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몽중연 (29)화 (29/100)

29.

흐, 으윽.

옆에서의 신음에 잠이 바로 깼습니다. 선잠이 들었던 것 같아요. 옆을 보자 태자 전하께서 신음하시는 게 보였습니다. 그분은 무척 힘들어하고 계셨어요.

“전하, 전하?”

조심스럽게 깨우는데 그분이 갑자기 눈을 떴습니다. 눈을 바로 확 뜨신 그분이 제 손을 움켜쥐셨어요. 그 손이 저를 더듬어 올라왔습니다. 제 뺨을 어루만지셨어요. 그분의 눈이 평소와는 달리 크게 뜨여 있었고 눈동자가 어지럽게 흔들리는 게 보였습니다.

“전하?”

“가지 마.”

“전하, 제가 어디를….”

“가지 마, 서혜야. 가지 마. 여기 있어.”

그분이 황급히 저를 끌어안으셨어요. 제 몸을 어루만지셨습니다. 성적이라기보단 확인의 의미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분이 제 뺨에, 눈에, 입술에 입을 맞추셨어요.

“나도 아무 데도 가지 않을게. 여기 있을 테니까. 영원히 여기 있을 테니까.”

저는 손을 뻗어 그분을 마주 안았어요. 어떡해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분이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알 수 없었습니다. 괜찮아요. 저는 내내 했던 말을 되풀이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괜찮습니다, 전하. 신첩, 여기에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한참이나 지나 천천히 전하께서 몸을 떨어뜨리고 저를 자세히 바라보셨습니다. 정확히는 제 몰골을요. 옷도 엉망이고 머리도 엉망일, 흐트러진 제 모습을 본 그분은 고개를 내려 스스로의 모습을 확인하셨습니다. 그러더니 하아, 하고 한숨을 쉬셨어요.

“어제 제가 몹쓸 짓을 했군요.”

아니요, 라고 고개를 저으려 했는데 전하께옵서 더 빠르셨어요. 그분은 제 옷을 조금 추슬러 주신 뒤 장의를 들어 몸에 걸치셨습니다. 그리고 나가시려다 뒤에 남겨진 저를 돌아보셨습니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얼굴이 마치 어린애 같았어요.

“새벽에 악몽을 꿨습니다.”

저는 문득 깨닫고 맙니다.

어젯밤 본인의 얼굴을 보여 주지 않으셨던 것처럼 이분은 무슨 꿈을 꾸셨는지도 말씀해 주시지 않을 것이라는 걸. 그것이 편한 것일까, 아니면 이분을 더욱 외롭게 하는 걸까.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이렇게 가까운데, 연모의 정을 가슴에 품고 있는데, 한겨울에 제 마음에 푸르른 봄을 끌어들인 분은 어딘가 춥고 외로워 보였습니다. 그래서 저도 같이 서늘해지는 기분이 들었어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별거 아니니 그런 얼굴 하시지 마세요.”

태자 전하께서 웃으셨습니다. 늘 이분이 선량하고 공명정대한, 완벽한 태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 깨닫는 건 이분은 늘 대단한 거짓을 가장해 오셨다는 겁니다. 이분의 안에 있는 진정한 모습이 무엇인지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히 선한 얼굴의 공명정대한 분은 아니리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태자 전하를 배웅하기 위해 일어났을 뿐입니다. 그러자 전하는 어딘가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되셔서는 제 손을 잡아 당신의 뺨에 대셨습니다.

“노하신 겁니까?”

“아니요, 전하.”

어떻게 화를 낼까요. 대제국의 태자 전하께옵서 필사적으로 감추려고 하는 것을, 그 역린을 보여 달라는 건 억지나 다름없는 일인 것을요.

네, 제가 화를 낼 일은 아닙니다.

…아닌데도.

“비.”

아닌데도 뱃속 어딘가가 뒤틀리는 건 어떤 연유인지 모르겠습니다. 새벽, 우리는 무언가를 뛰어넘은 것 같았어요. 더 가까워진 듯했었습니다. 저는 마치 아이를 끌어안은 것처럼, 일곱 살의 태자 전하를 끌어안은 것처럼 안고 있었습니다. 슬펐어요. 전하께서 그런 일을 겪으셔서요. 하지만 기뻤습니다. 제가 전하의 가장 안쪽에 닿아 있는 듯 하여서요.

