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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중연 (32)화 (32/100)

32.

저는 옥패를 다시 고모님께 돌려드렸습니다. 우리는 몇 마디 더 나누었지만 사실 잘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 증거는 충분했습니다. 저 자신이 바로 증거였습니다. 정말 어이가 없었어요. 제 옥패가 역모의 증거가 되어 있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 대답을 해 주실 분은 한 분뿐이지요. 한밤중, 뺨을 에일 듯한 겨울 밤바람을 맞으며 처소를 나섰습니다. 서 상궁이 제 몸에 외투를 둘러 주려고 했지만 거절했어요. 정신을 좀 차리고 싶었습니다.

제가 역모의 주동자가 되어 있을 줄이야. 그런데도 태자 전하께옵선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어요. 어찌하여서 그러셨을까. 대답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저를 지키려 그러셨겠지요. 그러나 저는 알아 버렸고 이제 전하께옵서 제게 대답해 주실 때입니다. 제가 역적이 되었는지, 전하의 품속인 동궁이 아닌 저 밖에서 저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 되어 있는 건지 알아야 합니다.

“이게, 무슨…!”

전하의 편전에 들어서자마자 전하께옵서 대경실색하시어 제게 다가오셨습니다.

“외투를 가져와라!”

전하의 명에 내관이 서둘러 뛰어갔습니다. 아마 제 얼굴은 파리하겠죠. 추웠습니다. 전날 눈이 왔던 터라 오늘 밤은 평소보다 더 추운 것 같았습니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추웠어요. 하지만 정신은 더 번쩍 들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전하는 화를 내시며 제 뺨을 양손으로 감싸셨어요. 그분은 제 뺨을 감도는 냉기에 놀라신 듯 서둘러 저를 끌어안았습니다. 차갑다고 만류하려 했는데 전하께옵서 더 빠르셨습니다.

“입 다무세요.”

그분은 정말 화가 나신 듯 으르렁거리며 말씀하셨어요. 그러면서 제 몸을 끌어안고 팔이며 등을 연신 문지르셨습니다. 제가 동상에 걸려 죽어 가는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다급하고 정성스러운 손길이었어요. 저는 우두커니 서서 그분의 손길을 받다가 문득 물었습니다.

“신첩은 역적이 되었나이까?”

태자 전하의 손길이 잠시 멈췄습니다. 그분은 이윽고 혀를 차시더니 다시 저를 문지르셨어요. 제 몸에 온기가 돌아오지 않는 것에 몹시 초조해하시며 대꾸하셨습니다.

“그게 무어라고 이리 춥게 다니십니까.”

역적이 되었는데… 그것보다 춥게 다니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는 지아비의 품에서 저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습니다. 그게 무어라고. 그 한마디가 제 귓가를 계속 맴돌았어요. 그게 뭐냐니. 역적이 되었다면 제 목 아래 칼날이 닿아 있는 셈인데, 저는 당장 살해당해도 이상하지 않은데. 아니, 그런 건 다 아무래도 좋습니다. 그래요, 어차피 냉궁에서 죽을 목숨이었어요. 이 겨울을 나지도 못했을지 모를 목숨입니다.

…황위에 올라야 할 존귀한 분께서 왜 역적의 역성을 드시느라 위험을 자초하십니까.

저를 연모하셔서요? 연정이라는 게 황위와 바꿀 만큼 중요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황위와 바꿀 만큼 중요한 건 세상에 아무것도 없을 텐데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게다가 저의 역성을 드시고 계신다는 건 가문을 살리려고 하고 계시는 황후마마와 척을 지고 계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황후마마께옵서는 저를 버리려고 하셨을 겁니다. 당연합니다. 본인의 집안이라도 살리려면 종가는 버려야 하니까요. 저 하나를 살리기 위해서 태자 전하께옵서 위험을 감수하시는 건 황후마마께 득이 될 게 전혀 없으십니다. 그러니 두 분은 아마 무척 안 좋은 사이가 되셨을 겁니다. 그건 보지 않고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어요.

“신첩은….”

황후마마와도 척을 지고 황상과도 척을 지면 누가 태자 전하의 뒷배가 되겠습니까. 태자 전하는 누구를 의지하여 살아가실 수 있겠습니까. 부모와 척을 졌는데, 그 부모가 강산의 주인이며 국모신데.

“신첩은 전하를 구하고 싶었사옵니다.”

제가 역적이 되었느냐고 묻고 싶어서 여길 온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요. 저는 사실 제가 역적이 되거나 말거나 마음에 큰 동요가 일지 않습니다. 모함을 당하여 억울하게 죽은 가솔들의 한을 풀어 줘야 한다는 건 알지만 그건 그저 의무일 뿐, 사실 제가 이루고자 하는 소원은 아닙니다. 저는 소원을 이미 이루었어요. 태자 전하를 구하고 싶었고 구했으니까요. 아니, 구한 줄 알고 있었죠.

