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이, 이 사람이 비께 모질게 군 거 압니다.”
그분은 횡설수설하셨습니다. 저는 침의를 입고 침상에 앉아 금금을 덮은 채 그분이 무릎을 꿇으신 걸 내려다봤어요. 여전히 꿈인 듯 몽롱했습니다.
“태자비께서 이 사람에게 화가 많이 나셨을 거라는 것도 압니다.”
종루에서 울리는 종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뎅, 뎅, 뎅. 그 종소리를 무의식중에 세 보았어요. 그러고 나서야 저는 지금 시간이 축시(새벽 1시~3시)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축시가 시작도 되기 전에, 아직 귀문도 닫히지 않은 시간에 혜비마마께옵서 몸소 동궁에 오신 것입니다
“마마, 귀문이 닫히지 않은 시간에 어이하여 거동하십니까?”
갑작스레 일어난 탓인가, 머리가 많이 무거웠습니다. 귀문을 운운하는 저를 혜비마마는 귀신이라도 본 듯한 얼굴로 올려다보셨어요. 이윽고 그분은 어처구니없는 목소리로 물으셨습니다.
“모르는 겝니까?”
“…무엇을 말이옵니까?”
혜비마마가 벌떡 일어나셨어요. 그분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셨어요. 같은 품계라고는 해도 혜비마마는 저에게 어머니뻘이십니다. 그러니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머리가 너무 무거웠어요. 궁녀에게 손짓하여 부축해 달라고 하자 혜비마마께옵서 “아, 아닙니다. 그냥 앉아 있어요.”라며 저를 달래셨어요. 그분은 어찌할 바를 모르는 채로 저를 내려다보시다가 문득 의아한 얼굴로 서 상궁을 돌아보셨습니다.
“비전하께서 어찌 이러시느냐?”
“안면향으로 잠드신 지 반 시진이 정도 지났을 뿐이라 지금 무척 힘겨우실 걸로 아뢰옵니다.”
“안면향? 그 물건을 써야 할 정도로 불면이 심하신가?”
서 상궁은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정1품인 혜비마마의 하문에 대답하지 않는다는 건 그보다 더 높은 분의 사주를 받았다는 의미밖에 되지 않는지라 혜비마마는 알겠다는 듯이 혀를 차셨어요. 그분은 초조하게 제 앞을 서성이셨습니다.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정리하시는 거 같았어요. 그분의 귀걸이가 찰랑거렸습니다.
정1품의 상징인 아홉 송이의 꽃 비녀가 그분의 머리를 아름답게 꾸미고 있었어요. 높게 틀어 올린 머리는 우아하면서도 웅장했습니다. 하늘하늘한 몸매에 얇은 비단을 겹겹이 겹쳐 입으신 모습이 무척 아름다우셨으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으셨고 걸음걸이는 어지럽기 그지없었습니다.
그사이 정신이 좀 든 제가 고개를 돌려 서 상궁에게 시선을 주었어요. 무슨 일이냐고 묻자 서 상궁이 혜비마마의 눈치를 보다가 입을 벙긋거렸습니다. 운왕 전하. 운왕이라는 두 글자에 반쯤 돌아왔던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운왕이라고?
하기야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혜비마마께옵서 이토록 이성을 잃으시는 건 늘 운왕 전하에 관련된 일이었으니까요.
“마마.”
제가 혜비마마를 부르자 그분이 어쩔 수 없이 저를 돌아보셨습니다. 곤혹스러움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눈이었어요. 그러나 비장함도 엿보이는 것으로 보아 쉽사리 물러가시지 않으리라는 게 분명해 보였습니다.
“운왕이, 모함을 당했습니다.”
혜비마마의 말에 순간 실소가 터져 나올 뻔했습니다. 고작 한 마디인데도 그럴 리 없다는 생각이 장히 들었어요. 이 황도에서, 태자 전하만큼이나 위세가 등등하시다는 운왕 전하를 그 누가 감히 모함할 수 있단 말입니까?
