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생각보다 당도가 늦었구나.”
편전까지 가는 내내 저는 황상의 품에 안겨 있었습니다. 폐하. 몇 번이나 그분을 불렀어요. 하지만 그때마다 황상께옵서는 제 등을 가볍게 도닥거리실 뿐이었습니다. 저는 그분의 품에서 내려오지 못했습니다.
편전까지 움직이는 동안 수많은 사람이 저의 모습을 곁눈질로 보았습니다. 황상이 직접 안아 들고 걸으시는 모습은 동서고금 드문 형태의 총애였고 저는 그런 총애를 받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머릿속으로 얼마나 많은 계산을 하고 있을지 눈에 선했습니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신궁에는 변고가 없느냐?”
편전에 앉아 다과를 받는 동안 저는 황상의 옆자리에 앉았습니다. 마치 그분의 아주 어린 딸처럼요. 하지만 저는 어린 딸이 아니죠. 혼처를 논할 나이입니다.
“황상의 은혜를 입어 무탈하옵니다.”
“그래.”
서로 의미 없는 대화가 오갔습니다. 그러는 동안 황상께옵서는 제 앞으로 다과를 슬쩍 밀어 두셨어요. 그건 제가 좋아하는 꽃과자였습니다. 달콤한 맛도 맛이거니와 그 아름다운 모양새 때문에 태자비 시절 즐겨 먹었던 물건이었습니다. 황상의 편전에 오를 과자는 아니니 아마도 직접 하명하신 듯했습니다.
한입 베어 물자 꽃향기가 은은하게 입 안에서 퍼졌어요. 맛도 맛이지만 향 때문에 이 과자를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이 꽃과자의 향기가 달갑게 다가오지 않았어요. 마음의 어지러움에 단 향기가 들자 더 심사가 복잡해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때 고모님께서 말씀하셨어요.
“오랜만에 뵙사옵니다, 비전하.”
들고 있던 과자를 놓쳤습니다. 비전하. 그건 유음 황녀를 부르는 명칭이 아닙니다. 그건 저, 심서혜를 부르는 명칭이죠.
제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고모님이 싱긋 웃으셨습니다.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편전에는 검은 옷을 입은 무사들밖에 없었습니다. 검은 옷을 입은 무사들. 그들은 황상의 그림자 무사들입니다. 그들은 입이 없고 귀도 없고 눈도 없는 존재들입니다.
제가 무엇보다도 주변의 듣는 귀가 누군지를 먼저 살피자 고모님께서 살포시 웃으셨습니다.
“폐하, 신녀의 승이옵니다.”
“상을 내리지.”
“황공하옵니다.”
승?
제가 황상을 바라보자 그분이 기분 좋은 얼굴로 직접 제 빈 잔에 차를 따라 주셨습니다.
“내기를 했습니다. 당신이 돌아오셨을 때 궁주와 만나게 되면 당신의 반응이 어떨까, 하고요. 저는 당신을 반가워할 것이라 했고, 궁주는 주변 눈부터 확인할 거라 했습니다. 제가 졌군요.”
“내기… 라니요, 폐하?”
무슨 내기를 언제 했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두 분은 제가 꿈에 들어온 뒤로 한 번도 만나신 적이 없는데 어떻게 내기를 하셨다는 걸까요? 새를 날리셨던 걸까요?
제 의아한 얼굴에 황상께옵서 천천히 입을 여셨습니다.
“나는 몹시 오랫동안 기다렸습니다.”
그분의 손이 찻잔의 표면을 어루만졌습니다. 붓을 들면 명필가, 검을 들면 장군이 되는 손은 우아하면서도 마디가 억셌습니다.
“매우 지루한 나날이었지요.”
그분의 눈에 과거가 스쳐 지나갔습니다. 저는 그 과거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매우 지루한 나날. 그 말은 지루하다기보다는 끔찍하다는 의미로 들렸습니다. 황상께옵서 고개를 돌리자 고모님이 찻잔을 든 채 희미하게 웃고 계셨습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모님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지나치게 나이 들었습니다. 당장에라도 숨이 멎을 것 같은 노파가 되어 계셨어요.
