다. 그건 얼마나 다정한 거짓이었는지요.

역적인 여자를 동궁 안에 품고서.

황제 폐하와 황후마마를, 세상을 모두 적으로 돌리고서.

그분은 그러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셨던 겁니다.

머리가 지끈거려서 바닥에 주저앉았어요. 제 이름이 새겨진 반대쪽 문틀에 등을 기대고 앉아 새겨진 제 이름을 바라봅니다. 제 연정은 당신의 연정과 사뭇 다르다던 말씀, 차라리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하시던 그 목소리가 떠오릅니다. 그분은 상처받으셨어요.

이상한 일이죠. 제가 그분을 구하려고 할 때마다, 그러기 위해 모든 것을 걸 때마다 그분은 구명받는 게 아니라 상처받으시는 것 같습니다. 제가 그분을 불길에서 구해 냈을 때도 그분은 무척 괴로워하셨지요. 왜 부르지 않았느냐고, 구하러 오지 않을 줄 알았느냐고 물으실 때 그분의 표정이 기억납니다.

잘하려고 노력할수록 왜 어긋나는 걸까요.

손을 뻗어 심서혜, 라고 새겨져 있는 부분을 어루만졌어요. 생각보다 깊게 파여 있었어요. 아주 힘주어 파셨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심서혜. 그 이름을 여기에 왜 새겨 놓으신 걸까요. 무슨 마음으로.

그저 정혼녀의 이름을 여기에 새겨 두신 거에 불과한 걸까요. 아니면 의미가 있는 걸까요.

찰랑, 물소리가 들렸습니다. 물고기가 물속에서 튀어 오르는 것 같은 소리였어요. 고개를 돌리자 문이 열리는 게 보였어요. 전하께서 들어오시고 계셨습니다. 이상한 건 뒤에 아무도 따르고 있지 않다는 거였어요. 아무도 전하를 보필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제가 의아한 눈으로 전하의 뒤를 바라보자 전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배가 귀찮아서 물을 건너왔습니다. 어차피 이곳은 고립되어 있으니 호위까지 받지 않아도 됩니다.”

몸을 일으켜서 법도대로 절을 하는데 태자 전하께옵서 저를 끌어안으셨어요. 밖에서 묻은 냉기가 느껴졌습니다. 태자 전하를 화로 근처로 모셔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분은 움직이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그저 저를 끌어안은 채로 잠시 말을 잇지 못하셨어요. 이윽고 하문하셨습니다.

“제가 미우십니까.”

그 질문에 대답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태자 전하께옵서는 제 옷을 끌어 내리셨어요. 어깨가 드러났습니다. 전각 안은 따뜻했지만 태자 전하의 손은 차가웠습니다. 차가움에 어깨가 떨렸어요.

“여기에 가둬서.”

역시 갇힌 거였구나.

그런 거라고는 생각은 했는데 태자 전하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머릿속이 새하얘졌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졌어요. 동궁에서 나가야 한다는 제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역적의 딸도 아닌 역적을 지어미로 두고 황위에 오를 수는 없어요.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빨리 일을 진행해야 해요. 저는 태자 전하의 인생에서 빠르게 사라져야 합니다. 저는 오점밖에 되지 않아요. 고모님은 제가 가문의 원한을 갚아야 한다고 말씀하시지만 저는 차라리 지옥에 떨어지는 걸 선택하겠습니다. 죽어서 가문의 조상들께 엎드려 빌게요. 어떤 벌이라도 받겠습니다. 하지만 이승에서 전하께 폐를 끼칠 수는 없어요.

그런데.

“이젠 저에게 마음이 없으십니까.”

목소리가 음울했어요. 왜 그렇게 말씀하시는지 알 수가 없어서 저는 손을 들어 그분의 귓가를 어루만졌어요. 제 손이 닿자 전하의 길고 큰 눈가가 파르르 떨렸어요.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제가 냉궁에 가면 냉궁에 같이 가시겠다는, 제가 역적이니 같이 역적이 되시겠다는 분을 어떻게 제가 연모하지 않을 수 있죠. 이런 연정을 받는 사람이 또 있을까요. 저는 본 적이 없어요. 이런 전설에서나 나올 것 같은 연모지정. 저는 한 번도 감히 탐해 본 적도 없었어요.

제가 뭐라고.

제가 도대체 뭐라고.

다섯 꽃잎이라는 게 도대체 뭐가 좋은 건지 모르겠어요. 저는 그 덕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태자 전하께도 그 덕을 보게 해 드린 적이 없죠. 제가 생산한 황자는 위대한 황제가 된다고요? 3년이 넘도록 부부지간이었는데도 임신도 안 되었는데, 회임을 한 적이 없어요. 아이가 생겨야 낳죠.

아무 도움도 된 적이 없어요. 그저 흠이었을 뿐인데 어찌하여 이토록 깊은 정을 주시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여기는 제가 모르는 곳이니까.”

울면 안 되는데. 사실은 패악이라도 부려서 이분이 질리게 해야 하는데. 눈물이 흘러나왔어요. 눈을 감아 눈물을 눈꺼풀 안에 가두려고 해도 눈물은 흘러넘쳤어요.

“여기에는 전하와 신첩, 둘뿐이니까.”

이런 말은 하면 안 되는데.

“듣고 잊으셔요.”

참 못됐네요, 저도. 못났네요, 정말.