티를 내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약간은 티가 난 듯, 아니면 그동안 운왕 전하의 악명 때문이었는지 혜비마마께서 저를 빤히 내려다보셨어요. 그분은 모욕이라도 당하신 얼굴을 하셨다가 결국 슬프게 눈을 내리까셨어요.
“운왕이….”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꺼내셨습니다.
“운왕이 거친 성정이라는 건 압니다. 그리고 태자비께는 잘못했지요. 그것도 압니다. 하지만 사람을 죽일 아이는….”
“사람을 죽일 아이는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려는 혜비마마를 어이가 없어서 올려다봤어요. 운왕 전하가 사람을 죽일 분이 아니라고요? 그분이 죽인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제가 아는 사람만 열 명이 넘을 텐데. 그리고 이 제국의 태자를 불태워 죽이려고 하신 분인데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요? 그 일을 누가 저질렀는지 이 황궁에서 모르는 사람이 있기는 한 겁니까?
“최소한 자기 지어미를 죽일 아이는 아니에요!”
혜비마마께서 비명을 지르셨어요.
“운왕비께서 돌아가셨나이까?”
몸이 약해져 온천 별궁으로 요양하러 떠나셨다 들었는데 어찌하여 돌아가시게 된 거지? 제가 여쭙자 혜비마마께서 섬섬옥수 같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셨어요. 미칠 것 같은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습니다.
생전의 운왕비전하를 떠올리면 늘 그분의 하얀 얼굴과 나직한 목소리, 그리고 있는 듯 없는 듯 계시던 조용한 존재감만 떠오릅니다. 그분은 운왕 전하의 곁에 늘 고요히 계셨어요.
운왕 전하께옵서는 호방하신 분이라 풍류를 즐기셨지만 정작 중요한 자리에 첩을 대동하신 적은 없었습니다. 다른 분들이 첩을 대동할 때도 그분은 반드시 왕비 전하를 동행하시거나, 왕비 전하께서 몸이 안 좋으시면 홀로 연회에 참석하셨습니다.
홀로 연회에 참석하시어 무희를 희롱하시거나 하여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셨지만 정작 옆자리에는 아무도 앉히지 않는 분이셨습니다. 운왕부 내에서 운왕비 전하의 입지는 절대적이라고 들었는데 그분이 돌아가셨다고요?
운왕 전하를 좋아하진 않지만 그분이 운왕비 전하를 상당히 특별하게 대하신다는 건 알 수 있었습니다.
제 눈이 흔들리자 혜비마마께옵서 제 침상의 앞으로 달려와 미끄러지듯 무릎을 꿇으셨습니다. 그리고 제 손을 붙잡으셨어요.
“태자비께서도 아시잖습니까? 운왕은 제 지어미를 아주 아꼈습니다.”
하지만 저는 운왕 전하께서 아주 변덕이 심한 분이라는 것도 압니다. 그리고 제가 그분을 옹호할 수 있을 만큼 그분에 대해 잘 아는 게 아니라는 사실도 인지하고 있고요. 운왕비 전하가 아니라면 그분은 누구든 죽이고도 남을 분입니다.
무엇보다 운왕비 전하의 살해 혐의를 운왕 전하께서 받고 계시다는 건 알겠는데 제가 뭐라고 이 사안에 대해 입을 댈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럴 주제가 안 됩니다.
“…마마, 제가 무슨 주제로 도움을 드릴 수 있다고 귀문도 닫히지 않은 시간에 이리 급히 오셨는지….”
“태자 전하께옵서 사건을 심리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아….”
이제 알 것 같았습니다.
운왕비 전하께옵서 살해당하셨고 그 혐의를 운왕 전하께서 받고 계시는 상황. 태자 전하께옵서 사건의 심리를 맡게 되시자 혜비 마마는 마음이 급해지신 것입니다. 그분은 혹여 태자 전하께서 사감으로 송사를 해결하실까 저어하여 저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토록 다급히.