고모님은 왜 이렇게 되신 걸까요?
아니, 정확히는. 왜 고모님은 ‘혼자’ 이렇게 되신 걸까요?
고모님이 무엇을 하셨기에 혼자 이렇게 늙으신 걸까요?
소름이 끼쳤습니다. 주술은 언제나 대가를 필요로 한다고 합니다. 고모님은 무슨 주술을 펼친 걸까요?
“궁주님.”
저는 그분을 똑바로 보았습니다. 그분의 늙은 얼굴을. 자글자글한 입술과 주름진 얼굴과 이가 빠진 모습을.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이런.”
고모님은 웃으셨어요. 그분은 곤란해하지 않으셨습니다. 나올 질문이라고 생각하신 것 같았어요. 대답도 어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그분은 슬쩍 시선을 움직였어요. 그 시선은 황상께 닿아 있었습니다. 분명히, 그 시선은 대답을 해도 되는지 허락을 구하는 시선이었습니다.
저는 고개를 돌려 황상을 바라보았어요. 생각해 보면 아주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이분은 어떻게 저를 알아보신 거죠? 제가 유음 황녀 안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그렇게 빨리 깨닫고 또 납득하실 수 있었죠? 아무리 저를 그리워하셨다 해도, 아무리 저에게 연정을 주셨다 하더라도 그걸 납득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습니다.
“폐하.”
저의 지아비는 공명정대하고 선한 분으로 웃어른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에게 인자했습니다. 그분은 모두에게 사랑받는 태자셨어요.
“신첩은….”
무슨 짓을 하셨냐는 건, 황상께 여쭐 수 있는 질문이 아닙니다. 그건 궁주인 고모님께나 할 수 있는 말이에요. 황상이 하는 일은 모두 옳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아무도 그 일에 대해 가부를 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두 번이고 열 번이고 폐하를 구하려 노력할 것이나.”
숨이 막혔습니다. 이분이 정말로 뭔가를 하신 거라면. 그 결과로서 제가 여기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하늘의 가호를 받지 못한다면 신첩의 알량한 노력은 모두 물거품이 될 것이옵니다.”
하늘이 용서할 리가 없습니다.
제 말을 듣고 계시던 황상께옵서 가만히 제 얼굴을 들여다보셨습니다. “그래요.”라고 그분이 중얼거리셨어요. 그래요, 한 번 더 중얼거리신 그분이 갑자기 손을 뻗으셨습니다. 부지불식간, 제 팔이 그분에게 붙잡혔어요. 저는 그대로 그분의 품에 끌려 들어갔습니다. 그분은 저를 잡아 제 턱을 쥐고 “똑바로 들으세요.”라고 속삭이셨어요.
“당신께서 말씀하시는 게 뭔지는 압니다만, 선한 자를 구하고 악인을 벌하는 게 하늘의 역할이라면 하늘은 이미 그 업을 버렸습니다.”
“…….”
“당신을 잃었을 때야 비로소 저는 그것을 깨달았지요. 하늘은 우리 모두를 저버린 지, 사실은.”
황상은 아주 목소리를 낮추셨습니다. 나직한 목소리가 우리 둘 사이를 맴돌다가.
“아주 오래되었답니다.”
공기 중에 녹아 사라져 버렸습니다. 저는 눈을 크게 떴어요. 하늘이 우리를 버렸다니. 그건 황제 폐하께서 하셔서는 안 될 말씀입니다. 절대로 그런 말씀을 하셔서는…!
“폐….”
제가 그분을 부르려던 찰나였습니다. 갑자기 복도에서 대기 중이던 내시감이 다급한 목소리로 고해 왔습니다.
“폐하, 소신이옵니다.”
“들라.”
황명에 의해 밖으로 내보내졌던 내시감이 바로 들어왔습니다. 전혀 소리 내지 않는 걸음걸이로 마치 그림자처럼 걸어온 그는 황상의 품 안에 있는 저를 난처한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의 눈빛에 제가 황상의 품에서 조심스럽게 빠져나왔습니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황상께옵서도 저를 잡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자리로 물러가자 곧 내시감이 조심스럽게 황상의 귓가에 무언가를 소곤거렸습니다. 흐음. 황상의 얼굴에 미묘한 웃음이 깔렸습니다.
