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겨울을 대비한 물건들이 하사되었습니다.
“마마, 이것 좀 보셔요.”
어마어마한 것들이 희원궁으로 내려왔습니다. 천하의 귀한 것들을 눈앞에 전부 모아 둔 기분이었어요. 여섯 수레가 궁 안으로 들어왔고, 그중 한 수레가 온전히 저를 위한 것들이었습니다. 패물, 옷감, 눈썹 먹 같은 사치품들 말입니다.
궁녀들은 모두 흥분했습니다. 이런 귀한 물건들을 볼 수 있는 때는 매우 드무니까요. 그들은 물건을 정리하며 쓰다듬고 품평하고 때로는 제게 가져와 선보였습니다.
저는 보면서 마음이 무거워졌어요. 하사품은 못 물린다고 황상께서는 단호히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 물릴 수 없겠지요. 하지만 이건 지나쳐요. 총애가 너무나 과해서 가뜩이나 무엄한 말들이 나도는데 이런 과분한 물건들을 어찌해야 좋을까요.
황상께서 부르셔서 편전으로 향하는 길, 마음이 무거워 자꾸 걸음이 멈춰졌습니다.
“마마, 날이 추워졌사옵니다.”
서 상궁이 제 몸에 여우 털로 된 외투를 둘러 주었습니다. “춥지 않아.”라고 말하자 그녀가 “고뿔에 걸리실까 황상께서 염려하시옵니다.”라며 제 몸에서 그 외투를 빼지 않았어요. 진선전으로 가는 길, 저는 걸음을 멈추고 서 상궁을 올려다봤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잔병치레가 심했어요. 특히 고뿔에 잘 걸리는 편이라 서 상궁뿐만 아니라 태자 전하께옵서도 사시사철 보약을 지으라 이르실 정도로 신경을 써 주셨습니다. 언제나 고뿔에 걸릴까 봐 많은 사람이 걱정을 했고, 냉궁에 유폐되었을 때도 저의 이런 몸을 잘 알기에 겨울을 넘길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마치 그때의 서 상궁을 보는 듯했어요.
“내가… 고뿔에 자주 걸렸던가?”
유음 황녀도 고뿔에 자주 걸리는 병약한 사람이었을까요? 듣기로는… 활쏘기를 좋아하는 강인한 황녀라고 들었는데요.
“아니요, 마마. 건강하십니다.”
서 상궁이 말했습니다. 마치 ‘유음 황녀는 건강하지.’라고 말하는 것 같았어요. 불길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녀를 가만히 올려다보자 그녀가 제 몸을 덮고 있는 외투를 단단히 고정하며 중얼거렸습니다. “건강하시죠….”라고. 그러나 그녀의 손은 떨리고 있었어요.
“혹시.”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고민하면서 입을 열려는 찰나에 “황녀마마.”라고 나직하게 서 상궁이 제 주의를 환기시켰습니다. 저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어요. 서 상궁의 시선이 저를 비껴서 제 등 뒤를 바라보고 있었거든요.
멀리서 다가오는 건 태후마마의 행렬이었습니다. 태후마마. 그러니까 현실에서는 황후마마신, 저의 시어머니셨던, 유음 황녀의 할머니이신, 꿈속의 태후마마. 저는 이분에 대해 알 만큼 압니다. 이분은 이런 추운 날에 산책을 하실 분이 아니세요. 손발이 차신 분이라 추위를 무척 싫어하시거든요. 그렇다는 건 의도를 가지고 산책을 나오셨다는 이야기밖에 되지 않습니다.
저를 보시면서 만면에 미소를 가득 띠고 계시다는 건… 그 의도에는 분명 제가 걸려 있다는 뜻이 될 겁니다. 제 궁녀들이 법도에 맞게 무릎을 꿇었습니다. 저도 다가오시는 걸음걸음을 보고 있다가 예법에 맞춰 절을 했지요.