구하고 싶다고 했으면서, 이분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했으면서, 이 마음의 흘러넘침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제 두 팔로 다 안을 수 없는 감정이 흘러넘쳐서, 제 발밑에 고이다 못해 수위가 차올라 머리끝까지 올라와서, 감정에 익사해 버릴 것 같았습니다.

저는 참을 수가 없었어요. 참는 걸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형편없었나 봐요.

“태어나서 한 번도 전하 같은 분을 감히 바란 적 없었고.”

그건 제가 바랄 수 있는 몫이 아니었으니까요.

이런 다정다감한 지아비, 언감생심 꿈도 꿔본 적 없어요. 그저 태자 전하의 비로서 의무를 다하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전하께서 주시는 정 같은 것도 기대해 본 적 없었사옵니다.”

이런 연모지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도 안 해 봤어요. 이런 건 그저 전설에나 나오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전설 속에서는 다들 사랑을 위해 목숨을 걸죠.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목숨을 걸고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괴물을 죽이러 가죠. 그런 건 다 이야기 속의 과장이라고 생각했어요.

한 번도 이런 연정, 감히 바라 본 적 없어요.

“그래서 전하를 뵈어도 어떤 분인지 몰랐고, 전하께서 주시는 정이 어떤 정인지도 몰랐으나.”

태자 전하의 입술이 다가왔어요. 그분이 느릿하게 제 윗입술을 빠셨어요. 뒷말을 재촉하는 것처럼. 따뜻한 물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어지러워져서 몸이 휘청거렸어요. 그러자 전하께옵서 제 등을 단단히 받쳐 주셨어요.

“이제 아오니….”

응, 하고 제 목에서 신음이 샜어요. 전하의 손이 제 가슴을 어루만지고 있었어요. 잠자리를 자주 했던 터라 가슴이 예민해졌어요. 손길이 닿는 것만으로도 아래가 움찔거렸어요. 눈을 감자 고여 있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습니다. 그 눈물을 태자 전하께서 핥으셨어요.

“아니까?”

전하께서 결국 입을 열어 재촉하셨습니다.

“이제 신첩을 놓으셔요, 전하.”

제 말에 태자 전하께서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어요. 그분은 제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속삭이셨어요.

“차라리 죽으라고 하세요. 그게 덜 지옥이니까.”

***

서연각에서의 삶은 생각보다 저에게 잘 맞았습니다.

아침에 배를 타고 온 이들이 제 시중을 들어 줄 때를 제외하면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 태자 전하만 기다리는 생활은 안온했어요. 여기에는 간자도 없었고 신경 쓸 것도 없었습니다. 신경을 쓸 수가 없었어요. 모든 것은 연못 너머에 있고 저에게는 이 거대한 연못을 건너갈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까요. 저는 제가 할 수 없는 것들을 가지고 마음을 졸이진 않습니다. 그건 의미가 없으니까요.

종종 낮에 피곤해져 침상에 누워 자고는 했어요. 아마 그건 밤의 일 때문일 겁니다. 밤마다 서연각으로 돌아오시는 태자 전하께옵서는 저를 격정적으로 안으셨으니까요. 제가 안기다 잠들고, 눈을 간신히 뜨면 태자 전하께옵서 돌아가시려고 채비를 하시는 와중이실 때가 많았습니다. 아침이 되기 전에는 아무도 없기 때문에 제가 그분의 착의 시중을 들어야 했는데 그분은 늘 벗은 몸에 금금만 두르고 있는 저를 보며 웃고는 하셨어요.

“됐으니 주무세요.”

손재주가 좋은 분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옷을 입는 것조차 혼자 잘 입으셨어요. 어느새 저는 아침마다 느지막이 일어나 그분의 착의를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연못에서 가볍게 씻고 나오신 뒤 어제 입고 오신 옷을 하나하나 입는 모습은 신속하고도 우아했습니다.

“자꾸 쳐다보시면 다시 벗고 싶어지는데.”

종종 그분은 저를 놀리셨어요. 그렇지만 실제로 벗으신 적은 없으셨어요. 태자 전하께는 매일의 일정이 있으시니까요. 대신에 그분은 벗고 싶다고 말씀은 하시면서도 도리어 제 옷을 입히셨습니다. 제가 입을 수 있다고, 돌아가시면 제가 입겠다고 말씀드려도 그분은 가볍게 웃으실 뿐이었습니다.

“제 도락을 빼앗지 마십시오.”

어느새 우리의 아침은 단둘이 지내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저는 전각의 문을 열고 연못 물이 보이는 곳에서 태자 전하를 배웅하고, 태자 전하께옵서는 연못 수면 위를 달려 멀리 사라지시고는 하셨어요. 그분이 무공을 연마하신 분이라는 건 알았지만 수면 위를 달리실 수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사라지시는 그 모습을 볼 때마다 경이로움과 함께 두려움이 들었어요.

본래 태자 전하께옵서는 본인의 능력을 과시하시지 않으셨었습니다. 태자의 능력은 황제의 밑에 있을 때 안전한 것이니까요. 그러나 이제 태자 전하께옵서는 능력을 마음껏 드러내고 계시고, 그건 황상과 대치하고 있는 현 상태를 말해 주는 게 되지요.

떠나야 하는데.

저는 고개를 돌려 아침 해에 생겨난 제 그림자를 바라봤어요. 그 그림자는 제 미련처럼 끈질기고 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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