그런데 어떻게 태자 전하께서 이런 사건의 심리를 맡게 되셨을까요? 운왕 전하를 아끼시는 황상께옵서 이 사건의 심리를 다른 사람도 아닌 태자 전하께 맡기셨을 리가 없는데.
“그만하십시오.”
“태자 전하 납시오.”라는 목소리가 조금 더 늦게 따라 들어온 것은 전하께옵서 워낙 빠르고 완강한 걸음으로 들어오셨기 때문이셨을 겁니다. 그분은 들어오시자마자 무릎을 꿇고 계시는 혜비 마마를 탐탁잖게 바라보셨어요.
“마마, 뭐 하시는 겁니까?”
혜비마마는 엉거주춤하게 몸을 일으키셨어요. 무릎을 꿇고 있었던 것에 대해 수치스러워하시는 게 느껴졌습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저와는 나름대로 친분이 있으신 분이셨어요. 황후마마보다 더 절 챙겨 주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니 저에게는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보이실 수 있지만 태자 전하하고는 달랐습니다. 사이가 좋은 편이라고 하긴 어려웠습니다.
당연한 일이었어요. 태자 전하의 친모이신 황후마마와 혜비마마 사이에는 깊은 골이 있었고, 또 장황자이신 운왕 전하께서 동궁을 차지하지 못하신 것에 대한 분노와 그 분노를 감당해야 했던 태자 전하의 속 불편함이 있었으니까요.
“태자 전하.”
혜비 마마가 태자 전하께 인사를 올리자 전하께서도 맞인사를 하셨습니다. 하지만 서로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어요. 서로 상대가 자리를 피했으면 하는 내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전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피곤합니다만.”
아주 노골적인 축객령이었습니다. 피곤하여 잠자리에 들어야 하니 그만 가 보라는 말이 무척 무례했어요. 혜비마마의 얼굴이 모욕감으로 새파랗게 굳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저에게 할 말이 더 있으신 것 같았습니다. 아니, 어쩌면 저에게 들을 말이 있으신 건지도 모르겠어요. 도와주겠다는 약조를 받고 싶으실 테니까요. 물러나지 못한 채 그분은 머뭇거리셨습니다.
“마마?”
겉옷을 손수 벗어 내관에게 건네며 태자 전하께서 재촉하셨습니다. 안 나가고 뭐 하냐는 듯이. 혜비마마가 제게 시선을 주셨어요. 도와 달라는 그 시선을 보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습니다. 뭐라 할까요? 그분은 저의 지아비시고 이 밤을 저와 함께 보낼 권리가 있으신 분입니다.
…아니, 아니요.
정확하게 말해 저는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제가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왜 제가 태자 전하가 아닌 혜비마마를 선택하겠습니까. 그분이 저를 모함하셔서가 아니에요. 그분이 얼마나 나쁜 분이든 혹은 좋은 분이든 상관없습니다.
저에겐 태자 전하와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라는 게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비전하.”
혜비마마가 애원하듯 저를 부르셔서 저는 그분의 시선을 어색하게 외면했습니다. 제 외면에 그분이 “비전하…!” 하고 한 번 더 저를 불렀어요. 애끓는 그 목소리. 그분의 안에서 끓어오르는 건 아마 모정이었을 겁니다.
저는 대답하지 않고 바라보지 않았어요. 그러자 혜비마마가 읏, 하고 신음하시는 게 들렸어요. 많이 곤란했습니다. 동궁에 소속되어 있지만 태자비로서 후궁과는 밀접한 관계를 맺어야 하니까요. 특히 혜비마마는 황상의 총애를 받으시는 분이니 제가 거스르는 일이 없어야 하는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훗날의 일은 훗날에 생각하는 것으로 미뤄 두고 저는 끝까지 눈을 내리깔았습니다. 그러자 태자 전하께서 제 앞을 가리듯 막으셨어요.
“돌아가 주십시오, 혜비마마.”
더 이상 혜비마마께옵서 버티실 재간은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