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몽중연 (28)화 (28/100)

28.

언젠가는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이연은 서혜를 처음 만났던 날을 기억한다.

그는 여덟 살의 태자였고 정혼녀인 세 살의 여아가 황상을 배알코저 입궁한다는 스승의 말에 조금 당혹했었다. 정혼이라. 여덟 살의 마음에도 영 불편하고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심가의 서혜. 신궁의 궁주와 황후를 생산하는 거대한 가문의 종가에서 태어난 계집아이는 태어날 때 이미 황후의 증거인 꽃잎을 석 장도 넉 장도 아닌 다섯 장이나 몸에 지니고 있었다 했다. 다섯 장의 꽃잎을 가진 여아가 심씨에서 태어나면 그 아이는 가장 어질고 현명한 국모가 되며, 그녀를 배필로 삼은 군주는 성군이 된다는 말이 있으니 그 여아가 태어난 순간 이연의 태자비 자리는 결정 난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연은 다섯 장의 꽃잎을 가진 아이가 태어났다는 말을 들었을 때 가끔 들었던 쿵 소리를 들었다. 그건 인생이 결정되는 소리였다. 황제의 하나밖에 없는 적자로 태어나 그 자리에 올랐지만 아직 어리디어린 이연에게 그 쿵, 하고 마음에 떨어지는 소리는 갑갑하고 무거운 것이었다. 그날도 그 소리는 너무 무거워서 이연은 자신에게 기적처럼 놀라운 배필이 생겼다는 데에 대한 축하를 받는 내내 그저 마음이 힘들기만 했었다.

그리고 삼 년 뒤, 세 살이 된 그 정혼녀가 입궁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연은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자신은 쿵, 하는 소리나 들었지 그 작은 아가는 태어나자마자 쿵, 알지도 못하는 벼락을 가슴에 맞은 셈이었다. 그것이 가여워 이연은 동정심이 들었다. 세 살은 너무 어려 태자비가 되지 못한다 했다. 성년이 되면 태자비로 책봉될 것이라는 말에 여덟 살의 이연은 다시 한번 가엾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성년이 되면 자신은 그보다 다섯 살이 많을 것이다. 어른이 되면 삶이 좀 편안할까. 자신은 황궁에서 나서 궁에서 자랐다. 살얼음을 딛고 자라 그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 왔지만 심서혜에게도 그럴까. 사가라는 곳은 자유롭다 들었는데.

이연은 어지러운 마음으로 생각했다. 자유. 부러운 마음도 들었다. 그가 언감생심 꿈꿔 보지 못한 것. 그런 것을 아이는 그래도 오래도록 누려 보았구나, 생각하자 질투도 조금 들었다. 그러나 그 질투는 곧 흐린 하늘의 빛처럼 덧없이 흩어졌다.

심서혜. 세 살의 여자아이를 처음 봤을 때 이연은 알 수 있었다. 사가에서 왔다는 아이는 자신과 똑같이 자유라고는 한 톨도 맛보지 못했다는 걸. 아장아장 걷는데도 허리는 곧게 펴진 상태였고, “태자 전하를 배알하옵니다.”라고 말하는 말투는 혀만 짧을 뿐 정중함은 어른의 것 그대로였다. 아이는 세 살이 아니었다. 이미 그 아이는 이연처럼 어른의 경계에 들어서 있었다.

이연은 자신의 거울을 보는 것 같았다. 아아, 나도 세 살 때 저랬겠지. 그건 퍽 안쓰러운 광경이었다. 이연은 옷과 장신구 때문에 휘청거리면서도 스스로 몸을 움직여 곡배하는 아이를 바라보다 손을 내밀어 아이를 안았다. 아이가 깜짝 놀라 몸을 화들짝 굳히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다. 자신의 태자비가 될 아이였다. 그러니 품에 안아도 괜찮을 것이다. 법도에도 어긋나지 않을 테니까.

너는 나의 비가 될 사람이니까.

