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시장에 갔을 때 저는 부끄러움과 걱정으로 미칠 것 같아졌습니다. 가장 미칠 것 같은 건 태자 전하께서 제 손을 잡고 계시다는 거였어요. 그분은 아무렇지도 않게 제 손을 잡은 채 말씀하셨습니다.
“여보, 뭐부터 구경할까?”
얼굴이 달아오르다 못해 터져 버릴 것 같았어요. 제가 고개를 젓자 그분이 웃으셨어요. 저는 손을 빼려고 했지만 그분은 당연하게도 제 손을 놓아주지 않으셨습니다. “소, 손 좀.” 제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자 그분이 눈을 크게 떴습니다.
“나 길 잃으면 어떡해. 여보가 나 잡고 다녀야지.”
“아니….”
“가자.”
그분은 저를 붙잡고 시장 안으로 성큼성큼 움직이셨어요. 어제가 보름이었는지라 여전히 달은 밝았고 시장 안에 켜 놓은 등들도 휘황찬란할 정도로 밝았습니다. 태자 전하께서는 알아볼 게 있으시다더니 그게 뭔지는 말도 안 해 주신 채로 시장을 구경하기 시작하셨어요.
“금슬이 좋으시네요!”
시장 상인이 웃으며 말을 걸었습니다. 히익.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고개가 더 숙여졌어요. 지금 저 사람을 알까요? 태자 전하 앞에서 목을 뻣뻣이 들고 있다는 걸요. 사형감입니다.
“그래 보입니까?”
태자 전하는 아무렇지도 않게 상인에게 존대를 하셨어요. 그게 신기해서 저는 고개를 살며시 들었습니다. 태자 전하의 얼굴이 보였어요. 그분은 누가 봐도 고귀한 태가 나는데, 새하얀 얼굴은 해 아래에서 일하지 않은 듯하고 매끄러운 머리카락은 잘 관리된 게 느껴지는데, 상인은 그런 것 따윈 아무 상관도 없는 것처럼 굴었습니다. 눈앞의 사람이 누구든 당과만 사면 된다는 듯이요.
“당과는 얼마입니까?”
동그란 당과를 꼬치에 꿴 것은 시장을 거닐며 먹으라고 파는 것 같았습니다.
“2푼입니다.”
“두 개 주세요.”
“자, 자, 잠깐만. …요.”
평민에게 존대를 해 본 적이 없어 영 어색했습니다. 하지만 간신히 존대가 나왔어요. 저는 태자 전하를 바라봤어요. 설마 길을 거닐면서 먹자고요? 그런 체통 없는 짓을? 제 눈에 서린 말을 분명히 보셨을 텐데 태자 전하는 그 말에 대꾸해 주시기는커녕 당과 꼬치를 사셔서 기어코 제 입에 넣으셨습니다.
“아, 아니, 저는.”
괜찮다고 말하는 제 입 안으로 당과 꼬치가 들어왔어요. 앙, 하고 물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엄청나게 단맛이었어요. 제가 얼굴을 찡그리자 태자 전하께서 제 미간을 손가락으로 살살 펴 주셨어요.
“맛있지 않아?”
“전….”
“쉿.”
전하, 라고 말할 뻔했는데 전하께옵서 쉿, 하고 적절하게 주의를 주셨습니다. 어쩔 수 없이 저는 입을 다물었어요. 할 말은 없고 입에 음식은 있으니 저도 모르게 오물오물 씹게 되었는데… 엄청나게 달지만 맛있었습니다. 맛없다고 할 수 없었어요.
제 얼굴에서 답을 발견하신 듯 그분이 웃으셨어요.
“맛있지?”
“…익숙해 보이시옵, 보이시네요.”
말을 편안한 어조로 하면서 저는 그분을 다시 한번 바라봤어요.
평생 저택의 담 혹은 황궁의 담을 벗어나 보지 못한 저와는 달리 전하께옵서는 거침이 없으셨어요. 그분은 시장이 불편하지 않아 보였습니다.
“자주 나오셨나요?”
당과를 먹다 말고 여쭙자 그분이 고개를 저으셨습니다.
“아니요, 처음입니다.”
처음이신 분이 어찌 이리 자연스러우실까. 의아한 기색을 읽으셨는지 태자 전하께옵서 미소 띤 얼굴로 말씀하셨습니다.
“너와 이러고 싶었으니까. 늘 꿈꿨으니까.”
“이러고 싶으셨다는 말씀은….”
“그냥 남자. 그냥 여자. 그런 게 되었으면 하고.”
태자, 태자비. 정략결혼. 미래 강산의 주인과 다섯 꽃잎. 집안과 집안의 결속. 입지가 불안한 태자와 역적의 딸. 그런 게 아니라.
