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몽중연 (15)화 (15/100)

15.

태자 전하께서는 당연한 듯이 저를 붙잡고 걸으셨습니다. 어디로 가는지 여쭐 수가 없었어요. 그분이 저를 태자비라고 공언하신 이상 우리가 가는 곳이 냉궁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습니다. 그건 곤란한 일이었어요. 저는 냉궁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저의 폐위는 황상께옵서 결정하신 문제니까요.

“전하, 소인은.”

“신첩이시겠죠. 법도를 목숨같이 지키시는 분이 어인 일이십니까.”

처음 들어 보는 비아냥거림이었습니다. 제가 고개를 돌려 그분을 올려다보자 그분이 걸음을 멈추셨습니다. 그분은 저를 잡지 않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셨어요. 보지 말라는 듯이. 손바닥 아래로 한숨이 새어 나오는 게 느껴졌습니다.

이윽고 그분이 얼굴에서 손을 떼시더니 손짓을 하셨습니다. 그러자 모두가 물러났지요. 우리의 말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궁인들이 물러나는 동안 저는 멍하니 그분을 올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분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달려왔는데 왜 이분이 화를 내시는 건지 잘 이해할 수가 없었거든요. 서러움도 조금, 당혹감은 많이. 갈무리되지 않은 감정들이 삐죽삐죽 가시처럼 솟았습니다. 사나운 파도처럼 일렁였어요.

모두가 물러난 걸 확인하신 태자 전하께옵서 제 양팔을 잡으시더니 고개를 내려 저와 시선을 마주하셨습니다. 그분의 버릇이셨죠.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나지막한 목소리에서 감정을 누르고 계시다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읏. 저도 모르게 신음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만큼 전하께옵서 저를 아프게 잡고 계셨어요. 그분은 저의 신음에 놀라 힘을 빼셨지만 제 팔을 놓지는 않으셨습니다. 놓을 수 없는 것처럼 보였어요.

“비께서는 저의 내자신데, 어찌하여 변고가 생기셨을 때 저에게 아무런 연통도 주지 않으셨습니까?”

비통한 목소리는 조금 젖어 있었습니다. 그분이 우시는가 싶어 그 눈을 바라봤어요. 눈물이 떨어지진 않았지만 눈은 붉어져 있었습니다. 그분은 “대답하세요.”라고 말씀하시며 다시 제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셨습니다. 아플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꽤 강한 힘이었어요.

“어떤… 연락을 드리라는 말씀이온지….”

“당신을 구하러 오라고 해야지요!”

너무나 당연하지 않느냐고 그분이 소리쳐 물으셨습니다. 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이런 위험에 처할 걸 알면서…. 아니, 애초에 그런 위험한 선택을 하실 리가 없지 않습니까…. 누구도, 그 유음 황녀의 모후조차도 결국은 자신을 먼저 선택하는 게 황가의 상식인 것을요….

제 얼굴에서 아마 제 대답을 보셨나 봅니다. 태자 전하는 하, 하고 웃으셨습니다. 그분의 눈에 눈물이 고인 게 보였어요. 붉어진 눈을 하고 그분이 물으셨습니다.

“당신은.”

목소리가.

“제가 구하러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군요.”

비통했습니다.

당연한 일이지 않습니까? 그건 너무나 당연한….

저는 제가 왜 책망을 듣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어졌습니다. 이분이 절 구하러 오지 않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건 너무나 상식적이고 또…. 그러자 갑자기 태자 전하께옵서 제 팔을 움켜쥐셨습니다. 방금까지 고였던 눈물이 거짓말인 것처럼 그분의 눈이 야차같이 빛났어요. 어둠 속에서 그 눈은 무시무시해 보였습니다. 그분이 소리치셨어요.

“그럼 당신도 절 구하러 오지 마셨어야죠! 도대체 나는… 기대하고! 또 기대하고! 아니, 당신이 날 구하러 오지 않아도 좋아. 그냥 기다리면 돼. 내게 구해 달라고 손을 한 번 내밀면, 그것만으로도 나는…!”

