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몽중연 (18)화 (18/100)

18.

황후마마의 회임으로 인해 황궁은 또 한 번 뒤집혔습니다.

한동안 후궁에서는 회임한 이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더는 태후마마께옵서도 후궁들을 들볶지 않으셨고요. 스무 명이 넘는 자식이 모두 여아로 태어났으니 이제 아이가 태어나는 것조차 두려워진 까닭이셨을 겁니다. 원인은 황상에게 있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여아가 한 명 더 태어날 때마다 모두의 생각은 더욱 강해질 것입니다.

그럼에도, 아이가 잉태되면 어쩔 수 없이 모두 예민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어떡하지?

누구의 몸을 빌어서든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는 바로 태자의 위에 오르게 됩니다. 심지어 황후마마의 소생이면 더할 나위 없지요. 사내아이이기만 하다면 무조건 동궁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만약에 여아라 하더라도 미묘해집니다. 이제까지는 유음 황녀 한 명이 황후마마의 유일한 소생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유음 황녀는 권력에 가장 가까운 곳에 있을 수 있었지요. 하지만 황녀가 한 명 더 생긴다면 어떻게 될까요? 총애를 다투게 될 것입니다.

“황녀마마, 황후마마께옵서 돌아가시라고 하옵니다.”

황후전에 축하 선물을 가지고 간 날,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축객령을 받았습니다. 황후마마는 만나 주지도 않은 채 심신의 불편을 이유로 저를 쫓아내려 하고 계셨습니다.

“마마….”

서 상궁이 조심스럽게 속삭여 왔습니다. 유음 황녀는 황후마마와 사이가 무척 좋았습니다. 황후마마는 유음 황녀를 아주 아꼈었지요.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었으니까요. …이제까지는요.

“미령하시다니 자식으로서 어찌할 방도가 없지.”

선물을 상궁에게 건네면서 저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녀는 어쩔 줄 모르는 기색이었어요. 황후마마가 회임하신 아기씨가 황자라면 황후마마의 이런 변덕은 납득이 될 만합니다. 이 황궁에서 황자는 그 무엇보다 중요하니까요. 그러나 황녀라면.

저와 경쟁이 되지 않습니다. 저는 이제 태어날 황녀 아기씨보다 열세 살이나 많습니다. 황손을 생산할 가능성이 훨씬 높은 것입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황후마마께서 이런 변덕을 부리시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소문 때문일까요.

황상께옵서 저를 여인으로서 총애한다는 소문은 이미 황궁 담을 넘었다고 합니다. 그 소문이 황후마마를 진노케 한 것일까요.

황후전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서서 걸으면서 머릿속이 복잡해졌습니다. 황후마마께서 저를 자식이 아니라 경쟁자로 인식하신다면, 저는 방어를 시작해야 합니다. 후궁에서 황후마마는 절대적으로 유리한 고지에 서 계십니다. 그분은 후궁의 주인이시니까요.

아무리 황상께서 절 싸고도신다 해도 결국 틈은 생길 것이고 황후마마는 놓치지 않으실 겁니다. 후궁의 싸움이란 그런 것이니까요. 저는 이 꿈에서도 목숨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까?

자문해 보아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미 죽은 목숨인데, 무엇을 위해 발버둥을 쳐야 하는지. 그저 꿈에 불과한 곳에서 살아 보겠다고 아등바등하는 것은 기묘한 일이 아닐는지. 그렇게 생각할 때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 게 보였습니다.

“저는 당신께서 계시니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황상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던 게 생각났습니다. 그분은 무척 편안하게 웃으셨었죠…. 제가 있는 것만으로도 세상의 모든 성을 다 가진 군주처럼 편안한 모습이셨습니다. 저를 잃으시면 그분은 어떻게 될까요? 또 저를 잃으신다면요.

눈을 잠시 감고 그분의 상실감을 생각해 봅니다. 저는 그분께 그런 감정을 다시는 안겨 드리고 싶지 않아요. 그래요. 이제 더는 연모지정을 나눌 수 없는 사이가 되었지요. 그분은 제 부황이 되셨으니까요. 육신으로는 그러하나 혼으로는 부부지간인 사이. 저는 아마 그분을….

목숨을 던져서라도 구하고 싶고, 목숨을 버려도 아깝지 않은 사람을 세간에서는 아마 정인이라고 하겠지요. 갚을 은혜가 있어서가 아니었어요. 그런 것 따위 없었어도 저는 그분을 구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저에게 유일하게 정을 준 분이시니까요. 마치 어미 새에게 먹이를 받아먹듯이 저는 그분의 정을 먹고 오롯이 살았습니다. 그렇게 제 안에 쌓인 그분의 정이 커져서 연모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낙숫물이 고이듯이.

