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몽중연 (27)화 (27/100)

27.

점집에서 나오자마자 태자 전하께옵서 저를 잡아 품에 넣으셨어요. 그 잠깐의 시간 동안 그분은 몹시 힘드셨던 것처럼 보였습니다.

“어디 다치신 데는.”

고개를 젓자 그분이 “잘하셨어요.”라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습니다. 제가 그분의 품을 잠시 떠나 있었던 것이 그분은 어지간히 염려되셨던 듯 제 등을 쓸어내리셨어요.

“이제 돌아가지요.”

그분은 제 어깨를 안은 채 몸을 돌리셨습니다. 우리가 바로 황궁으로 귀환하게 되리라고 생각했는데 전하께서는 태연한 얼굴로 저를 데리고 객점으로 들어가셨어요. 저는 처음 들어와 보는 곳이었습니다. 호사스럽진 않으나 나름대로 화려한 등들,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 삼 층까지 보이는 난간들. 화려한 여인들과 붙어 앉은 사내들.

우리는 삼 층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사람들이 꽤 있었지만 우리가 자리 잡은 구석은 조용한 편이었어요. 그곳에 앉자 점원이 주문을 받으러 왔습니다. 저는 차림표를 보아도 할 말이 없었어요. 만두를 시켜야 할까요, 아니면 다른 걸 시켜야 할까요? 제가 머뭇거리는 사이 전하께옵서 음식을 시키셨습니다. 죽엽청과 만두.

“황궁은 귀가 너무 많아서요.”

죽엽청이 오자 태자 전하는 저에게 한 잔을 따라 주시며 말씀하셨어요. 귀가 너무 많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너무나 잘 압니다. 황궁에는 벽에도 귀가 있고 땅에도 귀가 있어요. 누구나 이야기를 듣고 있지요. 어디나 위험합니다.

죽엽청이라는 술은 늘 귀로만 들어 봤어요. 많은 이들이 즐겨 마시는 술. 그 술을 입에 조금 대 보았는데 맛도 별로고 향도 그다지 좋지 않아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어요. 그러자 전하께서 웃으셨습니다. 그분은 목소리를 낮춰 “싸구려 술입니다.”라고 말씀하셨어요. 제가 마치 술을 얕잡아 본 듯해서 민망해졌습니다. 고개를 젓자, 그분은 죽엽청을 병째 들고 입에 대 마시신 뒤 “사실인걸요.”라고 여상히 대꾸하셨어요.

“잘 드시네요.”

“독도 먹었는데 이딴 술 따위.”

태자 전하의 말에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습니다. 철컹하고 탁자가 흔들렸어요.

“독?!”

제 놀란 얼굴을 본 태자 전하께서 잠시 제 얼굴을 올려다보셨어요. 그분은 제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 나직이 말씀하셨어요.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 해야 할지, 놀라 줘서 고맙다 해야 할지.”

“전….”

“쉿.”

‘전하!’라고 소리 지를 뻔했는데 겨우 참아 냈습니다. 전하께서 바로 쉿, 하고 주의를 주셨으니까요. 하지만 당혹스러운 마음은 가시질 않았어요. 누가 태자 전하께 독을 드린 거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아, 그때, 동궁 화재 때 무언가를 드신 걸로 아는데 그때 이야기일까요?

“앉으세요.”

태자 전하께서 제 손을 잡아 앉히셨어요. 저는 어쩔 수 없이 맞은편에 앉았습니다. 그분이 제 손에 젓가락을 쥐어 주셨지만 입맛은 싹 달아난 뒤였어요. 독이라고요?

“아.”

태자 전하께서 만두를 집어 제 입에 넣어 주려고 하셨어요. 제가 놀라서 고개를 젓자 그분이 장난스럽게 “팔 아픕니다.”라고 말씀하셨어요. 저는 아주 완강해 보이는 그분의 팔을 바라봤어요. 전혀 아프지 않을 게 분명한 팔이었습니다.

“거짓으로 농을 치시고….”

제가 중얼거리자 태자 전하께서 “들켰습니까?”라며 웃으시더니 고개를 제게 가까이하셨어요.