전하의 힘에 저는 폭우 속 갈대처럼 마구잡이로 흔들렸어요.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분은 제가 이분을 구하러 온 것에 대한 고마움보다 제가 구해 달라고 하지 않은 것에 받으신 상처가 더 크신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제 그게 뭔지 압니다. 왜냐면 이분은, 이분은… 저를….

저를, 이렇게나….

그 순간, 어지러워졌습니다. 아, 생각해 보면 저는 좀 무리했어요. 식사를 하지 않은 상태로 계속 잠들어 있었고, 그 이후에도 보리죽 외에는 허가받지 못했습니다. 그 상태로 뛰어다니고, 끌려다니고, 형틀에 매이고…. 저에게는 좀 무리였던 것 같습니다.

눈앞이 새카맣게 변하고 있었어요. 제 이상을 눈치챈 전하께옵서 “비? 비, 저를 보세요. 저를 보십시오.”라며 다급하게 제 뺨을 도닥이셨어요. “괜찮으니까.” 그분이 어쩔 줄 몰라 하셨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애원에 물기가 어리는 게 느껴졌어요.

저분은 잘못한 게 없습니다. 잘못은 제가 했어요. 우리는 부부였는데, 저분은 저를 연모해 주셨는데 저는 저분의 마음을 들여다보려고 한 적조차 없습니다. 당연히 우리 사이에 연정은 없다고 생각했어요. 얼마나 못되고 나약한 생각인가요.

잘못은 제가 했는데 저분이 죽을 것 같은 목소리로 저에게 빌고 계십니다. 잘못했으니까 제발 눈을 뜨라고. 태의를 부르라는 저분의 비명이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같이 참혹합니다.

저는 괜찮아요.

조금 자고 일어나면 저는 곧 괜찮아질 거예요.

그렇게 말씀드려야 하지만 제 몸은 허물어지고 있었습니다. 부서지는 모래성처럼요.

***

눈을 떴을 때 보인 사람은 나이가 좀 많은 태자 전하였습니다. 저는 제가 어디에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어요. 아아, 이분은 태자가 아니실 겁니다. 아마 황상이시겠죠…. 여기는 꿈속. 저는 열두 살의 유음 황녀이고, 이곳에서 저는 죽은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제가 저주를 내리고 있다고 수군거리고 있고 그리고 또…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태의!”

황상의 고함에 태의가 화들짝 놀라 다가왔습니다. 우 태의의 얼굴이 보였어요. 저는 이 사람에게 빚이 있습니다. 그는 저에게 친절히 대해 줬어요. 태자 전하의 상황을 알려 줬죠. 좋은 사람이에요. 측은지심은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고귀한 감정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는 귀하게 대접받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우 태의가 다가와 저를 진맥하더니 황상께 신중히 고했습니다.

“맥이 돌아왔사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황상께옵서는 제 팔을 붙잡으셨습니다. 그분은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어떻게 이런 짓을 하십니까?!”라고 고함을 지르셨습니다. 세상 누구의 시선도 전혀 상관하지 않는 기색이 역력했어요. 그분의 시선에서 파르스름한 불꽃이 튀는 것 같았습니다. 그분의 분노가 세상을 집어삼킬 듯이 느껴졌어요.

하지만 저는 그분의 노기 어린 눈보다 그분의 얼굴을 더 보고 있었습니다. 그 얼굴에는 가면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그 얼굴에는 흉터가 없었습니다. 그 얼굴은 아주, 멀쩡했어요. 늘 아름답던 그 얼굴 그대로였습니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 뺨에 대 보았습니다. 손에 닿은 뺨은 아주 부드러웠어요.

아….

여기는 꿈속일까요, 미래일까요.

어쨌든, 현실에 영향을 받는 건 분명해 보였습니다. 불에 일그러진 얼굴이 마치 없었던 일처럼 깨끗한걸요. 다치지 않으셨군요. 그래요, 저는 이분을 구해 냈습니다. 많이 망설였지만, 순간순간 비겁했지만, 그래도 저는 이분을 구해 냈어요. 제가 태어나서 이토록 자신이 자랑스러웠던 적이 없습니다. 태어나길 잘했어요. 이분을 구할 수 있었으니까요.