“이만들 물러가 쉬어라. 다시 부르지.”
황명이었습니다. 지엄한 명에 저와 고모님은 동시에 몸을 일으켰습니다. 고모님은 보기에 이미 노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아주 똑바르게 걸었습니다. 마치 야심만만한 젊은이처럼요. 그에 비해 저는 겨우 후들거리는 다리에 겨우 힘을 줄 뿐이었습니다.
황제가 하늘을 믿지 않는다.
그런 오만한 황제는 듣도 보도 못 했어요. 역사서에 수많은 교만한 황제들이 있었습니다만 그들 중에 하늘을 부정하는 황제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무서웠어요. 하늘이 돌아서면 이 나라는 어떻게 되죠? 사람들은요? 비가 안 오면, 혹은 비가 너무 많이 오면? 전쟁에서 지면? 불이 나면? 신이 버린 나라는 망국의 길을 걷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실 분이 왜 저렇게 생각하시는 것인지.
어지러웠습니다.
어린 시절, 태자 전하의 정혼녀였던 시절에 저는 당시에도 신궁의 궁주셨던 고모님과 함께 매일 밖에 나간 적이 있습니다. 가을, 건조한 계절에 큰불이 여러 차례 일었습니다. 황궁에서는 물론, 수많은 사람이 앞다투어 제를 올렸으나 화재는 계속 반복되었습니다. 화재로 많은 사람이 목숨과 재산, 가족을 잃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하늘이 선나라를 버렸다고요. 저는 처음으로 하늘에게 버림받은 사람은 무척 참혹한 고통을 짊어져야 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크면서 종종 그 말을 듣고는 했습니다. 하늘이 선나라를 버리시려는가.
전쟁의 승패가 위태로울 때, 수재민이 발생했을 때, 성인으로 불리던 이가 돌아가셨을 때, 전염병이 돌 때, 세상에는 늘 저 한탄이 맴돌았습니다. 사람들은 늘 하늘을 바라봤어요. 하늘의 자비를 기대하며 제를 올렸습니다. 나라에 큰일이 생기면 크고 작은 제사가 전국적으로 열렸어요. 부자는 부자대로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대로 제사를 지냈습니다.
황제는 하늘의 뜻을 받은 자. 하늘의 뜻을 행하는 자. 그런 황상께옵서 하늘이 우리를 저버렸다고 하면….
“황녀마마.”
희원궁으로 돌아가는 길, 서 상궁이 황급히 제 귀에 입을 가까이 대었습니다. 손으로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막고서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조금 전 내시감이 무엇을 고하였는지 알아냈사옵니다.”
서 상궁의 목소리에도 다급함이 깔렸습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어요. 걷던 걸음을 멈추고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하늘은 우리 모두를 저버린 지, 사실은. …아주 오래되었답니다.”
황상의 목소리가 떠올랐어요. 반추해 본 그 목소리는 제게 참 다정한 것이었으나 목소리의 바닥에 깔린 불온하고 사나운 것들은 분명 그분의 어떤 분노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무엇이 그분을 그토록 분노케 하고 절망케 했을까요. 그분은 만인지상의 황제 폐하신데 어째서 가끔 그분은 운명과 세상에 버려진 사내처럼 흉포해 보이시는 걸까요.
내시감의 보고를 받을 때 황상의 얼굴을 떠올려 봤습니다. 미묘한 웃음을 머금고 있는 얼굴. 그러나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눈 속에서는 시커먼 것들이 일렁이고 있었어요. 분명 좋지 않은 보고였을 겁니다.
“무엇을 고하였느냐?”
차라리 모르는 게 낫지 않을까.
황상에게 역린이 존재한다면 차라리 그 존재를 외면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저는 묻지 않을 수 없었어요. 황상의 표정이 너무나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기도 하고, 궁 생활에서는 무엇보다 앎이 가장 큰 힘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자 서 상궁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습니다.
“황후전에서의 기별입니다. 황후마마께서 회임하셨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