너는 나니까. 나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나는 이제 여덟 살이니까, 우리가 성혼할 때에는 나는 완전히 어른일 테니까, 너는 괜찮아. 내가 지켜 줄게.

이연은 그날의 결심을 기억한다. 그는 죽을 때까지 그날의 광경도 느낌도 결심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후에 망가져 갔다. 망가지는 것 말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

한때는 모든 것이 완벽했었다.

이연은 서혜와 성혼 대례를 올리던 날, 그날 바람의 냄새까지 기억한다. 조그마한 서혜가 제 머리만 한 가채를 머리에 얹고 나왔을 때 이연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서혜는 똑바로 걸으려 애썼지만 연약한 서혜에게 가채는 가혹했다. 이연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을 뻔하다 겨우 주먹을 쥐어 참아 냈다. 잔뜩 긴장한 서혜가 이연을 보더니 겨우 웃었다.

서혜와 이연은 그동안 제법 친해졌다. 서혜는 완벽한 아이였다. 서혜는 다섯 살 때 이미 완벽한 태자비감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연이 보는 서혜는 제 나이에 걸맞지 않게 어른인 척하는 가여운 아이였다. 자그마한 손으로 모든 것을 해내는 서혜는, 언제나 어여쁘고 귀여웠다. 이연은 정말로 자신의 비가 될 이 아이를 귀애했다.

성혼식을 올리고 서혜와 이연이 초야를 위해 합방했을 때, 이연은 초야에 대해 이야기만 들었고 서혜는 그게 뭔지도 몰랐다. 이연은 둘만 되자마자 서혜의 몸을 괴롭히고 있는 장식들을 서둘러 빼 버렸다. 이연의 서툰 손에 서혜의 머리카락이 당겨져 서혜가 입술을 깨물었다. “아픕니까?” 이연이 묻자 서혜가 고개를 저었다.

그날 밤 서혜는 이연의 품에서 울었다. 첫 정사는 이연에게도 서혜에게도 버거웠다. 서혜는 울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이연은 서혜를 안고 달래서 차라리 울게 했다. 그녀가 자신의 품에서 울었으면 했다. 자신의 곁에서 웃었으면 했다.

둘은 서로를 끌어안고 밤을 보냈다. 서혜의 자그마한 몸은 이연의 품에 쏙 들어왔다. 이연은 서혜에게 팔베개를 해준 채 잠들었다. 어른이 될 줄 알았는데 그들은 여전히 어렸다. 그들에게 세상은 황궁뿐이었고, 그 세상은 너무나 엄격했다. 모든 것은 외줄 타기처럼 무섭고 아슬아슬했다. 수많은 이들이 그들에게 많은 걸 요구했고, 엄청난 의무를 짊어지는 걸 모두가 당연시 여겼다.

이연도 서혜도 자신들이 하고 싶은 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어른들이 등에 얹어 준 것들을 잔뜩 짊어지고서 한 발 한 발 채찍질하는 데로 나아가며 헐떡이는 게 전부였다. 그러면서도 우아하고 고귀해야 했다.

이연은 서혜가 태자비가 되어 행복했다. 가끔 예쁜 꽃이나 낙엽이 있으면 서혜에게 가져다주었다. 서혜는 무엇을 받아도 기뻐했다. 어디서 가져온 거냐고 물었다. 이름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서혜는 조금씩 이연에게 더 마음을 열었다.

밤은 둘만의 시간이었다. 한밤중, 둘은 달라붙어 있었다. 둘은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서로에게는 조금씩 말을 더 늘렸다. 서혜는 이연이 무슨 공부를 하는지,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알고 있었다. 대신들에게 어떤 감정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이연은 서혜가 어떤 자수를 놓는지 어떤 색을 좋아하는지 알았다. 서혜는 이연의 생일에 남몰래 작은 손수건을 주었다. 그건 공식적인 선물이 아니었다. 이연이 주었던 낙엽과 꽃이 새겨져 있는 작은 손수건은 서혜와 이연의 비밀이었다.