그것이 착각이었다는 걸 알게 되는 건 무척 쓰라립니다. 드러난 상처에 소금이 뿌려져 발광하고 싶어집니다. 저는 소리라도 지르고 싶어졌어요. 뭐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은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가슴이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러나 저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신에 웃었습니다.

“조회에 늦으셨네요.”

어서 나가 보시라는 말에 태자 전하는 얼굴을 굳히셨습니다. 그분은 창밖을 한번 보시더니 피식 실소하셨습니다.

“완벽한 비께서 조회가 끝나고도 남았을 시간이라는 걸 모르진 않으실 테고.”

그분이 저를 집요히 바라보셔서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진 저는 눈을 내리깔았습니다. 그러자 태자 전하께서 한숨을 쉬며 저를 부르셨어요.

“서혜야.”

“…….”

“나한테 이러지 마. 오늘 꿈자리가 사나워서 내가 지금 인내심이 별로 강하지 못해.”

제가 뭘 어쩌고 있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뭘 어쩌고 있는 건 사실 태자 전하가 아니신가요. 마치 모든 걸 다 내줄 것처럼 달콤히 속삭이시고는, 저를 살리기 위해서 무엇이든 다 해 놓으시고선, 제게 진심인 얼굴은 보여 줄 수 없으시다니요. 제 마음을 가져가셨으면서, 저는….

제 마음은 늘 투명한 물속을 들여다보듯 하시면서 본인의 진심은 감추시겠다니, 그게 얼마나 씁쓸한지 이분이 아실 수 있을까요.

저는 끝까지 태자 전하를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전하께서는 화를 내거나 하시지 않으셨어요. 그분은 그저 제 앞에서 기다리고 기다리시다 결국 등을 돌려 나가셨습니다. 저는 그 뒤에서 그분을 배웅했어요.

마치 우리가 겪었던 달콤한 날들이 없어진 것처럼.

우리는 여느 태자와 태자비 같았고.

그건 무척 삭막했습니다.

***

태자 전하께서는 정신없이 바빠지셨습니다. 혜비마마께서 석고대죄를 멈추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마마께옵서는 운왕 전하께서 풀려나실 때까지 석고대죄를 하실 각오신 듯했고 황상께서는 어찌할 바를 모르시며 태자 전하를 독촉하셨습니다. 대충 끝내라는 의미의 말씀이 연거푸 떨어졌으나 태자 전하께서는 못 알아들은 척하셨어요. 황상께옵서도 황명을 내리실 수는 없으셨습니다. 강 태사 대감이 온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으니까요.

함박눈이 내리는 오후, 눈의 색을 입은 손님들이 제 궁에 당도했습니다.

“고모님.”

신궁의 궁주, 제 둘째 고모님이셨어요. 고모님은 신녀들을 거느리고 오셨으나 제 처소 안으로는 본인만 들어오셨어요. 독대를 청하신 그분은 정갈한 법도로 저에게 절을 올리셨습니다.

“태자비전하를 뵙나이다.”

“어서 오세요, 고모님.”

오신 분을 문전박대할 수 없어 안으로 모셨으나 사실 모실 기분은 아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 고모님은 장지문 뒤에 계셨어요. 그리고 저는 태자 전하에게 안겼습니다. 그건 무척 남우세스럽습니다. 황궁 안에서는 관계를 맺을 때조차 늘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나 그것이 고모님인 경우는 잘 없으니까요. 물론 사가에서 친척이 궁녀로 들어와 돌보는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요.

“강녕해 보이십니다.”

“덕분입니다, 고모님.”

“물론입니다.”

물론입니다, 라는 말에서 가시를 느꼈습니다. 다과가 나오는 동안 저는 고모님의 얼굴을 면밀히 살폈습니다. 그분은 제가 아는 것보다 조금 지치고 초췌해 보였습니다. 신궁의 궁주로서 위엄 있던 모습과는 달리 며칠 전에 갔던 시장에서 과일을 파셔도 될 것 같은 모습이었어요.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걸까.

따뜻한 차를 마시며 머릿속으로 가늠해 보고 있는데 궁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훗날의 황상께옵서는 어떠하시더이까?”

“……?”

“태자 전하께옵서 즉위하신 뒤 만나 뵙지 않으셨습니까? 만나 뵈셨을 줄 알았사온데.”

심장이 쿵 떨어져 바닥에서 부서지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습니다.