빗물이 호수에 떨어져 녹아내리듯이.

그렇게 쌓이는 연정도 있는 것이라는 걸 저는 이제 압니다. 그 연정은 고요하고 느리게 쌓이나 그 어떤 것보다 단단하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운명이 왜 저를 이곳에 데려다 놓았는지 모르나 이제 그건 상관없습니다.

살아남아서.

이 꿈속에 그분을 혼자 두지 않겠습니다. 절대로.

***

후궁의 심계전이 시작되었다는 걸 처음 느낀 것은 달맞이 연회에서였습니다. 가을밤, 커다란 달이 떠 화련각에서 연회가 열렸습니다. 모든 문을 위로 열어 동서남북을 모두 기둥만 남겨 두고 활짝 연 채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있었지요.

날이 쌀쌀하여 각 자리마다 화로가 지급되었고 뜨거운 술이 올랐습니다. 식전죽으로 계란과 게살로 된 죽에 금가루를 뿌린 것이 나와 모두가 한입씩 뜨면서 양옆에 있는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악공들은 조용한 음악을 연주했지요. 중앙 자리에서 무희들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춤을 춰 흥만 돋울 뿐 눈길을 끄는 건 삼가고 있었습니다. 전체적으로 분위기는 가을의 정취에 맞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어…?”

한 후궁이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녀는 당황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어요. 고개를 돌리며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말했습니다.

“일식인가요…? 왜 이렇게 갑자기 어둡죠…?”

그러고는 풀썩 고꾸라졌습니다. 그녀의 몸이 완전히 상에 처박히기 전 간신히 근처에 있던 호위병이 그녀를 붙잡았습니다. 황망한 얼굴인 건 그도 마찬가지였어요. 그가 고개를 돌려 후궁마마의 상궁을 바라보았습니다. 상궁이 고개를 마구 흔들었어요.

“모, 모르겠….”

그때 제 뒤에 앉아 있던 서 상궁이 나지막이 속삭였습니다.

“명하신 대로 마마의 죽을 바꿔치기했습니다.”

혹시나 하여 음식을 전부 바꿔치기하라고 일렀는데 첫 죽부터 희생자가 나왔습니다. 저는 모르는 체하며 쓰던 숟가락을 내려놓았습니다. 흘끔 후궁전 높은 분들의 안색을 살폈어요. 태후마마는 황당함이 역력했고, 비들은 소름이 끼치는지 죽을 서둘러 내려놓았습니다. 그중에는 죽 그릇을 바닥에 내던지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러나 단 한 명만은 태연했습니다.

황후마마.

모두가 당혹해 죽을 내려놓는데 그분은 태연하게 죽 그릇을 들고 계셨습니다. 거기에는 독이 없다는 걸 아시는 것처럼.

“끌어내라. 경사로운 곳에 이게 무슨 추태인지, 원!”

황후마마의 명에 호위병 둘이 서둘러 후궁을 끌어냈습니다. 저는 황후마마의 얼굴을 살펴보았어요. 그분이 어째서 그토록 귀히 여기시던 유음 황녀의 죽 그릇에 독을 넣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계속 그분을 바라보는데도 눈이 마주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끝까지 저에게 눈길 한 번 주시지 않았어요.

만나 주지도 않고 독을 넣는다?

물론 황후마마가 아닌 다른 사람이 넣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체로 후궁에서 이런 일이 생길 경우에 다른 사람이 범인인 때는 별로 없습니다. 대체로 모든 사건의 범인은 물증이 없을 뿐 심증은 모두에게 있는 상태이고는 합니다. 심지어 지금 황후마마는 죽 그릇을 든 상태로 자신이 범인임을 공공연히 알리고 계십니다. 그건 저에게 선전 포고를 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건 이분의 바뀐 태도입니다. 아무리 딸인 유음 황녀가 황상의 총애를 받는다는 소문이 돈다 하여도 모녀지간은 몹시 돈독했으니 한 번쯤 불러서 확인할 법도 한데….

어찌하여 이렇게 일방적인 태도일까요?

해명을 해 보라 할 법도 한데 그런 말이 일절 없다는 것은… 누군가가 중간에서 이간질을 했다? 그런 걸까요? 왜 갑자기 타인을 대하는 듯이 저를 미워할까요. 마치 제가 누군지 아는 것처럼.