황상께옵서 당신의 뺨을 감싸고 있는 제 손을 붙잡으셨습니다. 대답을 하라는 듯한 눈에서는 노기와 함께 갈급함이 느껴졌어요. 저는 웃었습니다. 진노한 강산의 주인 앞에서 웃을 수 있는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해 본 일이 없지만 진심으로 미소가 나왔어요.

“다치지 않으셨네요….”

제 말에 그분이 눈을 크게 뜨셨어요. 그분은 제 진의를 확인하려는 것처럼 제 얼굴을 들여다보셨어요. 괜찮은지, 무슨 뜻인지. 이윽고 그분은 고개를 돌려 우 태의를 노려보셨습니다. 태의는 제가 괜찮다고 했지만 황상께옵서는 전혀 믿지 않으시는 눈빛이셨습니다. 입장이 곤란해진 태의가 다시 다가와 저의 맥을 한 번 더 짚었습니다.

“폐하께 고하옵니다. 황녀마마의 보체에는 현재 별다른 이상이 없… 흡.”

황상께옵서 우 태의의 목을 움켜쥐셨습니다. 깜짝 놀랐어요. 황상께옵서는 명필로 이름을 드높이셨지만 출정도 하셨던 무장이셨습니다. 그런 분이 태의의 가느다란 목을 쥐니 당장 부러질 것처럼 느껴졌어요. 단번에 몸을 일으켜 그분의 팔에 매달렸습니다.

“폐, 폐하. 신, 아니 소녀는, 무탈하옵니다. 소녀는, 진실로, 진실로.”

“거짓말.”

황상께옵서 고개를 저으셨어요. 어둠이 무서워 그림자가 진 쪽으로 걸음을 떼지도 못하는 아이처럼 그분은 고집을 부리셨어요. 그분의 손이 태의의 목을 조르고 있었습니다. 태의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게 보였어요. 그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폐하! 부디 고정하시옵소서, 소녀는.”

“당신은 그때도 그리 말씀하셨잖습니까?!”

황상의 고함에 제가 눈을 크게 뜨자 그분이 속삭이셨어요. 나직하게.

“조금만 자겠다고, 그리 말씀하시고선.”

다시는 깨어나지 않으셨잖습니까….

황상의 절망으로 가득한 목소리에 저는 그분이 언제를 말씀하시는지 깨달았습니다. 당혹감에 그분의 팔을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졌어요. 제 손이 툭 떨어졌습니다. 아, 저는.

그러니까 저는.

깨어나지 못하는 거군요….

저는 이분을 구하고 죽은 겁니다.

“괜찮으십니까?”

황상께서 태의를 내팽개치듯 놓으시고 저를 서둘러 붙잡으셨습니다. 그분이 저를 흔드셨어요. 몸이 앞뒤로 흔들리는 느낌조차 어딘가 멀게 느껴졌습니다. 모든 게 그저 막연하게 멀었어요. 멍한 머릿속을 지나가는 한 글자는.

죽음.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

꿈속에서 며칠을 힘없이 보냈습니다. 다시 고통을 주어 깨어나 보면 어떨까 생각했지만 만약 관 속에서 일어나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두려워 실행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이미 관 안에서 일어난 적이 있잖아요. 비록 꿈에서지만요. 그때는 다행히도 장을 치르는 와중이라 관의 뚜껑이 열려 있었지만 만약 현실로 돌아갔을 때 땅속에 묻혀 있는 상태면 어떡하죠? 그동안 현실에서 시간이 흐르는 만큼 꿈도 시간이 흘렀고, 꿈에서 시간이 흐르는 만큼 현실에서도 시간이 흘렀으니 그렇게 생각한다면 저는 지금쯤….

생매장이라니 소름이 끼칩니다. 몇 번이나 제 멍든 허벅지를 내려다봤어요. 시퍼렇게 멍든 허벅지를 보며 한 번 더, 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해내지 못했습니다. 생매장의 공포는 제가 이겨 낼 수 있는 게 아니었어요.