“구하셨습니다.”

전하께서 속삭이셨어요. 내관이 가져온 외투를 제 어깨에 두르시고 내관들을 내보내시며 다시 한번 속삭이였습니다.

“당신이 유일하게 저를 구하셨습니다.”

그분은 저를 편전의 자리로 이끄셨어요. 화로가 있어 편전에서 가장 따뜻한 자리였습니다. 편전이라고 해도 실제 황상의 편전에 비하면 동궁의 편전은 소박한 규모라 화로 두어 개만으로도 금세 따뜻해졌습니다. 그러나 태자 전하는 저를 화로 가까이에 앉히셨어요. 그러고도 왠지 불안해지셨는지 자신의 허벅지로 저를 끌어 올려 안으셨습니다.

“당신이 저를 유일하게….”

“망치고 있나이다.”

저는 전하를 구하고 싶었어요. 그러나 저는 그분을 망치고 있었습니다. 저 때문에 전장을 내팽개치고 오신 이분은 이제 저 때문에 역적을 품은 분이 되셨습니다. 황상과 황후를 모두 척지셨고요. 저 때문에요. 오로지 저 때문에.

제 말에 태자 전하께옵서 고개를 저으셨어요. 그런 게 아니라고 그분은 말씀하시고 싶으신 것 같았습니다.

“비, 저는….”

“냉궁에 보내 주세요.”

“…….”

“동궁에서 내보내 주세요, 전하.”

말하면서 깨닫는 것들이 있나 봐요. 지금 제가 그렇습니다. 저는 제가 미워서 견딜 수가 없어요. 저에게 외투 따위 주고 싶지도 않았어요. 한겨울의 바람에 아픈 꼴이나 당했으면 싶었습니다.

이러고 싶지 않은데 화가 납니다. 왜 저는 늘 이분께 이런 사람이 되죠? 한 번도 저는 이분께 자랑스러운 사람이 되어 본 적이 없습니다.

제 딴에는 노력했어요. 저는 이분께 어울리는 사람이 되려고 불철주야 이를 악물었는데 언제나 약점만 되다가 이제는 이분의 인생을 벼랑 끝까지 몰았습니다. 발끝은 이미 벼랑 밖에 나가 있네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아무리 노력을 해도 아무리 애를 써도 늘 상황은 더 나빠지기만 합니다.

“아니면 형장도 괜….”

“심서혜!”

태자 전하께서 고함을 지르셨어요. 편전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고함이 무시무시했습니다. 제가 놀라서 어깨를 떨었지만 그분은 저를 달래 주기는커녕 제 양어깨를 꽉 움켜쥐고 저를 내려다보셨어요.

“형장이라니, 어떻게 그딴 소리를 할 수 있습니까?”

전하의 눈이 타오르는 듯했어요. 검은 불길이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그 불길이 태워 죽이는 건 제가 아니라 전하 자신일 겁니다. 저는 그렇게 둘 수 없어요. 이분을 그런 위험한 곳에 다시는 두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서혜야.”

저를 부르시는 그분의 얼굴이 보였어요. 저는 늘 이 얼굴이 좋았습니다. 처음 정혼녀로서 이분을 뵈었을 때부터 늘 아름답다고 생각했어요. 소년이던 시절 이분은 더 아름다우셨죠. 지금처럼 늠름하진 않으셨지만요.

첫 만남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가을에 만났어요. 은행잎이 떨어져 노랗게 물든 아름다운 길목에서 서로 마주쳤습니다. 태자 전하. 아버지의 말씀에 서둘러 절하자 태자 전하께옵서는 고개를 까딱하고 지나가셨어요. 시선이 스치는 동안 눈길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저의 지아비가 될 소년 태자께서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었지요.

태자 전하께옵서는 그전에도 저를 보신 적이 있다고 하시지만 제가 기억하는 첫 만남은 그것입니다. 아주 짧고 별 볼 일 없는 것이죠. 그래도 뇌리에 새겨져 결코 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저는 손을 뻗어 태자 전하의 뺨에 댔어요. 대장부의 뺨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보드라웠습니다. 손끝에서 녹을 것 같았어요. 그게 정말 부드러워서인지 아니면 제 감정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어요.

“신첩은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전하.”

“…….”

“제가 꾸는 꿈은 전하께서 빛나시는 것이어요.”

저는 전하의 입술에 제 입술을 댔어요. 입술이 따뜻했어요. 제 입술은 차가웠고요. 이게 우리의 입장 차이이고, 우리가 서 있는 곳의 차이이죠. 따뜻함과 차가움이 섞이면 미지근해질 뿐이에요. 둘 다 행복해질 수 없을 거예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황좌에 오르셔요.”

전하만 들을 수 있게, 속삭였어요.

저는 이분이 황위에 오르는 걸 꿈에서 이미 봤어요. 잘 어울리셨어요. 그 자리는 이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그 자리를 이분에게서 뺏는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아요.

