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다음 날, 황궁은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난리가 났습니다.
“그러니까 어젯밤 운왕부에서 연회가 열렸사옵니다.”
아아, 하고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연말이라 연회가 한창 열릴 때였습니다. 한 해가 지나가는 때에 수많은 관료들이 서로의 저택을 드나듭니다. 연회 등이 환하게 황도를 밝히지요. 한 해의 세를 자랑하기 위해 다들 화려하게 연회를 열기 때문에 흥청망청하기 마련입니다. 특히 왕부들은 동짓달에는 거의 매일같이 연회를 연다고 봐도 무방할 지경입니다.
“운왕부에 월련지라는 연못이 있사온데 그 정취가 매우 아름다운 연못이라고 하옵니다. 특히 달이 연못에 비추는 모습이 절경이고, 마침 어제가 보름이었지 않사옵니까. 하여, 월련지의 정자에서 연회가 열렸사온데 연회 도중에.”
이야기를 가져온 궁녀가 잠시 말을 멈추고 침을 꿀꺽 삼키더니 입을 열었습니다.
“시신이 떠올랐다고 하옵니다. 서둘러 건지니 운왕비 전하의 시신이었다 하여, 그 자리에서 운왕 전하께옵서 나포되셨다 하옵니다.”
운왕부 내에서 운왕비 전하의 입지는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분을 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어요. 단 한 명, 운왕 전하 자신을 제외하면 말입니다. 애초에 행궁 나들이를 가신 걸로 되어 있는 분이 사실은 돌아가셨다는 점은 운왕 전하의 혐의를 매우 짙게 만드는 요소였습니다.
“거기까지는 대충 알겠는데 어떤 연유로 태자 전하께옵서 이 사건의 심리를 맡게 되신 것이냐?”
운왕 전하의 편을 들고 싶으신 황상께옵서 운왕 전하와 악연의 고리를 맺고 계신 태자 전하께 사건의 심리를 맡기실 리가 없는데.
이 점이 몹시 의아해 묻자 “그것은 소인이 고하겠사옵니다.”라며 다른 궁녀가 무릎걸음으로 제게 다가왔습니다.
“마마, 운왕비 전하께서 강 태사 대감의 손녀이시지 않사옵니까?”
“아아.”
“강 대감께서 직접 요청하셨다고 하옵니다.”
강 태사는 황상의 스승이니 황상께옵서는 스승의 간절한 청을 거절할 수 없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아아, 이제 대충 알 것 같습니다.
강 태사는 강직한 분으로 이름이 높았습니다. 그분은 손녀인 운왕비 전하를 몹시 애지중지하시었는데 손자들보다 더 아끼셨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운왕비 전하께 글도 그림도 직접 가르치셨다고 하는데 선나라 최고의 학식께서 가르치셨으니 운왕비 전하의 조예는 무척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운왕비 전하께서 그 재능을 꽃피우기도 전에 그분은 운왕부로 시집을 가셨는데, 이 혼사는 강 태사 대감의 반대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운왕비 전하의 부모 되시는 분들이 워낙 강경하게 밀어붙여 어쩔 수 없이 그분은 시집을 가셨고 현재 이런 비극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러자 태사 대감은 운왕 전하께서 손녀를 살해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하시고 그런 경우 가장 그분을 확실하게 잡을 수 있는 사람, 태자 전하께서 사건의 심리를 볼 수 있도록 요청하신 것입니다. 운왕 전하는 죄를 지었어도 벌을 받지 않을 가능성이 워낙 높으신 분이니까요.
“현재 운왕 전하는 어디에 계시지?”
“대리시 감옥이옵니다.”
구금은 피할 수 없는 절차였습니다. 큰 고초야 겪지 않으시겠지만요.
“비전하! 혜비마마께옵서 지금 석고대죄 중이시라고 하옵니다.”
갑자기 들어온 궁녀가 외쳤습니다.