고모님은 지금 꿈 이야기를 하고 계셨어요. 제가 한때 꾸었던 꿈 이야기요. 그 꿈을 어떻게 고모님이 아시고 계시죠? 아니, 애초에 고모님이 아셔도 될 이야기인가요? 제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갔습니다. 무엇보다 미래에 황상이 되신다는 걸 제가 제 입으로 말해도 되는 건가요? 당금의 황상께옵서는 사실 미래의 황상으로 태자 전하를 생각하고 계신지 어떤지 알 수 없는데요.

저는 시침을 떼고 무척 환하게 웃으며 여쭈었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고모님.”

“예전부터 거짓말을 잘 못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

“거짓말을 해야 할 때면 환하게 웃으셨죠.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서 그 표정 하나만 연습하신 분처럼.”

얼굴이 굳었습니다. 고모님은 모두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엄격한 눈을 하고 계셨어요. 아니, 그럴 리가? 어떻게 제 꿈에 대해 고모님이 아실 수 있단 말입니까?

저는 그 꿈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습니다. 태자 전하께조차 말씀드린 적이 없는데 고모님이 무슨 수로?

“세계는 여러 갈래로 되어 있다는 걸 아십니까?”

“…….”

“인간의 선택에 따라 세계는 갈라집니다. 그렇게 수많은 세계가 생겨납니다. 가지에 가지가 생기고, 다시 가지가 생기고, 다시 가지가 생기는 겁니다. 넝쿨처럼 끝없이 뻗어져 나가 그것이 삼라만상을 이루게 되지요. 사람의 윤회는 결국 그 넝쿨 어딘가에 떨어져 다시 살아가는 걸 의미합니다.”

“신궁의 교육은 태자비로서 받았습니다.”

“그래요, 비께서는 어느 세계에서는 돌아가셨을 겁니다. 냉궁에 갇히어.”

말투가 기묘했어요. 확신하는 듯했지만 완전히 알지는 못하는 말투. 그래요…. 마치 누군가에게 들은 것 같은 말투. 그러나 누구에게?

“무엄하시군요. 아무리 고모님이시라도 그 이상은 참지 않겠습니다.”

“심서혜.”

고모님이 탕, 상을 내리치셨습니다. 저는 지지 않고 그분을 노려봤어요. 여기서 아는 척을 했다가 태자 전하께 누라도 끼치면 참을 수 없습니다. 아슬아슬, 살얼음 위를 걷듯이 살아야 하는 것이 황궁 생활입니다.

“고모님이 누구의 사주를 받아 이러시는지 모르겠으나….”

“심서혜. 너는 정가의 자식이 아니다. 심가의 자식이야. 천륜은 끊을 수 없다. 내 오라비의 자식인 네가 어찌하여 복수에 대해 깨알만큼의 생각조차 하고 있지 않단 말이냐.”

나지막이, 그러나 분노로 절절 끓는 목소리로 고모님께서 말씀하셨어요. 저는 눈을 크게 떴습니다. 역적모의 끝에 죽은 아버지의 복수를 생각하라고요? 누구를 상대로요? 아버지를 죽인 분이 누군지 모르셔서 이런 말씀을 하시나요?

“복수라니, 고모님 이번에는 제가 조카의 연으로 넘어가 드립니다만 다음에는 결코 넘어가지 않겠습니다. …여봐라.”

제가 장지문 밖에 외치는데 고모님이 속삭이셨어요.

“너를 누가 살렸지?”

“……?”

“너는 네가 스스로 살아 돌아온 거 같겠지만 천만에. 너는 내가 살렸다. 내가 한평생을 걸고 혼을 냉궁에 가둬 두었다가 그 생이 아닌 이 생으로 다시 불러들였다. 너는 내가 살렸어.”

혼을 냉궁에 가뒀다….

문득 생각났습니다. 꿈에서 사람들은 수군거렸어요. 냉궁에는 폐비 심씨의 혼이 있다고. 그래서 금줄과 부적으로 봉했다고. 그걸 한 사람은 분명히… 고모님이셨습니다.

설마.

제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을 때 궁녀들이 서둘러 들어왔습니다. 고모님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예를 갖췄습니다. 그러면서 빠르게 속삭이셨어요.

“빚을 갚아라. 자식으로서, 조카로서, 그리고 구명받은 사람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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