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몽중연 (23)화 (23/100)

23.

월아를 태의원으로 보내는 일은 무척 간단했습니다. 그러나 월아는 정작 태의원에 갈 수 있게 되었는데도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녀는 저와 필담으로 자신의 뜻을 고하였는데 그녀의 뜻은 저의 곁에서 도움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녀를 말렸어요. 제가 역적의 딸임에는 변함이 없으니 언제든지 제 처지가 위험해질 수 있음을 알려 주었으나 그녀는 요지부동이었습니다.

대장부로 태어나지는 않았으나 관리의 길에 들어 권세의 틈에서 살아왔습니다. 자신을 알아주는 주인을 만나는 것이 모든 관리의 소망이지 않겠습니까.

소망….

저는 그런 걸 가져 본 적이 없었습니다. 한 번도 없었어요. 그저 살아가는 데 급급했을 뿐입니다. 아니, 딱 한 번 가져 본 적이 있지요. 태자 전하를 구하려고 했을 때. 그때 저는 무엇을 걸어서라도 그분을 구하고 싶었고, 그것은 소망이라는 말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그것이 네 소망이라면.”

월아의 소망을 꺾고 싶진 않았습니다. 소망이라는 것의 간절함을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녀는 저에게 잘해 주었습니다. 저는 갚을 은혜가 있어요.

“사람을 가리시는 비께서 누구를 들이셨다던데?”

예전과는 달리 저의 모든 걸 궁금해하시고 그걸 숨기지도 않는 태자 전하께옵서는 데리고 온 궁녀가 누구냐 하문하셨습니다. 예전에는 이러지 않으셨어요. 제가 하는 일을 아시고 계시긴 했지만 아는 척도 하지 않으셨고 가끔 저의 친정이 곤란한 일을 벌이거나 할 때만 제재를 가하시는 정도였어요. 그러나 이제는 아니셨습니다. 그분은 저의 모든 걸 알고 계셨어요. 저에게 간자를 붙였다는 걸 노골적으로 드러내셨습니다.

“예, 전하.”

태자 전하의 탈의 시중을 들려고 하자 전하께옵서 제 손을 거절하고 내관들에게 시중을 들게 했습니다. 그분은 가벼운 침의 정도가 아니면 제가 그분의 옷을 드는 걸 탐탁잖게 여기셨어요. 무겁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제가 “예, 전하.”라고만 대답할 뿐 뒷말이 없자 전하께옵서 눈을 가늘게 뜨셨습니다. 그분은 제 속내를 가늠해보려는 듯 제 얼굴을 바라보셨어요. 이윽고 차림이 가벼워진 채로 저에게 다가와 제 뺨을 손가락 두 개로 쓸어내리셨습니다.

“누구를, 왜 들이셨는지 몹시 궁금하여 장계가 눈에 들어오질 않더군요.”

“…….”

“계집이라 다행입니다. 사내를 들이시고 이리 뜸을 들이셨다면 목을 쳤을 터인데.”

목을 친다는 말에 당황했습니다. 태자 전하께서는 곱게 웃고 계셨지만 그 눈빛만은 사나워 진심이심을 알 수 있었어요. 제가 조심스럽게 “신첩의 목을 말이옵니까?”라고 여쭈자 그분이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저를 내려다보셨어요.

“제가 비의 이 가느다란 목을?”

제 턱에 멈추어 있던 태자 전하의 손가락이 목으로 내려오는 게 느껴졌습니다. 이윽고 그분이 고소를 머금은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차라리 제 목을 찔러 죽겠습니다.”

“전하…!”

놀라서 그분을 부르자 그분이 “서혜야.”라고 나직이 저를 부르셨습니다. 저도 모르게 몸이 파르르 떨렸어요. 그분이 그렇게 저를 부르실 때는 언제나 잠자리에서뿐이었기 때문이었어요. 당황했습니다. 고작 한 마디에 잠자리에 든 것처럼 몸이 오싹해지는 게 정상은 아닌 것처럼 느껴졌어요.

우린 눈이 마주쳤습니다. 태자 전하는 제 얼굴을 보고 제 상태를 눈치채신 것 같았어요. 그분의 얼굴에 떠오른 놀라운 기쁨이 저에게는 수치스러움으로 다가왔습니다. 고개를 돌려 그분을 외면하자 그분의 무지(엄지손가락)가 제 입술을 스쳤어요.

“입술연지가….”

제가 나지막이 말씀드렸지만 태자 전하께서는 선선히 웃으며 고개를 저으셨습니다.

“늘 먹는 것인데 손에 좀 묻음 어떻습니까.”