저는 죽음이란 모든 것의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되는, 완전한 종착지이자 종말이라고요. 그런데 정작 저는 죽은 뒤에도 이렇게 꿈속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건 아주 이상한 기분입니다. 무엇보다 여기서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요? 어디로 가는 걸까요?

어차피 죽을 몸이었습니다. 겨울을 나긴 어려우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건강한 사람도 냉궁에서 겨울을 온전하게 나긴 어렵다고 합니다. 하물며 저는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한 편이었으니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을 겁니다.

그러니 어차피 죽을 것이었다면 제 지아비를 구하고 죽는 게 가장 이상적인 결말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분은 저를 아끼고 사랑해 주신 단 한 사람이시니까요. 보은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행위라고 배웠습니다. 그러니 저는 은혜를 갚았으니 그것으로….

아니요, 저는 은혜를 갚은 게 아닙니다. 저는 그저 그분을 살리고 싶었어요. 그때 타 죽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분을 살릴 수만 있다면요. 혹여 살릴 수 없다 하더라도, 그래서 같이 죽는다 하더라도 저는 홀로 살아남는 것보다 같이 죽는 쪽을 선택하고 싶었습니다. 그분은 저를 혼자 두지 않으셨어요. 저도 혼자 두고 싶지 않았어요. 그뿐입니다. 은혜를 갚는다는 생각 같은 건 그 순간엔 하지도 않았었어요.

그러니 잘된 일이겠죠.

겨울이 오는 풍경은 쓸쓸하고 춥습니다. 저는 그 풍경을 가만히 바라봤어요. 나뭇잎이 거의 다 떨어져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아름다웠던 태각지는 이제 그 풍경이 스산해졌어요.

서 상궁이 걸쳐 준 외투를 입고서 가만히 태각지의 풍경을 바라봤습니다. 황궁에 있는 수많은 정원 중 그 아름다움으로 첫손에 꼽히는 태각지지만 다가오는 계절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운명을 어찌할 수 없는 것처럼요.

“무변락목소소하.(無邊落木蕭蕭下, 변함없이 지는 나뭇잎은 쓸쓸히 떨어진다.)”

옛 시인의 시가 생각나 중얼거렸을 때였어요.

“부진장강곤곤래.(不盡長江滾滾來, 끝나지 않는 장강은 세차게 흐른다.)”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돌렸습니다. 어느새 황상께서 서 계셨어요. 저와는 달리 가벼운 차림이셨습니다. 춥지 않으실까. 제 눈길이 그분의 의복에 닿은 것을 보셨는지 그분이 고개를 저으셨어요. 춥지 않다는 듯이. 저는 그분이 어떻게 제 마음을 이리 잘 아실까, 생각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전부터 제 마음을 잘 아시는 분이셨어요. 저는 자라는 내내 속내를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고 배웠습니다만 이분 앞에서는 잘되지 않았습니다. 이분은 제가 싫어하는 것, 좋아하는 것을 금세 알아채셨어요.

저는 이분의 총명함과 섬세함에 늘 감탄하고는 했었습니다만 사실은 그런 게 아니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이분은 그저 저를 아끼셔서, 저를 너무나 어여삐 여기셔서 눈여겨보셨기 때문에 아셨던 건지도 모르겠어요.

언젠가 제가 사라지고 유음 황녀가 다시 돌아오면… 이분은 어떻게 될까요.

유음 황녀가 돌아오지 않고 제가 이대로 계속 성장하면, 우리는 또 어떻게 될까요.

계절은 돌아오는 것.

운명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주려고 이런 자리를 마련했을까요.

“그런 얼굴 하지 마세요.”

황상께옵서 제게 속삭이셨습니다. 무릎을 꿇고 저를 올려다보시면서요. 태산같이 지엄한 분께서 자신을 낮추시자 모두가 땅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세상에 서 있는 사람은 오직 저 한 사람뿐이었어요.

“저는 당신께서 계시니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저의 모든 번민과 걱정을 읽은 듯한 그 한마디에 저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웃었습니다. 웃는 것밖에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으니까요. 저의 웃음 한 자락에 그분이 마주 웃어 주셨습니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에 도달하신 것처럼 무척 편안하신 모습이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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