“무릎에 앉혀 드시게 해 드릴까요?”

불한당 같은 희롱에 제가 눈을 휘둥그레 뜨자 만두가 제 입술을 톡 건드렸어요. 어서. 태자 전하의 말에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습니다. 한입 맛본 만두 맛에 깜짝 놀랐어요. 술과는 전혀 달리 아주 맛있었어요. 육즙이 흘러나오는데 그 맛이 황궁에서도 맛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깜짝 놀라 오물거리고 있자니 태자 전하께서 말씀하셨어요.

“만두로 아주 유명하죠. 원래 작은 초가집에서 시작했는데 만두 하나로 이만한 가게를 세웠습니다.”

“아아.”

“운왕비 전하께서 혼사를 치르기 전 이 집 장남과 조금 말이 나왔습니다.”

말이 나오다니?

저는 조금 뒤에야 운왕비 전하께옵서 이 집 장남과 연정을 나누셨다는 이야기라는 걸 알아들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저는 태어난 순간부터 태자 전하의 정혼녀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운왕비 전하의 혼사도 무척 오래전부터 예정되어 있던 것이었습니다. 강 태사 대감께서 반대를 하든 말든 간에요.

“운왕비 전하의 유모가 이 집 안주인입니다. 그래서 그 장남과 운왕비 전하는 자주 어울리셨죠. 몸이 약하디약한 운왕비 전하께 그 장남은 많은 힘이 되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둘은 혼사 전야, 도망을 쳤는데 황도도 빠져나가지 못하고 잡혔습니다. 장남은 다리병신이 됐고 운왕비 전하는 혼사를 치르셨죠. 그리고 운왕 전하께서는 아시다시피 왕비 전하의 일거수일투족에 몹시 예민하게 행동하셨습니다.”

성혼 전야에 도망간 신부를 잡아 왔습니다. 만약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운왕 전하는 웃음거리가 될 테니 당연히 그분은 왕비 전하를 단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문제는 운왕비 전하가 요양을 갔다는 시점에 이 집 장남도 사라졌다는 겁니다. 이 집에서는 쉬쉬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만두를 먹으면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운왕비 전하와 이 집 장남은 서로에게 연정이 있었고 둘은 동시에 사라졌다. 둘이 자의로 사라진 것인가, 타의로 사라진 것인가? 이것이 이 사건의 열쇠가 될 듯했습니다.

저는 점쟁이에게 들은 것을 고했습니다. 점쟁이에 의하면 운왕비 전하께서 원하신 건 하나뿐이었습니다. 부군이신 운왕 전하께서 다른 여인들을 찾으시는 것. 자신에게 무관심해지시는 것. 그것을 위해 비방도 부적도 서슴지 않았다고 하시니 그분은 운왕 전하를 정말 불편해하셨던 것 같습니다. 달거리를 계속할 수 있는 방법은 없냐고까지 물었다 하시니 아주 필사적이셨던 게 분명해요.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온 밤, 태자 전하께옵서는 편전으로 움직이시고 저는 처소에 남았습니다. 안면향을 피우려는 궁녀를 만류하고 홀로 침상에 앉아 멍하니 달빛을 바라보았어요. 달이 사라지고 여명이 밝아 오는 것을 보는 내내 태자 전하의 말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독도 먹었는데 이딴 술 따위.”

독을… 어디서 어떻게 드신 걸까요?

여쭤 봐야 했었는데 결국 여쭈지 못했어요.

태자 전하께서 결코 쉽지 않은 성장 과정을 거치셨다는 걸 압니다. 그분은 장황자이신 운왕 전하를 비롯 수많은 형님들보다 나은 분이셔야 했습니다. 숨 쉬듯 비교당하는 황궁에서 특히 그분은 손가락 끝 모양까지도 비교당했습니다. 그분은 철두철미하게 완벽해야 했습니다. 황제 폐하는 물론이고 황후마마나 스승들, 그리고 수많은 이들이 그분을 재단했어요. 그런 것들은 알고 있었지만 독이라니요.