그러자 태후마마께서 “이런, 이런. 내 소중한 손녀가 얼어 가는 땅 위에서 절을 하면 세인들이 이 할미를 무어라 생각하겠느냐.”라며 저를 일으키셨습니다. 저를 아끼시는 듯하시면서도 최근 높아진 저의 위세를 콕 찌르는 말씀이신 거죠.
“할마마마께 효를 다하는 것은 저의 도리인 것을요.”
제가 무난히 대꾸하자 마치 그런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다는 듯 태후마마께서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으셨습니다.
“효를 다하려면 혼처를 정해야지. 안 그러냐, 궁주?”
궁주?
눈이 휘둥그레질 뻔한 걸 겨우 참았습니다.
궁주란 여러 신분의 사람을 말하지만 당금 황궁에서 ‘궁주’라고 부르는 사람은 대체로 신궁의 궁주, 즉 저의 둘째 고모님 한 분뿐입니다. 다섯 장의 불꽃을 가지고 태어난 분. 제 아버님의 여동생. 어릴 때 신궁의 주인이 되셨고 강력한 신력으로 선나라를 보호해 오신 분.
…제가 죽자 제 방을 봉인하신 분.
“그렇지요, 태후마마. 열둘이시면 혼처를 정하기에 좋은 나이이옵니다.”
목소리와 함께 뒤쪽에서 고모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저렇게… 나이 든 얼굴이셨던가?
당혹감에 잠시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어요. 고모님은 1년에 몇 번씩 뵙게 되는 분이었습니다. 사적으로 대화를 나누지는 못해도 여러 제사 때문에 뵐 수밖에 없는 분이에요. 그분은 절색의 미모라고 칭할 정도는 아니어도 심씨 여인들 특유의 화사한 미모를 가지고 있으셨습니다. 신궁 궁주의 옷인 하얀 무녀복을 입고 걸으시면 마치 선녀처럼 아름다우셨죠.
그런데 어쩌다 이런 모습이 되셨을까요? 신궁의 궁주라기보단 시장 구석에서 싸구려 부적을 파는 노파의 행색처럼 초라했습니다.
“궁주, 점을 쳐 보아라. 우리 유음이에게 어느 아이가 좋을지 보자꾸나.”
태후마마께서 인자하게 웃으십니다. 저는 압니다. 혼례 전에 치는 점괘야말로 모든 계산이 들어간, 그저 웃어른들의 입김대로 나오는 결과라는 것을요. 하지만 신궁의 궁주가 점을 친다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궁주가 치는 점은 절대적이니까요.
황상의 재가는 떨어진 것일까요?
황상께옵서 제가 시집가는 걸 윤허하셨을까요? 이 몸은 그분 따님의 것. 그러나 정신은 그분 아내의 것. 그분이 어느 쪽에 더 추를 올려 두셨을까요. 지금까지는 아내 쪽에 더 추를 많이 올려 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조금 곤란하고 그만큼 기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정치 문제가 되면 또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압니다. 정치 문제가 되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자식도, 부모도 정치 앞에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됩니다. 그것이 귀족입니다.
황녀의 혼례 문제는 대대로 태후마마나 황후마마 같은 후궁의 어른들께서 관여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황녀의 혼사는 정치적인 셈을 하여 결정되었습니다. 따라서 황상의 결정이 늘 가장 중요했습니다.
태후마마의 말에 고모님께서 살포시 눈가를 접으셨습니다.
“여기서는 점을 칠 수 없지요, 마마. 어디서 보는 게 좋을는지요?”
“내 궁으로 가자꾸나.”
태후마마께옵서 바로 등을 돌리셨습니다. 마치 여기서는 볼일 다 보셨다는 듯이요. 어쩔 수 없이 저도 그 뒤를 따랐습니다. 황녀인 제가 태후마마의 명을 거부할 수 있는 재량은 없으니까요.