역모라도 꾸미는 사람들처럼 옹기종기 모여 소곤거리고 있던 저와 궁녀들은 동시에 고개를 들었습니다. 황당했어요.
“아직 죄가 밝혀진 것도 아닌데 무슨 석고대죄를 한단 말이냐?”
아니면, 설마 자백하신 것인가. 정말 운왕비를 죽였다고?
당황해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제 얼굴을 본 궁녀가 “그것이 아니옵고.”라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럼 그렇지. 아직 아침이었습니다. 나포되신 지 만 하루도 안 되신 분이 벌써 무슨 자백이겠습니까. 그럼 무슨 석고대죄? 제가 눈을 깜빡이자 아, 하고 서 상궁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운왕 전하의 구금을 풀어 달라는 청을 올리시나 보옵니다.”
“왕비를 살해한 혐의를 받고 계시는데 어찌 구금이 풀리겠는가?”
허탈하게 중얼거렸습니다. 그러면서도 무슨 석고대죄인지 알 것 같았습니다. 어미인 자신의 죄이니 자신도 같이 구금해 달라는 청을 올려 결국 운왕 전하를 운왕부에 가택 연금한 상태로 사건을 심리해 달라 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얕은수였으나 문제는 황상께서 매우 흔들릴 수법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황상께서는 늘 혜비마마께 미안한 마음이 있으셨습니다. 정확히는 혜비마마와 운왕 전하께요. 그러니 또 마음이 흔들리고도 남으셨습니다.
운왕부에 가택 연금이라니. 일이 일어났던 운왕부에 운왕 전하를 가택 연금한다는 건 놔주겠다는 이야기입니다. 모든 증거는 감춰질 것이고 모두가 증언을 꺼릴 것이며 결국은 유야무야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혜비마마는, 아니, 아시기 때문에 더욱 저러시는 것이겠지요.
혜비마마는 제게 좋은 분이셨습니다. 황후마마는 무척 변덕스러운 분이셨으나 혜비마마는 관대하고 인자하신 분이였어요. 그분은 종종 저를 돌봐 주셨습니다. 제게 맛있는 것을 주시거나 황후마마의 변덕에서 구해 주시거나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럴 때면 그분이 정말 좋은 분인가 생각하게 됩니다. 저에게 좋은 분이, 정말 좋은 사람일까요?
그 생각을 한 순간에 문득.
태자 전하가 생각났습니다. 태자 전하께서는 첨사와 함께 방을 떠나시기 전 “과연.” 하고 중얼거리셨어요. 마치 이 상황을 기다리신 것처럼.
“비전하?”
“잠깐만.”
누군가가 저를 불렀는데 저는 그 사람에게 기다리라고 한 채로 다시 그분을 떠올렸습니다. 과연. 그렇게 말씀하시던 그분의 목소리를요.
과연.
과연.
과연.
그분의 목소리를요.
제가 고개를 드는 순간 보였던 그분의 시선. 찰나와 같이 지나가던 그 눈은 차갑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저와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으셨지만 바로 그 직전에 지었던 표정은 아주 싸늘했어요.
과연.
과연.
과연.
그분의 목소리가 제 귓가에서 맴돌았습니다. 그건, 무슨 뜻이었을까요?
***
태자 전하께서 나들이 채비를 하라 명하셨다며 저녁나절, 궁녀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운왕비 전하가 돌아가시고 운왕 전하가 나포되시고 혜비마마는 석고대죄를 하고 계신데 그 모든 건 남의 일인 것처럼 굴었어요. 실제로 남의 일이기도 했지만요. 그래도 저는 마음이 좋지 않아서 나들이를 할 기분은 아니었어요. 무엇보다 이런 분위기에 나들이를 가다니요. 책잡히기 좋았습니다. 태자 전하의 입지에 좋은 일은 아니었어요.