“안면향을 거부하셨다더니 결국 이리 밤을 새셨습니까.”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자 어느새 태자 전하께서 들어오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따라 들어오는 내관들을 물리시고 손수 외투를 벗어 내려놓으신 다음 제 앞에 와서 다정히 눈을 맞추고 앉으셨어요.

“응? 이리 잠을 주무시지 않으셔서야.”

“…….”

“독 이야기를 괜히 했군요.”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분은 이미 제가 왜 이러는지 아시고 계셨습니다. 혀를 차신 그분이 제 머리를 쓸어내리셨어요. 커다란 손. 저는 이런 손은 이분의 손밖에 모릅니다. 저를 이렇게 만져 주는 손도 이 손밖에 모릅니다. 부모도 유모도 저를 이렇게 만져 준 적은 없어요. 고요하고 다정하게, 이런 손길로 저를 매만져 주는 건 오로지 이분뿐입니다.

울컥하고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어요.

“누구입니까?”

제 질문에 태자 전하가 고개를 저으셨어요.

“지난 일입니다.”

“전하.”

“다 지난 일입니다. 비께서 여기 계시면 이 몸은 괜찮으니.”

저도 고개를 저었어요. 아니요, 괜찮지 않습니다. 전하께옵서는 괜찮으실지도 몰라요. 지난 일이라고 이제는 괜찮아지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지금 맞은 날벼락입니다. 조금도 괜찮지 않아요.

도저히 이 분하고 고통스러운 마음을 잠재울 길이 없습니다. 제 얼굴을 본 태자 전하께서 어쩐다, 하고 중얼거리셨어요. 그분은 잠시 저를 도닥거리시다가 제 턱을 들고 뺨에 입술을 묻으셨습니다.

“일곱 살에.”

입술이 제 목과 뺨을 오갔어요. 피부와 피부가 닿지 않고서는 거의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가 제 귓가에 흘러들어왔습니다.

“부황께서 냉차를 내려 주시더군요.”

…아.

“그 차를 저와 강아지에게 주었는데 한여름 뙤약볕에서 목이 말랐던 강아지가 냉차를 마시더니 죽었습니다. 거품을 무는 강아지를 보고 있자니 부황께서 그러시더군요. 이연아, 네 차례다.”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몸을 감돌던 쾌락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어요. 벌떡 상체를 일으킬 뻔했지만 태자 전하의 힘이 저를 단단히 누르고 있었습니다. 장지문 너머 귀를 기울이고 있을 간자들에게 티를 내지 말라는 의미셨지요. 저는 다시 몸에서 힘을 빼고 누웠습니다.

“무슨 차인지 독이 있는지 없는지 여쭐 수도 없었습니다. 그냥 마셨고 쓰러졌지요. 다행히 저는 살아남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독에는 조금 내성을 길러 왔으니까요.”

황상께서 어이하여 그러셨을까요.

너무나 뻔합니다. 적자인 태자 전하께서 돌아가시면 그다음 동궁의 주인은 운왕 전하시니까요. 혜비마마와 황상의 첫아들. 황상이 가장 아끼는 아들. 그 운왕 전하 말입니다.

“그게 다입니다.”

태자 전하께서는 그리 말씀하시고 제 옷을 헤집으셨습니다. 그분은 고개를 들지 않으셨어요. 얼굴을 보여 주기 싫으신 것처럼요.

단지 저에게 계속 파고드셨습니다. “다리를 더 벌려 봐, 서혜야.” 그분의 나지막한 목소리는 애원과도 같았습니다. 저는 부끄러움을 참고 다리를 힘껏 벌렸어요. 그분은 제 아래로 내려가 다리 사이에 입술을 대셨습니다. 제가 되살아난 이후로 이걸 좋아하셨어요. 제 온몸을 물고 빠는 걸 무척 좋아하시게 되었고 숨기시는 법도 없었습니다.

개처럼, 마치 애정을 바라는 충견처럼 그분은 제 아래를 핥으셨어요.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여 각도를 바꿔 가며 입술을 벌려 접문하듯 혀와 살점을 얽고 제 안쪽으로 혀를 집어넣으셨습니다. 손가락을 넣어 휘젓기도 하셨어요. 정신은 차갑고도 슬픈데, 몸은 뜨겁게 달아올랐습니다.