궁녀와 내관들이 눈치껏 물러나는 게 느껴졌습니다. 문이 소리 없이 닫히고 단둘이 되자마자 태자 전하께서 제 허리를 잡아 바싹 당기셨어요. 몸이 끌려 들어가는데도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심장이 쿵쿵 뛰었어요. 태자 전하의 손가락이 제 입술을 살짝 힘주어 누르더니 입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벌려 보세요.”

미끄러져 들어오는 손가락이 제 혀를 누르고 있었어요. 눈을 감고 입을 벌리자 제 입 안을 전하의 손가락이 휘저었어요. “응.” 목에서 신음이 뭉쳤습니다. 제대로 신음을 낼 수도 없었어요.

“넣고 싶어.”

전하가 나지막이 속삭였습니다. 어디에, 무엇을. 그분은 이야기해 주지 않으셨어요. 입 안에, 아니면 아래쪽에. 어느 쪽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머리가 몽롱했어요. 숨이 조금씩 모자랐는데 그래도 손가락을 뱉고 싶진 않았어요. 등이 달달 떨렸습니다.

“서혜야.”

전하께서 제 귓가에 대고 제 이름을 부르셨어요. 제가 흠칫하자 그분이 저를 달래듯 제 허리를 쓰다듬으며 말씀하셨습니다.

“너와 하고 싶어.”

“전하.”

“그 짓이 하고 싶어 조정의 목소리도 장계의 글자도 통 들어오지 않으니 큰일입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전하의 몸이 저에게 닿았어요. 그분의 다리 사이가 제 몸에 닿았고, 그 부분이 단단해져 있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고개를 저었어요. 거부할 생각도 없었고 그럴 권리가 없다는 걸 잘 아는데도 저도 모르게 해 버린 행동이었습니다.

이상한 일이었어요. 살아 돌아온 이후, 저는 제 몸을 제 뜻대로 잘 가눌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당혹스럽고 부끄러운 일투성이라 그저 숨을 삼키는 데 급급할 뿐입니다.

잠자리를 거부하는 건 매우 불경한 짓입니다. 그런데도 태자 전하는 저를 탓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어째서, 응?”

애가 닳은 목소리가.

“내가 싫은가?”

아닌 줄 아시면서도 웃음기에 젖은 그 농 짙은 목소리가 너무 퇴폐적이라서 도망가고 싶어졌습니다. 그분의 혀가 제 귓불을 핥아 올렸을 때 저는 그분을 밀칠 뻔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저를 꽉 끌어안은 채 “진정으로 거부하는 건 아니지, 응?” 하고 물으셨습니다. 진정으로 거부한다고 대답하면 놓아주실 것처럼요.

저는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진정으로 거부하는 건 아니지만 아니라고 말하는 건 더 부끄러운 일인 것 같았고,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가운데 심장만 거세게 뛰어서….

“태자 전하.”

문밖에서 내관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첨사가 급히 배알코저 하나이다.”

뜨겁게 달아오른 심장에 차가운 물벼락이 떨어진 기분이었습니다. 늦은 시간, 심지어 제 처소로 오신 태자 전하를 뵈러 태자부를 관장하는 첨사가 왔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발긋하게 물들었던 가슴은 걱정으로 새파랗게 질렸습니다. 태자 전하께서 문밖에 대고 물으셨습니다.

“첨사가?”

제 얼굴이 어떠하였는지 모르나 태자 전하께서는 혀를 차시며 저를 당겨 품에 안으셨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분은 나지막이 속삭이셨어요.

“제가 있지 않습니까. 이제 제가 여기에 있어요. 아무도 비께 위협을 가할 수 없습니다.”

태자 전하의 옷자락을 잡고 그 품에 꾹 얼굴이 눌러진 채로 눈을 깜빡였어요. 이 분은 제가 뭘 두려워하는지 모르시는 겁니다. 저는 저의 안위를 걱정하는 게 아닙니다. 제가 걱정하는 건 태자 전하세요. 그분의 안위, 그분의 입지. 제가 걱정하는 건 그런 것인데 태자 전하는 전혀 모르고 계십니다.

“저는….”

제가 고개를 들어 제 마음을 피력하려고 했을 때 장지문 밖에서 첨사가 대답했습니다.

“황상께옵서 급히 찾으시옵니다. 뫼시러 왔나이다.”

“과연.”

태자 전하께서 작게 중얼거리셨습니다. 마치 기다리셨다는 것처럼요.

저는 그분을 올려다보았습니다. 눈이 마주치자 그분이 싱긋 웃으셨어요. 그분은 제 이마에 붙은 꽃 장식 위에 입을 맞추고는 다정하게도 눈을 마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금야는 늦겠습니다. 기다리지 마시고 주무신다고 약조하세요.”

“무슨 일이신지….”

“가 봐야 압니다. 여하간, 주무세요. 아시겠습니까?”

걱정이 되어 잠들 수 있을지 대답하기 어려웠습니다. 제가 대답하지 못하자 전하께옵서 제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대셨어요.