…설마.

그럴 리 없습니다.

눈치챈 사람이 있을 리도 없고, 실제로 유음 황녀의 몸에 제가 빙의했다는 소문이 도는 건 사실이지만, 그걸 믿는다 해도 빙의한 귀신을 쫓아낼 궁리를 하지 딸을 죽이진 않습니다. 도대체 왜 황후마마께옵서 저를 죽이려 하시는 걸까요? 아니면 제가 잘못 짚은 걸까요?

“마마, 죽지 않았다고 하옵니다.”

연회가 한껏 무르익었을 때 서 상궁이 조심스럽게 뒤에서 속삭였습니다. 죽지 않았다? 제가 고개를 돌려 서 상궁을 바라보자 그녀가 “그저 잠시 눈이 멀고 기절한 것일 뿐, 지금은 회복했다고 하나이다.”라고 고해 왔어요.

눈을 멀게 하고 잠시 기절을 시켜야 할 이유가 뭐였을까?

저 죽은 저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건 분명합니다. 서 상궁이 손을 쓰지 않았더라면 저건 분명 제 입에 들어갔을 음식이에요. 저를 기절시켜서 도대체 어디에….

식중독을 가장해 죽일 의도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면 뭘까요. 머릿속으로 이것저것 가능성을 떠올렸지만 딱히 이거다 싶은 건 없었습니다.

“…대 되는군요. 그럼 다음 주에 황녀마마의 고명한… 있겠는지요?”

생각에 빠져 있느라 말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시선을 들자 연회의 모든 사람들이 저를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어요.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다음 주? 다음 주에 뭐가 있지?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오늘 내도록 저를 못 본 체하던 황후마마께옵서 저를 빤히 바라보며 말씀하셨습니다.

“물론이오, 국공.”

국공이라고? 기묘했습니다. 심가의 종가였던 저희 집안은 역적으로 몰려 모두 죽었습니다. 그런데 심가의 방계인 태후마마의 집안은 완전히 세도가가 되었군요. 저분은 태후마마의 오라버니이신데 국공의 자리에 오르시다니요. 그때 황후마마께서 말을 이으셨습니다.

“황녀의 활 솜씨는 나라 안팎에 잘 알려져 있으니.”

활 솜씨?

눈이 절로 휘둥그레질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아 냈습니다. 활이라니, 잡아 본 적도 없어요. 아아, 그래요. 유음 황녀는 자수를 싫어하고 황녀로서의 공부를 저어하는 대신 활을 쏘는 걸 즐기고 말을 타는 걸 좋아한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그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다음 주의 사냥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 드릴게요.”

제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자 황후마마는 한마디를 심술궂게 덧붙이셨습니다.

“활도 못 쏘면 내 딸이 아니지.”

심장이 덜컹거리는 기분이었습니다.

황후마마는 확실히 뭔가를 눈치채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황후전에 넣어 둔 간자가 있었으나 그들은 별다른 보고를 해 오지 않았습니다. 분명 황후전의 일상은 평소와 같았습니다. …간자가 포섭된 것일까요? 둘 다? 둘은 서로의 존재를 모릅니다. 서로가 서로를 감시할 따름인데, 어떻게 둘을 동시에 포섭할 수가 있었을까요?

“유음아.”

회임 축하조차 거부한 황후마마께옵서 마치 사랑하는 딸을 부르듯 달콤한 목소리로 저를 부르셨습니다. 그분을 올려다보자 그분이 만면에 화려한, 독초 같은 미소를 머금고 말씀하셨습니다.

“모후는 은여우의 털이 가지고 싶구나. 가져다주겠느냐?”

은여우….

황후마마의 시선이 제 어깨에 닿았다가 멀어졌습니다. 제 어깨에 걸치고 있는 것이 은여우의 털로 된 것이었습니다. 물론 황상께서 하사하신 물건이며, 그분이 직접 잡으신 은여우들로 만든 물건이기도 합니다. 후궁전의 많은 이들이 부러워한 물건이지만 설마하니 이토록 직접적으로 말씀하실 줄은….

“유음이라면 능히 그럴 것이다.”

그렇게 말한 분은 다름 아닌 황상이셨습니다. 그분은 취기가 느껴지는 얼굴로 술잔을 드셨습니다.

“내 딸의 효심을 위해.”

모든 이들이 일제히 술잔을 들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저도 술잔을 들었어요. 그렇게 저는 은여우를 잡겠다는 약속을 은연중에 하고야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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