이연은 가끔 꽃을 따다 서혜의 머리에 꽂기도 했다. 서혜는 발그레한 얼굴로 웃었다. 서혜는 늘 인형 같은 얼굴로 무표정하게 있었지만 이연의 앞에서는 종종 발그레해지거나 놀라거나 법도에 어긋나게도 고개를 도리도리 젓거나 했다. 이연은 서혜와 한평생을 살 거라고 생각했었다.

서혜를 맞은 이연의 걱정은 후궁을 들이는 일이었다. 제 모친이 평생 속상해하는 걸 봐 왔는데 서혜도 그래야 하나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그렇다고 후궁을 들이지 않는 건 황가의 법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서, 그 생각만 하면 이연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혹시 서혜가 남아를 낳지 못하면…. 자신의 친모이자 현재의 황후인 어마마마도 자신을 무척 늦게 회임했다. 자신은 이복형들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고 그 때문에 목숨의 위협도 많이 받았다. 그리고 그의 모친도 많은 맘고생을 했고 폐비가 될 뻔도 했었다. 그러니 서혜 또한 그런 미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연은 그런 먼 미래나 생각하고 있었다. 내 서혜, 매일 웃게 해 줘야 하는데. 지켜 줘야 하는데. 이연은 언제나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한 치 앞도 모르면서 그렇게 어리석은 꿈이나 꾸고 있었다. 그러면서 매일 꿈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밤이 되면 서혜와 함께 오순도순 웃는 그런 하루하루가 당연히 계속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나 바보 같았다.

***

끝은 갑자기 찾아왔다.

그날 일을 이연은 평생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아침부터 이해할 수 없는 일투성이었다. 서혜의 가문인 심씨 집안이 역모죄로 다스려진 것이다.

전날, 이연은 서혜를 간질이는 꿈을 꿨다. 서혜가 비명을 참으며 도망가자 힘으로 잡아서 또 간질였다. 서예는 숨을 할딱이며 웃었다. 문득 자신의 몸 밑에 있는 서혜를 보며 이연은 생각했다. 언젠가에 서혜가 아이를 낳게 되면 어떨까, 하고.

이연은 서혜가 엄청난 고통과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게 싫었다. 자신에게는 자손이 필요하다. 그것을 알면서도 이연은 지금 이대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언젠가 그날이 온다면 그 아이가 어떤 아이든, 딸이거나 아들이거나 장애가 있거나 혹은 모자람이 있더라도 충분히 사랑하리라고 맹세했다.

그리고 그날은 오지 않았다. 다른 날이 왔다. 심씨 집안이 수없이 받아 챙긴 뇌물로 인해 역모죄로 다스려지는 날, 가을 하늘은 푸르렀다. 이연은 자신의 태자비가, 삼 년 가까이 자신이 안고 재웠던 작은 비가 냉궁으로 향하는 길을 보지도 못했다. 그는 전장에서 한 발짝도 발을 뗄 수 없었다.

소리도 지를 수 없었고 눈물 한 방울 흘릴 수 없었다. 처음에는 서혜가 죽는 줄 알았다. 심씨 집안이 역모죄로 다 죽어 나가고 있다고 전장은 종일 시끄러웠다.