“저는 진선전에 가야 합니다. 진선전에 간 제가 비의 걱정을 하느라 노심초사하면 좋겠습니까?”

이렇게 말씀하시면 저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제가 고개를 젓자 그분이 제 입술에 입을 맞추셨어요. 가볍게 입을 맞춘 그분이 입술을 떼었고 우리는 눈이 마주쳤습니다. 걱정하는 저와 웃고 있는 그분의 눈이 마주친 순간에.

왜 그랬는지는 정말 모르겠는데.

그리고 누가 먼저 그랬는지도 모르겠는데.

그분은 저를 끌어안으셨고 저도 그분의 목에 매달렸습니다. 입을 맞췄어요. 몇 번이고 입술을 벌려 혀를 섞었습니다. 거친 접문이었어요. 갈급한 혀가 제 타액을 모조리 가져갔습니다. “더 줘, 서혜야.” 그분이 속삭였어요. “더 마시고 싶어.” 그분의 말에 제가 고개를 젓자 그분이 날카롭게 말씀하셨어요. “내놔, 어서.” 다시 붙들려 입술을 빨렸습니다. 제 입 안에 고여 있는 타액을 혀로 퍼 가신 그분이 제 입 안을 부드럽게 유영하셨어요. 그리고 그분의 혀가 닿는 곳마다 찌릿찌릿 울려서 저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습니다.

이윽고 정신이 들었을 때는 침상 위였습니다. 태자 전하께서는 저를 침상에 앉히시고 제 이마에 마지막으로 입을 맞추신 뒤, 그리고 또 맞추시고, 또 입을 맞추신 뒤, 떠나실 수 없는 분처럼 그걸 몇 번이고 반복하시다 “전하…!”라고 첨사가 재촉해 와서야 겨우 방을 떠나셨습니다.

전하께서 누우라 하셨다며 궁녀들이 저를 눕혔습니다. 자신들이 경을 친다며 호들갑을 떠는 모습에 어쩔 수 없이 침상에 누웠지만 잠은 한참 동안 오지 않았습니다. 황상께서 급히 부른 이유가 무엇일지, 혹시 태자 전하께옵서 불길한 일에 휘말리시는 건 아닐지 걱정이 되었거든요.

보다 못한 서 상궁이 향초를 피웠습니다. 안면초라고 불리우는 향초는 마음을 진정시켜 주고 잠을 잘 자게 하는 효과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향이 방 안에 가득 퍼지자 천천히 잠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걱정 때문에 잠이 들어서도 내내 걱정만 하고 있었습니다. 자는 건지 깨 있는 건지 구분이 가지 않을 지경이었어요. 왜 부르셨을까. 태자 전하께서 황상께 미운털이 박혔다고는 들었는데 뭔가 잘못되지는 않았겠지? 걱정에 걱정이 쌓여 차라리 이럴 바엔 일어나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을 무렵이었습니다.

“비전하, 비전하. 일어나세요.”

황급한 목소리로 궁녀가 깨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벌써 아침인가? 아침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다급히 깨울 용건이 무엇일까? 혹시 태자 전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그렇게 생각하자 몸을 벌떡 일으키고 싶은데 마음뿐이었습니다. 실제로는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가 않았어요. 무척 몸이 무겁고 정신을 깨우기도 힘들었습니다.

“비전하.”

궁녀가 다시 저를 부르는 순간에.

“마마, 혜비마마. 비전하께서는 아직 침상에 계시어….”

“그게 뭐가 어떻다는 것이냐? 어서 비키지 못할까!”

“마마,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잠시간 기다려 주시오면….”

“나는 정1품 혜비다. 너 따위가 막을 지위가 아니란 말이다. 여봐라!”

밖의 소란이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 소란에 멍하니 장지문을 바라봤어요. 혜비마마는 저런 성정의 분이 아니십니다. 남의 궁에 들어와 정1품 혜비임을 들먹이며 궁녀를 핍박하시는 몰상식하고 무례하고 법도 없는 분이 아니신데.

“무슨 일이냐?”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물었을 때였습니다. 궁녀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장지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리고 혜비마마께옵서 들어오고 계셨습니다. 화난 기색이 역력한 움직임이셨어요. 성큼성큼 걸어오시는 그분을 그저 홀연히 바라보았습니다. 솔직히 귀신에 씌인 분을 뵙는 듯한 기분이었어요. 그 정도로 현실감이 없었습니다.

그분이 침상에 앉아 있는 제 앞에 서 계신 순간 ‘아, 어쩌면 뺨을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분의 손이 움직이는 순간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어요. 맞는 건가, 하고요. 하지만 제 생각은 틀렸습니다. 혜비마마는 제 침상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태자비…!” 하고 저를 부르셨습니다.

간절하고 애절하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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