“아…! 전, 하…!”

제가 그분을 부르면 기쁜 듯 더 달려드셨어요. 저도 모르게 허리를 움직이다 흠칫하여 멈추면 재촉하듯 제 허리를 조르듯 잡아 흔드셨습니다. 벅찬 쾌감에 등을 비비며 위로 올라가 도망치려 해도 제 허리를 놔주지 않으셨어요.

이윽고 그분이 들어오셨을 때는 저도 모르게 교성을 지르고 있었습니다. 아, 아, 아! 제 목소리가 방 안 가득 퍼지자 그분이 들어오시다 말고 아, 하고 나지막이 신음을 뱉으셨어요.

“너무 조이네. 서혜야, 왜 이렇게 좁아?”

“응, 응!”

“남편 걸 매일 밤 받아먹는 여인이 어찌하여 이토록 새침을 떨까? 남편이 없는 척하고 싶어서?”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몸이 쾅쾅 부딪혔습니다. 뒤로 계속 밀렸어요. 혼이 나갈 정도로 강한 움직임이었습니다. 안이 모두 짓눌려서, 진탕이 되어서, 뒤섞여서, 다 망가지는 기분이었어요. 조금 아프고 무척 쾌락적이고, 그리고 무섭진 않았습니다. 그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뜨겁게 달아오른 귀에 그분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는 압니다.

“전하, 이제 괜찮, 응, 습니다.”

“…….”

“이제, 신첩이, 흣, 항시 곁에, 있을, 테니, 아, 아!”

태자 전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그분은 더 다급해지셨어요. 게걸스럽게, 그래요. 그분은 마치 아귀처럼, 먹어도 먹어도 배를 채울 수 없는 그 귀신처럼 저에게 달려드셨습니다. 제 온몸을 계속 탐하셨어요. 안쪽에 파정하신 것도 잠깐, 다시 저를 안으셨어요. 옆으로, 그리고 뒤로. 제가 움직이지 못하자 허리를 잡아 엉덩이만 들게 한 다음 교접하셨어요. 짐승 같은 관계였고, 교미라는 말이 차라리 어울릴 지경이었습니다.

창밖이 완전히 밝아져 왔을 때 우리는 완전히 엉망이었습니다. 저도 여전히 옷을 다 벗지 못한 상태였고 태자 전하도 마찬가지셨어요. 평소와는 달리 태자 전하는 제 팔 아래 누워 제 가슴에 얼굴을 묻고 계셨습니다. 관계 내내 그분은 얼굴을 보여 주지 않으셨어요.

하지만 그분이 흥분하셨다는 건 알 수 있었고 그분이 사실은 그 독차를 하사받았던 때 무척 충격받으셨었다는 것도 눈치챌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분의 묶인 머리를 풀고 편안히 눕게 해 드린 다음 그 머리칼은 조심스레 쓰다듬었어요.

제 손은 태자 전하의 손처럼 크거나 단단하지 않습니다. 그게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저는 전하께옵서 이렇게 해 주실 때마다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세상에 한 사람이 있어 저를 염려하고 보살피고 있음을, 그것은 오롯한 애정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애정 하나가 저에게는 초롱불이 되어 이 어두운 세상길을 밝혀 줍니다. 다른 건 의미가 없어요. 세상은 언제나 까맣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이니까요.

“괜찮아요.”

마치 여염집 아낙네처럼 속삭였습니다.

“괜찮아요. 다 괜찮아요.”

여기에 있는 건 서혜라는 여인일 뿐. 그 영험한 심씨 가문도 아니고 다섯 꽃잎도 아니고 태자비도 아닌 오로지 저라는 사람뿐입니다.

저는 계속 태자 전하를 쓰다듬었어요. 괜찮아요, 괜찮아요. 다 괜찮아요.

그날 태자 전하께옵서는 드물게도 조회에 나가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폐허 같은 차림으로 제 품에 누워 괜찮다는 말을 듣고 계셨어요. 그러다 어느 순간, 저는 잠에 빠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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