태후전에 당도하자 다과상을 내온다 뭐다 하여 이것저것 아랫사람들이 바빴습니다. 태후마마께옵서는 고모님께서 빨리 점을 치길 바라시는 눈치셨지만 정작 고모님은 느긋하셨어요. 중요한 점인데 서두를 수야 있냐며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고 마음의 안정을 취한 뒤 쳐 보겠다고 태후마마께 허락을 얻었습니다. 중요한 점괘인 것은 사실이라 태후마마께옵서는 조급함을 물리시고 어쩔 수 없이 허가를 내주셨고요.
“황녀마마께옵서 북망산천을 다녀오신 뒤 더 총명해지시고 어질어지셨다고 많은 이들이 감탄을 금하지 못하더이다.”
고모님은 저를 칭찬하셨지만 듣는 저는 마음이 많이 켕겼어요. 죽을 뻔하더니 사람이 많이 변했더라는 이야기니까요. 태후마마께옵서 찻잔의 윗부분을 손부채질하시어 그 향을 맡으시며 대꾸하셨습니다.
“철이 들었지.”
“태후마마의 가르침 덕입니다.”
고모님의 말씀에 태후마마께옵서 후후, 하고 웃으셨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무엇을 하는 걸까요. 죽고 나서 꾸는 꿈에선 늘 스산한 바람만 붑니다.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간다….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일을 이제 생각해야 할 때인가 봅니다. 다른 사람과 새로운 생활을 하려고 이 꿈을 꾸고 있는 걸까요. 그건 제가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저는….
“황상 납시오.”
내관의 목소리에 정신이 퍼뜩 들었습니다. 고개를 돌리자 황상께옵서 들어오고 계셨어요. 눈이 마주쳤습니다. 무표정한 얼굴에 문득 염려가 어리는 게 보였습니다. 그 염려가 무슨 의미인지 몰라 눈을 내리깔았습니다. 갑작스럽게 혼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저에 대한 걱정일까요, 아니면….
“저도 듣지 못한 이야기가 나온다고 하여 소자가 찾아왔습니다.”
퍼뜩 고개를 들자 그분은 여전히 저를 보고 계셨어요. 눈이 한 번 더 마주치자 그분이 웃으셨습니다. 쓰디쓴 웃음이었어요. 괜찮아. 그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순간 진심으로 안도했어요.
저는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고 싶지 않았어요. 그럴 바엔 그냥 이 꿈이 끝났으면 했습니다. 운명이 제게 무엇을 말하려는 것이든 듣고 싶지 않아요. 저는 이분을 구하고 싶었고 구한 것으로 됐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고 싶진 않아요.
“황상.”
태후마마께옵서 낭패 어린 목소리로 그분을 부르셨어요. 그제야 저는 태후마마께옵서 황상께서 오시기 전 저를 두고 점을 치실 생각이셨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왜? 그건 굉장히 무엄하고 법도에도 어긋나며 아무리 태후마마라고 해도 수습이 어려워지는 일인데요.
“궁주, 오랜만이구나.”
“황상을 뵈옵니다.”
고모님이 인사를 올리셔서 저도 같이 몸을 일으켜 황상께 절을 했습니다. 황상은 손을 내밀어 저를 일으켜 세우셨어요. 그러면서 시선만 움직여 고모님을 바라보셨습니다. 그 눈빛이 아주 서늘했어요.
“입궁을 한 줄 몰랐군.”
정녕 모르셨다는 뜻은 아니실 겁니다. 모르셨다면 여기에 오셨을 리 없지요. 말씀의 뜻은, 입궁을 하고선 감히 황상을 찾아뵙지 않고 태후전에 먼저 들른 작태에 대해 지적하시는 겁니다. 고모님이 순종적으로 고개를 숙였습니다.
“태후마마께옵서 급히 부르시어….”
“급히, 라.”
