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몽중연 (21)화 (21/100)

21.

헉.

무언가가 제 몸을 들이받았어요. 헉, 하는 소리와 함께 저는 눈을 번쩍 떴습니다.

“비?”

황상, 아니, 아니….

“태자 전하?”

이제는 두 분 다 화상이 없는지라 조금 혼란스러웠으나 곧 누군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태자 전하였어요. 그렇다는 건 제가 현실에 돌아왔다는 뜻이 됩니다. …어떻게?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어요. 무슨 일이 있었지? 생각해 보려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건…. 아아, 어떤 궁녀에게 찔려서 저는 죽어 가고 있었는데…. 왜 여기로 돌아올 수 있었죠? 무엇보다 지금, 어디인 거죠? 어느 시점인 거죠? 저는 어디에 돌아와 있는…?

“비가 돌아왔다.”

누워 있는 제 위에 몸을 드리우고 계신 태자 전하께옵서 낮은 목소리로 고하셨어요. 그러자 장지문 밖에서 다시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고어를 읊는 목소리는 제가 아는 사람의 것이었습니다.

고모님?

고개를 돌렸을 때였어요. 그때 턱을 잡혔습니다. 제 턱을 잡고 돌리신 태자 전하께옵서 “저를 보세요.”라고 나지막이 속삭이셨어요. 하아…. 그분의 작은 숨소리에서 묻어나는 정염에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왜, 왜?

그때, 다시 한번 단단한 것이 저를 들이받았어요. 충격에 눈이 크게 뜨였습니다. 무슨…. 저도 모르게 고개를 내렸어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내리지 않을 수 없었어요. 왜냐하면.

“이제 느껴지십니까?”

왜냐하면….

“아까부터 비의 안에 있었습니다.”

그분의 것이 제 안에 있었기 때문에.

“아까부터.”

태자 전하께옵서 고개를 숙이셨어요. 제 귓가에 대고 소곤거리셨습니다.

“참고 있느라 죽을 지경입니다.”

“저, 전하….”

“서혜야.”

서혜야, 라고 저를 부르시는 건 처음이라 당황했어요. 그런데 더 당혹스러운 건 그 순간에 제가, 그분을 조였다는 겁니다. 신음은 간신히 참았지만 제 몸이 조여드는 건 저도 어쩔 수가 없었어요.

아. 태자 전하께서 신음하셨어요. 그분은 신음을 참지 않으셨어요. 아니, 보란 듯이 뱉으셨어요. 저에게 보여 주는 것처럼요.

“…좋아….”

눈을 감은 그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어요. 그분이 파정을 참고 계시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 정욕으로 한껏 흐트러진 얼굴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어요. 장지문 밖에 고모님이 계시다는 걸 알면서도 응, 하고 신음이 흘러나오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태자 전하께서 하하 웃으셨어요. 그분이 웃으실 때마다 제 안에 있는 그분의 몸이 진동하는 게 느껴졌습니다. 그분이 이마를 맞대고 속삭이셨어요.

“당신도 좋으십니까?”

대답할 수 없어. 대답할 수 없습니다. 저는….

제가 고개를 돌려 장지문을 바라봤어요. 거기에 누가 계시는지 알고 있다는 뜻으로. 그러자 그분이 고개를 끄덕이셨어요. 알겠다는 듯이. 그리고 제 뺨을 길게 핥아 올리셨습니다. 짐승 같았어요. 그분의 몸이 뒤로 조금 빠졌을 때, 저는 아, 하고 신음이 나오는 걸 참지 못했습니다. 안타까웠는지 안도했는지 그건 잘 모르겠어요.

퍽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그분이 들어왔을 때 벌린 입에서 비명이 나올 뻔했습니다. 그 입을 막은 건 그분의 손이었어요. 손바닥이 제 혀에 닿았습니다. 그분의 단단한 손안에서 제 비명이 사그라들었지만 저와 그분의 귀에는 분명히 들렸습니다. 그 비명은 교태로 가득 차 있었어요.

“예쁜 물이 나오고 있어요.”

그분이 속삭였습니다. 저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게요. 저는 당황했어요. 무슨 뜻인지는 알지만 이런 음담을 태자 전하께서 하셨다는 게 믿기지 않았습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많은 잠자리를 했지만 언제나 조용했거든요. 점잖은 잠자리를 했었는데. 제가 눈을 미친 듯이 깜빡이자 그분이 속삭였어요.

“언제나, 사실은.”