마음이 무거운 채로 치장이 끝났는데 태자 전하께서 제 처소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분은 들어오시더니 “너무 어여쁘신데.”라며 웃으셨어요. 저는 그분의 옷차림을 멍하니 바라보았습니다. 그분은 마치 평범한 무사처럼 검은 옷에 검 한 자루만 착용한 간소한 차림을 하고 계셨어요. 머리도 풀어서 하나로 묶은 모습이셨어요. 얼굴에서 고귀한 태가 나긴 했으나 태자 전하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차림이었습니다.
“전하?”
“이런 꽃 비녀는 아니 되십니다. 아홉 송이 꽃 비녀라니, 태자비라고 외치는 것도 아니고.”
거울 앞에 앉아 있는 제 뒤로 오셔서 전하께서는 손수 비녀를 빼 주셨어요.
“저, 전하?”
제가 고개를 돌리려 하자 “가만히 계십시오.”라고 말씀하시며 끝까지 제 비녀를 빼신 그분이 가져온 비녀를 궁녀에게 내미셨어요. 궁녀가 재빨리 말을 알아듣고 제 머리를 단아하게 올렸습니다. 마치 여염집 아낙네처럼요.
“…전하. 이게 무슨….”
“우리는 오늘 시장에 나가 볼 겁니다.”
“시장이요?”
전하께서 저를 일으켜 세워서 엉겁결에 일어났습니다.
“알아볼 게 있습니다. 홀로 가기엔 조금 곤란한 곳이라.”
“예?”
“옷을 가져오라.”
전하께서 명하시자 뒤에 있던 내관이 옷을 가져왔습니다. 저는 다시 옷을 갈아입어야 했어요. 병풍 뒤에서 옷을 빠르게 갈아입으며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걸 느꼈습니다. 시장을 간다고요? 저는 시장에 나가 본 적이 한 번도 없는데요. 이런 옷도 입어 본 적이 없습니다. 이건 정말… 여염집 아낙네의 옷 같아요. 제가 평범한 무사의 아내가 된 것 같았습니다.
은 병풍이 치워지자 저는 평소와 달리 평범한 비녀에 머리를 생화로 조금 장식했을 뿐인 상태로, 아주 밋밋한 옷을 입고 태자 전하 앞에 서 있었어요. 우리는 둘 다 평소와는 다른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게 옷을 벗은 것만큼 부끄러웠습니다. 마치 모든 걸 벗어던지고 그저 저라는 사람 그대로, 그리고 태자 전하가 아니신 정이연이라는 남자 앞에 서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머뭇거리자 태자 전하께옵서 장난스럽게 팔을 벌려 보이셨습니다. 오라는 듯이. 얼굴이 확 달아올랐어요.
이런 분이 아니셨습니다. 늘 공명정대하고 선량하며 고요한 태자셨어요. 우아한 법도 그 자체이신 분이었습니다. 장난기도 없으셨고 가끔 어여쁜 것이 보이면 가져다주시는 것이 일탈이라면 일탈인, 제 머리에 꽃을 꽂아 주시는 것조차 일탈처럼 느껴지실 정도로 그림 같은 태자셨는데.
그런데도 거부감도 어색함도 없어요. 원래 이런 분이셨구나. 사실은 이런 분이셨는데 그저 인내하셨을 뿐이었구나, 생각할 따름이었습니다.
뛰어들진 못했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으니까요.
빨개진 얼굴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숙인 채로 조금씩 걸어서 그분의 앞에 섰습니다. 품 안으로 걸어 들어가자 그분이 “잘하셨습니다.”라며 저를 끌어안으셨어요.
“여보, 라고 불러 보세요.”
귀가 뜨거워졌어요. 온 혈관에 열기가 가득해서 숨이 막혔습니다. 몸이 빵 터져 버릴 것 같았어요. 못 한다고 고개를 젓자 전하께서 웃으셨습니다.
“하셔야 하는데, 이를 어쩐다.”
“…….”
“여보, 서혜야.”
고개를 들 수가 없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