무엇이 그리 급하셨냐고, 황상의 시선이 이번엔 태후마마를 향했습니다. 싸늘한 시선은 당장에라도 노여움을 터뜨리실 것 같았어요. 태후마마께옵서 불편한 얼굴로 황상을 외면하셨습니다.
“모후.”
황상께옵서 태후마마를 부르셨습니다. 어쩔 수 없이 태후마마께옵서 황상께 시선을 돌렸습니다. 그러자 황상께옵서 그분께 입술만 가만히 올려 웃음을 보내셨습니다. 저는 그 얼굴을 옆에서 보고 있었어요. 그분의 손은 저를 일으킬 때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였습니다. 제가 손을 살그머니 빼려고 해도 소용없었습니다.
“무엇이 그리 급하셨는지, 소자가 여쭙습니다.”
황상의 눈이 저를 향했습니다. 손을 빼지 말라는 듯 시선이 가만히 좌우로 움직였어요. 당혹감에 눈을 깜빡이고 있는데 갑자기 태후마마께옵서 상을 쾅 내려치셨어요. 그 소리가 하도 험상궂어 화들짝 놀랐습니다. 제가 그분을 돌아보자 태후마마께옵서 제 손을, 정확히는 황상께 붙잡힌 제 손을 가리키셨습니다.
“그따위 짓을 하니까 지엄한 황궁에 돌아서는 안 될 이야기가 도는 거 아닙니까! 선조들을 뵐 낯이 없습니다, 낯이! 잔말 말고….”
“돌아서는 안 될 이야기가 뭡니까?”
고함을 지르시는 태후마마의 말허리를 싹둑 자르며 황상께옵서 하문하셨습니다. 나직한 목소리가 매끄러웠어요. 그러나 그 매끄러움은 검의 표면처럼 아주 싸늘한 것이었습니다. 태후마마께옵서 대답을 내놓지 못하시자 보란 듯이 제 손을 잡아 들어 올리셨습니다.
“이게, 뭐가 문제라는 것인지 소자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황상…!”
“제 여식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적녀이고 현 상황에서 제 총애를 받아 마땅한 아이지요. 그래서 뭐가 문제입니까?”
“그런 소리가 아니잖습니까?! 무엄한 작자들이 뭐라고 떠드는지, 그 더러운 소리들을 본후가 굳이 입에 담아 줘야 합니까?”
그러자 황상께서 웃으셨어요. 야차 같은 웃음에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아 몸이 떨렸습니다. 그분의 손아귀 안에서 제 손이 떨리자 그분이 가볍게 제 손을 주무르셨어요. 그리고 태후마마를 돌아보셨습니다.
“누구의 잘못입니까?”
“황상!”
“제가? 아니면 무엄한 소리를 하는 것들이?”
손을 빼고 싶었어요. 그런 게 아니라고 행동으로나마 보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황상께옵서는 저의 그런 모습이 마음에 안 드시는 것 같았어요. 순간, 몸이 휙 들렸습니다. 황상께서 제 몸을 어린애처럼 안으셨어요. 엉덩이를 받쳐 안으신 그분이 주변을 둘러보셨습니다.
“어느 쪽이 벌을 받아야 합니까?”
황상은 벌을 받지 않습니다. 황제는 무치. 황제에게는 수치라는 게 없습니다. 그분은 그저 옳으십니다. 그러니.
이 하문은 사실 대답이 정해져 있습니다. 벌은 언제나 상대가 받아야 합니다. 태후마마께옵서 대답을 내놓지 못하시자 황상께옵서 흘끗 시선을 움직이셨습니다.
“궁주는 따르라.”
황명이 떨어지자 궁주가 바로 몸을 움직였습니다. 황상께옵서 움직이시자 행렬이 길게 만들어졌습니다. 태후마마에게서 등을 돌린 황상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태후전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황상!”
태후마마께서 소리 지르셨지만 황상은 돌아보지 않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