그분의 손이 제 가슴을 움켜쥐었어요. 가슴 끝을 희롱하는 손가락에서 굳은살이 느껴졌습니다. 검을 잡으면 맹장이자 지장, 붓을 잡으면 뛰어난 명필이 되는 그 훌륭한 손이 제 가슴을 희롱하는 데 쓰이고 있었습니다. 거침없으면서 세심한 손길에 어쩔 줄을 몰라 고개를 저었어요. 그분이 제 가슴 끝을 손톱으로 누르실 때마다 몸이 튀어 올랐습니다.

“이렇게 하고 싶었습니다.”

“저, 전하…!”

“음탕하게.”

우는 당신이 보고 싶었습니다.

뒷말은 너무 작아서 제 귀에도 겨우 들릴 정도였어요. 하지만 분명히 들렸습니다. 당혹스러웠어요. 분명 저는 잠자리에 대한 교육도 받았습니다. 좋은 아내는 순종적으로, 사랑스럽게 남편의 시중을 들어야 한다고 배웠어요. 사랑스럽게? 이게 어떻게 사랑스러울 수 있죠. 저는 지금 정신을 차릴 수가 없고, 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모르겠는데요.

가슴이 거칠게 잡혔어요. 비틀려서 아팠어요. “아파….” 그렇게 속삭이는 제 목소리가 거짓으로 가득 차 있어 스스로 놀랄 지경이었습니다. 그 목소리는 아파한다기보단 좋아하는 것처럼 들렸어요. 저 자신도 혼란스러웠어요. 제가 좋아하는 건지 싫어하는 건지 아파하는 건지 알 수 없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제가 그럴지언데.

“아프다고요?”

듣는 태자 전하께옵서는.

“이렇게, 조이면서?”

조금도 믿지 않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손가락 사이에 유두가 잡히고 그 상태로 가슴이 비틀렸어요. 전하께옵서 저를 마구잡이로 흔드셨습니다. 눈앞이 번쩍거렸어요. 그분이 입을 막아 주지 않으셨더라면 비명을 계속 내질렀을 것 같습니다. 아프고, 좋고, 이상했어요. 그래요, 이상했어요.

고모님은 무언가 주문을 읊고 계셨고, 전하께서는 번들거리는 눈으로 저를 안고 계셨어요.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습니다. 읍, 읍. 제가 입이 막힌 채 비명을 삼키자 그분이 속삭였어요. 어여쁘구나, 내 서혜.

배에 힘이 들어갔어요. 발가락이 곱고 몸이 덜덜 떨렸습니다. 아무리 그러지 않으려고 애써도 저는 그분을 조이고 또 조였어요. 그분은 화답하는 것처럼 더욱 거칠어지셨습니다. 어딘가로 떠밀려 가고 있었어요. 다급하게. 그분의 입술에 제 얼굴 곳곳에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눈앞이 완전히 흐릿하게 변했습니다. 몸이 뜨겁게 타올라 머리가 아득해졌어요. 아찔한 곳에서 떨어져 천천히 구름 위에 안착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구름 위에 눕는 것과 거의 동시에 그분도 제 안 깊숙이 들어오시며 읏, 하고 신음을 삼키셨습니다. 전하께옵서 사정하셨다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여쭙고 싶은데 갑자기 잠이 쏟아졌습니다. 머리가 어지러웠어요. 구름 속으로 파묻히고 있었습니다.

“비?”

“…….”

“태의를 불러라!”

전하께서 저를 안으시는 게 느껴졌습니다. 그것을 끝으로 저는 완전히 정신을 잃었습니다.

***

눈을 떴을 때는 기러기가 날아가는 오후였습니다. 눈을 뜨자마자 멀리 노을 진 하늘에서 기러기 떼가 나는 게 보였어요. 어쩌면 학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눈이 좋은 편은 아니라서요. 새 무리가 노을 진 하늘을 날아가는데 일정한 배열 중 한 자리가 비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가 빠진 것처럼 어색하여 괜히 눈을 뗄 수 없었어요.

“비전하!”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서 상궁이 보였습니다. 꿈에서도 제 시중을 들었던 서 상궁이지만 꿈속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그녀가 반가웠어요. 몸을 일으키며 그녀에게 웃어 보였어요.

“서 상궁.”

“비전하, 천녀가 인사 올리옵니다.”

서 상궁이 울음을 참고 말하며 무릎을 꿇었어요. 그 뒤로 모든 궁녀가 일제히 무릎을 꿇었습니다. 은구슬과 옥구슬로 만든 발이 흔들려 청아한 소리를 냈어요. 바람이 찼습니다. 이곳도 곧 겨울인가 봅니다.

“복권되심을 경하드리옵니다.”

복권이 되었다 함은 제가 다시 태자비의 자리에 올랐다는 뜻일 터인데… 어찌하여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무엇보다 죽었을 제가 어찌 다시 되살아날 수 있었던 걸까요? 꿈은 꿈이었을 뿐, 실제로 저는 죽지 않았던 걸까요? 꿈과 현실이 뒤섞여 정신이 없었습니다.