심씨…. 이연은 전장에서 한 발도 떼지 못한 채 머릿속으로 복잡한 생각을 해 나갔다. 이연의 모친도 심씨였다. 방계였지만, 꽃잎은 석 장밖에 없었지만, 그녀도 엄연히 심씨 집안에서 태어난 황후의 씨였다. 그러나 부황은 모친을 사랑하지 않았다. 부황이 총애는 언제나 혜비에게 닿아 있었다. 가끔 흔들리기도 했으나 총애가 어머니인 심 씨에게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부황이 외척인 심씨의 득세함을 탐탁잖게 여긴다는 것은 태자 이연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현재 심씨 집안의 가주가 뇌물을 많이 받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심지어 그 뇌물을 황상이나 태자인 자신의 이름으로 받았다는 것 또한 아는 일이었다. 그러나 설마하니 정말로 신궁 궁주와 황후를 생산하는 가문인 심씨를 멸문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뭇사람 누구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뇌물은 누구나 받는 것이었다. 이 나라의 귀족이라면 누구나. 심씨가 많이 받는다고 해서 딱히 흠을 잡을 일이 아니었는데. 아니, 관리라면 청렴해야 하는 건 기본 소양이지. 그렇지만 모두가…, 모두가. 아바마마조차도…! 이연은 그저 멍했다. 그날 전투에서 이연은 사람을 베고 또 베었으나 얼마나 베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기억하는 건 어느 순간 그가 말 위로 뛰어올라 전장을 박차고 나갔다는 것뿐.

황궁에 돌아가자 서혜는 냉궁에 갔다 했다. 폐비의 절차를 밟을 거라 했다. 아직 아이를 낳지 않았으니 황가의 족보에서 삭탈하고 그녀를 냉궁에서 말려 죽이겠다는 이야기였다. 부황은 서혜가 이연의 아내가 아니라 했다. 아이를 낳지 못하였으니, 아내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였다며 출가외인으로서 보호받지 못한다 했다.

아니, 그건 부황의 핑계였다. 부왕은 모후를 싫어했다. 황후인 모후를 버릴 수 없는 것은 그 심씨가 가진 정통성 때문이었다. 정작 자신은 심씨의 정통성을 버리지 못하면서도 그는 후대인 이연이 그 정통성을 잘라 내길 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연은 그것을 원치 않았다. 이연은 서혜만을 원했다. 이연이 유일하게 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연은 부지불식간에 서혜를 빼앗겼다.

이연은 울지 않았다. 눈물이 나지 않았다. 서혜가 간 냉궁이 어떤 곳인지도 모른다. 서혜는 사실 황궁을 힘들어했다. 온갖 후궁들에게 시달리면서 그래도 꿋꿋하게 버티느라 작은 등이 휘어 가던 여자였다. 그녀는 이연의 품에서도 고충을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 이제 버려진 궁에 가서, 자신처럼 귀한 곳에서만 자란 그 아이가 어찌 살까. 걱정이 되어 앉을 수도 설 수도 누울 수도 없었다.

이연은 꼬박 밤을 새웠다. 그날부터 이연은 불면에 시달렸다. 불면은 이연의 남은 평생을 괴롭혔다. 그는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눈을 감고 있으면 자는 듯 마는 듯 하다가 까무룩 잠깐 정신을 잃는 것이 그가 자는 것의 전부였다. 잠이 들었는지 들지 않았는지 스스로도 모르는 채로 평생을 살았다.

이연은 평소 거의 눈물이 없었으나 웃음이 없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그는 서혜를 잃어버린 후 냉담해졌다. 은은한 미소 외에는 일절 웃지 않았다. 황후전에 불려 가 그의 친모에게서 신세 한탄을 들어도 이연은 언제나처럼 은은한 미소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이연은 그 표정만이 그가 지을 수 있는 전부인 것처럼 행동했다. 그리고 후에 즉위하였을 때 그는 그 미소조차 지워 버렸다. 그는 웃지 않는 황제가 되었다.

그는 가끔 홀로 웃었다. 서혜가 남몰래 주었던 손수건을 쥐고 어린 아내를 떠올렸다. 그에게는 황후도 있었고 후궁도 있었으나 그는 그들에게 비빈의 자리를 허락하였을 뿐 아내의 자리는 허락하지 못했다. 그에게는 아내가 있었다. 어여쁘디어여쁜 아내. 그의 품 안에서 잠들었고 그에게만 솔직한 표정을 보여 주던 아내가. 그리고 그는 그녀를 지키지 못했다.