그 곁에 있음 좋겠죠. 아마 저는 뭐든 잘 해낼 수 있을 거예요. 저는 그렇게 커 왔고 각오도 의지도 누구 못지않다고 자부하니까요. 하지만 역적이라는 흠은 제가 어떻게 해도 떨쳐 낼 수 없는 커다란 것입니다.

“너를 버리고?”

전하께서 속삭여 물으셨어요. 그걸 원하느냐고.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눈물이 날 것 같았어요. 다가올 고통 때문도 아니고 죽음이 무서워서도 아니었습니다. 이별이 슬펐어요. 이렇게 다정다감한 지아비와 헤어지는 것이 괴로웠습니다. 하지만 기뻤어요. 황위와 맞바꿀 만큼 저를 연모해 주는 대장부를 만난다는 건 얼마나 큰 복인가요. 저에게 그런 큰 정을 쏟아 줄 사람이 있으리라고 한 번도 기대해 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분은 저를 그렇게 지켜 주셨어요. 세상도 황위도 다 버리고, 목숨도 위태롭게 해 놓고선, 오로지 저 하나를 위해 불구덩이에 뛰어드셨습니다.

“이제 충분….”

“너는 나를 몰라.”

기어코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을 때, 전하께서 제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그분을 올려다보자 그분이 웃으셨어요. 처참하게 망가진 웃음은 짓밟힌 꽃밭처럼 처연하고 스산했습니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전하.”

“네가 없는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너는 모른다.”

“연모하나이다.”

제 말에 태자 전하께서 두 눈을 크게 뜨셨어요. 그 눈이 얼마나 깊은지, 마지막으로 올려다봤어요. 아름다운 눈. 언제나 저만을 바라봐 주시던 제 지아비. 이제는 안녕을 고할 차례입니다.

저를 놓으시고 이탈하셨던 영광의 길로 돌아가셔야 돼요. 돌아가시는 게 조금 힘드시겠지만 그래도 곧 돌아가실 수 있으실 겁니다.

이분은 황후마마께서 생산하신 유일한 적자십니다. 황후마마께옵서는 세 장의 꽃잎을 지니시긴 했지만 어찌 되었든 꽃잎이십니다. 하늘에서 성군을 내리기 위해 보낸 여체시죠. 그리고 그분이 낳으신 유일한 몸이시니 이 제국의 황자 중 태자 전하를 이길 정통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너의 연정이 그런 것이라면.”

태자 전하께서 제 뒷머리를 잡으셨어요. 그리고 이마를 맞댄 채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의 목소리는 마치 피를 토하듯이 서럽고 거칠었어요.

“내 연정과는 사뭇 다르구나…!”

전하께옵서 이를 가셨어요. 제가 그분의 눈을 바라보려 했지만 그분은 제 머리채를 잡아 고개를 숙이게 하셨어요. 이마를 맞비비는 그분의 행동이 처절했습니다. 마치 상처를 비비는 짐승처럼 서글픈 행위였어요.

“전하.”

제가 불러도 그분은 대답하시긴커녕 이마를 계속 비비셨어요. 아니, 고개를 저으셨어요.

“너의 정이 고작 나를 포기하는 것이라면 차라리 정을 가지지 마라.”

“전하.”

“너는 무정할 때도 유정할 때도 나를 포기하기만 하니, 네가 나를 원하게 하려면 도대체 어찌하여야 한단 말이냐. 나라는 사내는 너에게 그 정도로 가치가 없는가?!”

전하, 그런 게 아니오라.

제가 서둘러 입을 열려는데 그분이 제 입을 막으셨어요.

“너는 아무 말도 하지 마라. 아무 생각도 하지 마. 이럴 거면 차라리 잠들어 있는 게 낫겠다.”

여전히 머리채가 잡혀 있어 고개를 들 수는 없었지만 태자 전하의 상처는 느껴졌습니다. 그분은 너무 화가 나고 상처 입어 계셨어요. 제가 뭐라고 말을 하려고 해도 억세게 입이 막혀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습니다. 태자 전하께서 제 눈에 입을 맞추시며 말씀하셨어요.

“한날에 태어나지 못하였으나 한시에 죽게 될 것이다. 일심을 못 이루었다면 동체라도 이루어야지. 그것이 부부지간이 아니겠는가.”

“……!”

“네가 냉궁에 간다면 나도 냉궁에 가고 네가 죽는다면 나도 죽고 네가 역적이라면 나 또한.”

스르륵, 제 머리채를 잡은 손이 풀렸어요. 저는 고개를 들어 태자 전하의 눈을 바라봤습니다. 그 눈은 웃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 웃음은 아주 싸늘한 것이었어요. 밤의 숲 그림자처럼 검고 서늘한 것이 그분의 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분이 아주 작게, 소리를 내지 않고 입 모양만으로 말씀하셨어요.

역적이 될 것이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그 입 모양은 분명히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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