서 상궁은 저에게 죽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좁쌀죽이 왔습니다. 서 상궁이 손수 저에게 휘건을 깔아 주었어요. 입 안이 깔깔하여 입맛이 없었지만 어쩔 수 없이 두 술 떴습니다. 그러나 두 술이 한계였어요. 도저히 더는 넘어가질 않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찌된 일이지?”

서 상궁에게 죽을 물리며 묻자 서 상궁이 저에게 아는 대로 고해 왔습니다.

서 상궁의 말에 따르면 추국장에서 풀려난 저는 그대로 쓰러져 고열에 시달렸습니다. 생사의 갈림길에 서자 태자 전하께옵서는 백방으로 저를 살릴 길을 모색하시는 한편 저의 복권을 강력하게 주장하셨다고 합니다.

“복권이 가능할 리가.”

“복권이라기보다는 절혼이 되지 않은 상태셨기 때문에….”

“폐위에 대한 성지는 이미 내려졌었다! 그럼 폐하께 황명을 번복하시라 청한 건데, 항명이지 않느냐!”

황명에 불복하시다니 그것은 곧 동궁의 자리도 버리고 전하의 목숨도 위태로워진다는 걸 의미했습니다만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비전하, 비전하께옵서는 태자 전하를 구하신 공으로서 심가와의 절연을 인정받으신 것이옵니다.”

서 상궁의 말에 저도 모르게 침대를 내리쳤습니다. 푹신한 이불이라 탁 소리밖에 안 났는데 그게 더 제 분을 돋우었습니다. 입에서 큰 소리가 나왔어요.

“내가 바보인 줄 아느냐!”

제 낮은 고함에 서 상궁이 다시 바닥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이윽고 나지막이 저에게 속삭이듯 말했습니다.

“이번 사건을 전부 불문에 부치신다고 하옵니다.”

눈이 커졌습니다. 손이 바들바들 떨렸어요. 저는 제 떨리는 손을 멍하니 내려다보았습니다. 피죽도 못 얻어먹은 듯 뼈마디만 남은 손이 덜덜 떨리는 게 흉측하게 느껴졌습니다. 그 손을 금금 안에 넣어 숨기고 싶은데 그럴 힘이 없었습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어요.

동궁에 불이 났습니다. 누군가가 태자 전하께 약을 먹이고 고의로 동궁에 불을 질러 암살을 시도했어요. 황궁이 비어 있었어요. 누구인지 우리 모두 다 압니다. 그런데 불문에 부친다고요?

알 거 같습니다.

운왕을 귀히 여기시는 운왕의 어머니, 혜비마마께옵서 황상께 비셨겠지요. 황상께옵서는 운왕의 무사를 위해서 저를 복권시켜 주신 겁니다. 이건 태자 전하와 황상 사이의 거래였던 겁니다. 그리고 어느 제왕도 자신과 거래하고자 하는 자식이나 신하를 기껍게 여기지 않습니다.

축하라니.

하…. 저는 어이가 없어서 창밖을 바라보았어요. 이제 새 무리는 없고 창밖은 조금 어두워졌습니다. 곧 땅거미가 질 거 같았어요.

저는 태자 전하를 구하고 싶었어요. 그분은 저의 지아비시고 저에게 잘해 준 유일한 분이니까요. 그분께… 저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그게 연정이 된 건 얼마 안 되었는지도 모르지만 그 감정은 하루아침에 생긴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분을 알게 된 이래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무 한 그루가 숲을 이루는 것처럼 느리지만 분명하게 생겼어요.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던 제 마음이 이제 푸르러졌습니다. 청춘이라고 했지요. 푸르른 봄. 그게 제 마음을 가득 물들이고 있어요. 그런데.

저 때문에 암살 사건을 불문에 부치신다고요?

그리고 황상께 미운털이 박히신다고요? 본래대로 하면 황제로 등극하셔야 될 분이 이제 앞날이 위태로워지셨습니다. 저 때문에요.

하늘은 어둡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어찌해야 할지 길을 찾을 수가 없는 저녁, 저는 가슴께를 움켜쥔 채 궁녀들을 모두 물리고 혼자 남았습니다.

모두 미웠어요. 태자 전하께 늘 열등감을 가지고 계시는 운왕 전하도, 그 운왕 전하의 말도 안 되는 야욕을 전부 들어주고 계시는 혜비마마도, 혜비마마와 운왕 전하를 늘 비호하시는 황제 폐하도…. 아니 무력한 제가, 제일 미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