폐태자비 심씨는 죽었다. 이연은 그녀가 죽었다는 걸 지나가는 말로 들었다. 조회에서 폐비 심씨의 한이 맺혀 냉궁에 귀기가 서렸으니 망자의 한을 달래기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는 말을 들으며 이연은 아연해지려는 표정을 다잡았었다.

그는 자신의 버려진 아내가 죽었다는 걸 남의 입으로 들었다. 그래, 오래 버틸 수 없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지. 이연은 생각했다. 그때 그는 새 태자비도 들였고 후궁도 있었다. 모두 그가 서혜를 잊었다고 생각했고 당연히 그리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를 배 아파 낳은 친모조차도 응당 그리하는 게 당연하다는 태도였다.

그래서 이연은 이제 세상이 미워졌다. 그는 성군이 되었다. 공명정대한 황제가 되었으나 아무에게도 애정을 주지 않았다. 어떤 여인도 자식도 그에게 사랑을 받아 낼 수는 없었다. 그저 공정함뿐이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퇴색되었다.

왕위에 오르고 나서 그가 가지는 휴식은 단 하루, 폐비 심씨의 기일에 두문불출하는 것뿐이었다. 무섭도록 일에 매진하는 그였지만 그 하루만은 방에서 꼼짝도 안 하고 누워 있었다.

뭇사람들이 수군거렸다. 그에게 아들이 생기지 않는 건 어린 나이에 죽은 폐비 심씨의 한 때문이라고. 신궁 궁주와 황후를 생산하던, 그토록 신령이 강하던 심씨 가문이 멸문지화의 업화를 당하자 가문의 신령이 모두 마지막 적녀인 폐세자비 심씨의 몸에 들었고, 그녀가 죽자 그대로 원혼이 되어 냉궁에 머무르게 되었다고 했다.

아직 이연이 태자일 당시, 선왕은 신궁의 궁주를 불러 심 씨가 죽은 방에 금줄을 걸고 봉인 의식을 행했다. 그때 이연은 그 봉인 의식에 서 있었다. 그제야 이연은 서혜가 죽은 냉궁을 볼 수 있었다. 그곳은 너무 적막하고 초라하고 비참해서 이연은 저도 모르게 오른손 엄지로 가슴을 눌렀다. 꾹꾹 누르지 않으면 가슴이 꽉 막혀서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서혜야. 이연은 속으로 서혜를 불렀다. 서혜야, 여기에 있니. 원령이 되었어? 그러나 서혜의 그 유순하고 조용한 성정에 원령이나 될 수 있을는지, 그만한 악은 있었는지, 그런 생각을 하면 이연은 속이 미어졌다. 옆에서 태자비가 “너무 더러워.”라고 중얼거렸을 때 그는 살심이 일었다가 결국 희미하게 웃어 버렸다.

이 너무 더러운 곳에 그녀를 보내고야 만 사람이 누구인가. 지켜 주겠다고 해 놓고 가는 길을 배웅도 못 한 사람은 또 누구인가. 귓가에 도는 자그마한 목소리. 전하, 하는 그 목소리. 이연은 그저 그 자리를 버티기만 했다. 버티는 것도 힘에 겨웠다.

그리고 황제가 되자 그는 서혜가 죽은 날은 자신의 침전에서 눈을 감은 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 황제를 향해 상소가 날아들었지만 그의 서릿발 같은 반응에 결국 사람들은 그 기이한 추모를 받아들였다. 황제는 자신의 조강지처를 기렸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람들은 “폐비가 자다가 죽었다며.”라고 수군거렸고, “저렇게 기려서 아들을 생산하려는 거라고 하잖소.”라는 헛소리들을 하기도 했다. 이연은 그날만은 죽은 듯이 잘 수 있었다.

꿈을 꾸었다. 서혜가 나오는 꿈이었다.

이연은 언제나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가장 오래 그 꿈에 머물렀다. 그 꿈속에 또 한 해를 혼자 있을 서혜를 두고 올 수가 없어서, 이연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가장 강하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아프고 달콤한 꿈이었다. 그 꿈에서만 이연은 목 놓아 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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