그저 남자와 여자. 신분이 높은 이들 중 정말 좋아서 결혼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만은 그래도 너무 많은 걸 짊어진 사이는 아니길. 너무 많은 게 가로막고 있는 사이는 아니길.
그런 걸 바랐다고 말씀하시는 그분의 눈은 짙고 깊었어요. 우리는 여전히 손을 잡고 있었습니다. 이름 없는 무사와 그의 아내. 그저 평민. 아무것도 없이 사는 두 사람의 생을 조심스럽게 훔쳐 입어 보고 있었어요. 감히 바라서는 안 되는 것들을.
평온을.
행복과 슬픔이 비슷한 색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처음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가질 수 없는 것이니까요. 우리는 언제나 높은 곳에 있겠죠. 그곳에서 내려올 때는 추락할 때뿐이고, 높은 곳에 있는 한 더 뾰족한 곳에 서서 더 바람을 많이 맞아야 할 테죠.
“가진 것도 없고 있는 거라고는 칼 한 자루 가진 사내랑 천하제일미가 결혼해 주려나.”
태자 전하께서 피식 웃으셨어요. 제가 그분을 올려다보자 그분도 저를 내려다보고 계셨어요.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습니다. 태자 전하께서 물으셨어요.
“말하는 해당화가 있다 한들 심가의 고명딸만 못하며 춤추는 모란이 있다 한들 태자비만 못하니, 이 둘이 한 사람이라. 천하의 수만 미인이 있다 하더라도 칭송은 한 사람이 독점하니 많은 미인, 때를 잘못 타고난 것을 한탄하더라.”
“전하, 그 부끄러운 시는 또 왜….”
아양 떨려는 자의 별 말 같지도 않은 시를 읊으시는 태자 전하의 목소리에 고개가 푹 숙여졌습니다. 타인의 입으로 듣는 외모에 대한 평가도 낯부끄럽지만 지아비에게 듣는 것은 특히나 부끄러웠습니다. 그러나 얼굴이 붉어지는 저와는 달리 태자 전하는 별로 기분이 좋지 않으신 듯 혀를 차셨어요.
“시장에 괜히 왔나 봐, 서혜야. 아까부터 온갖 놈팡이들이 다 너를 쳐다보느라 여념들이 없다.”
아니어요.
제가 고개를 저었지만 그분은 정말 기분이 상하신 듯 저를 끌어당겨 제 얼굴을 품 안에 넣어 가리셨어요. 그 모습이 마치 질투하시는 것 같아 저도 모르게 “꼭….” 하고 입을 열었다가 황급히 다물었습니다. 우리는 진짜 보통 여자, 보통 남자가 아닙니다. 이분은 태자 전하. 저는 해서는 안 될 말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한 글자만으로도 태자 전하께옵서는 제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눈치채신 거 같았습니다.
그분이 제 귓가에 대고 소곤거리셨어요.
“네가 나였고 내가 너였다면 나는 행실 때문에 쫓겨났을 거다.”
“예?”
“투기로.”
그분의 말에 귀가 또 뜨거워졌어요. 아무 말도 못 하는 저에게 그분이 말을 이으셨어요.
“네 곁에 있는 후궁 따위 내 어찌 두고 볼까. 다 죽여 버려야지.”
“전하.”
“그러니 비께선 제가 사내인 걸 다행으로 여기십시오. 역사에 흉으로 남으실 뻔하시지 않았습니까?”
뻔뻔하게 말씀하시는 태자 전하의 품에서 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다가 툭 그분을 한 대 때렸습니다. 시장이니까, 그리고 우리는 보통의 남녀처럼 옷을 입고 있으니까 할 수 있는 행동이었어요. 아주 용기를 내서 한 행동이었는데 태자 전하는 웃으시더니 속삭이셨어요.
“더 세게 때려 봐, 서혜야.”
“…….”
“다 궁금하구나. 네가 사람을 때릴 수 있다는 것도 오늘 알았으니 얼마나 세게 때릴 수 있는지도 궁금하고. 욕을 할 수 있는지도 궁금하고.”
사람을 때릴 수 있는지 궁금하다는 말은 이상한 말인데 귀에는 달콤하게 녹아내렸어요. 저는 그저 고개만 계속 저었습니다.
결국 전하께서 크게 소리 내어 웃으셨어요. 제 머리 위에서 그분의 웃음이 느껴졌습니다.
“점을 보는 곳입니다.”
태자 전하께서 소곤거리셨어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지 않아도 알 수 있었습니다. 깃발에 커다랗게 점, 이라고 쓰여 있었으니까요. 점? 물론 점괘는 자주 봅니다만 고모님도 계시고 다른 관리들도 많이 있습니다. 천문을 관측하고 길흉을 점치는 기관이 있으니까 우리가 여기서 점을 볼 필요가 무에 있을까요. 나라 안에 날고 기는 이들은 모두 황궁에 있는데요.
“운왕비가 단골이었다고 하더군요.”
“……?”
“왕비 전하께서 무슨 점을 보셨을까.”
왕비 전하께서 이런 시장 한가운데에 있는 점집을 드나들었다고?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너무 눈에 띄는 짓이니까요. 차라리 점쟁이를 왕부로 불러들이면 불러들였지 굳이 그분이 여기로 와야 할 이유가 도대체…. 아, 하나 있지요. 운왕 전하의 눈에 전혀 띄지 않게 점을 보고 싶을 때. 그렇다면 지금 우리처럼 변복을 하고 드나들 수 있습니다. 맞아요, 가능합니다.
“문제는 무녀 출신이라 여인의 점만 본다고 합니다. 저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태자 전하께서 은밀하게 제게 주머니 하나를 내미셨어요.
“원보(1원보는 은 50냥)를 가득 넣었습니다. 이것으로 달래어 이야기를 들어 보세요.”
“예, 전하.”
“위험한 일은 없을 겁니다. 지키고 있을 테니 걱정 마시고.”
걱정은 하지 않았습니다. 태자 전하가 지켜 주실 것을 믿어서가 아니라 그냥 무섭지 않았어요. 저는 고개를 끄덕이고 점집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점집은 작았고 어두웠어요. 촛불이 군데군데 켜 있어서 그 빛으로 간신히 발밑을 확인할 수 있는 정도였어요. 다행인 건 얼마 걷지 않아서 문이 나타났고, 그 문을 열자 초롱불로 가득한 방이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안쪽에는 점쟁이가 앉아 있었고요.
제가 건너편에 앉자 제 관상을 흘끗 본 점쟁이가 싱긋 웃었어요. 아주 싹싹한 태도로 제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관상이 좋으시네요. 아주 귀한 관상을 타고나셨어요.”
“그런가.”
“예, 마치, 왕후의 덕을 볼 그런 관상이세요.”
“그런가.”
“그리고, 손금 좀 볼까요.”
저는 순순히 손을 내밀었습니다.
“손금도 아주 좋습니다. 전생의 인연이 닿은 분이 부군이시군요. 혼인은 하셨고…, 자손이 약하시네요. 하지만 자손은 생기실 겁니다. 조금 늦게 들어오시는 운이시고. 그런데 한 번 죽었다 살아나시는 듯한 손금이신데 무슨 큰일이 있으셨거나 없으셨다면 좀 조심하셔야 하고요. 부군이 상당히 높은 지위까지 올라가시겠습니다. 아주 좋은 손금….”
“무녀 출신이라고 들었는데, 내가 누군지 모르나?”
“…예?”
“우리 고모님 밑에 있었을 거 아닌가? 신궁의.”
우리 고모님.
그 말을 조금 생각하는 듯하던 점쟁이가 핫, 하고 저를 보더니 재빨리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습니다. 제가 누군지 알아챈 듯했어요. 아마 한두 번쯤 제 얼굴도 보았을 겁니다.
“태, 태자비 전하.”
“그래.”
“이, 이, 누추한 곳에는 어인 일로….”
그녀는 바들바들 떨고 있었습니다. 문득 그녀가 좀 가여워졌어요. 저 또한 황상 앞에서 늘 저런 모습이겠죠. 자신의 목을 그저 흥미 본위로 자를 수 있는 상대는 무섭습니다. 왜 내 생사여탈권을 남이 쥐어야 하는 걸까요. 조금 슬퍼집니다.
“운왕비 전하께옵서 이곳의 단골이셨다 들었다.”
“…그, 그것이….”
“나를 화나게 하지 마렴.”
“예! 그러셨사옵니다.”
“어인 일로 들르셨느냐?”
점쟁이가 흘끔 저를 올려다보았습니다. 겁먹은 눈이었지만 그럼에도 그 눈은 거래를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죽은 사람의 비밀을 담보로 한몫 잡아 보려는 기대가 서슴없이 타오르는 눈을 보고 있자니 진심으로 밟아 버리고 싶어졌습니다. 저는 그럴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용히 처리하여야 할 문제기도 하고 이 점쟁이가 평민 점쟁이가 아니라 후궁의 권세를 누리는 이였다면 제가 밟고 싶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요.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하한 비열함을 결국 저도 드러냈을 뿐입니다.
찰랑.
그녀의 앞에 주머니를 떨어뜨렸습니다. 찰랑하는 소리에 그녀가 슬금슬금 제 눈치를 보며 주머니를 끌어당기더니 그 안을 확인했습니다. 가득한 원보를 본 점쟁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어요. 그녀는 재빨리 “태자비 전하께 아뢰옵니다!”라며 입을 열기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