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형틀에 묶이는 동안 저는 운왕 전하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고개를 떨구고 있었지만 그분은 분명 저를 보고 계셨어요. 무척 흡족한 시선이었습니다. 분했습니다. 제가 여기서 죽으면 반드시 원혼으로 남겠다고 결심했어요. 저는 극락이든 어디든 가지 않을 겁니다. 이곳에 남아 저분의 몰락을 지켜보겠습니다.
비명을 지르지 말아야지. 의연하게 버텨야지. 몇 번이나 다짐했습니다. 살이 찢기는 고통이라는데 제가 그걸 참아 낼 수 있을지, 사실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래도 운왕 전하의 앞에서 고통스러운 내색은 보여 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입술을 깨물고 눈을 질끈 감았습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어요. 형리가 곤장을 위로 치켜드는 소리에 몸이 부르르 떨렸습니다. 소리 내지 마, 절대로. 이를 악물었을 때.
“이게 무슨 일들이신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몸이 묶여 있어 고개를 돌리는 게 여의치 않았지만 겨우 고개를 돌려 봤어요. 서 있는 분의 모습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그림자만으로도 저는 그분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3년간 부부였으니까요.
태자 전하는 제 몸 위로 팔을 드리우신 채 서 계셨습니다.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아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어요. 귀에 들리는 목소리는 평소와 비슷하면서도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화가 나신 건지 아니면 웃고 계신 건지도 불분명할 정도였어요.
“이런, 이런. 태자 전하께서 누추한 자리에 다.”
운왕 전하의 목소리에 웃음이 가득했습니다. 즐거워 어쩔 줄 몰라 하는 목소리가 태자 전하의 목소리와 사뭇 대조적이었습니다.
“태자 전하, 죄인을 추국 중입니다. 부디 손을 떼세요.”
그에 비해 혜비마마의 목소리는 조금도 즐겁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위엄을 가지고 태자 전하를 대하려 하셨지만 두려움이 역력히 느껴지는 목소리였습니다. 태자 전하를 두려워하신다기보다는 이 일의 수습을 무서워하시는 것 같았어요.
태자 전하가 가볍게 웃으시면서 대꾸하셨습니다.
“제 팔을 먼저 부러트리시기 전엔 불가합니다.”
웃는 목소리는 매우 선선하여 마치 봄바람 같았습니다. 그 목소리에선 악감정을 느낄 수가 없었어요. 서로 즐거이 사담하는 듯한 목소리로 그분이 말씀하시고는 형리에게 명하셨습니다.
“풀어 드리렴.”
형리가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이 저에게도 느껴졌습니다. 추국장을 여신 건 혜비마마신데 더 존귀한 분은 태자 전하시죠. 하지만 태자 전하의 폐위가 논의되고 있는 만큼 형리는 지금 어느 쪽의 명이 더 드높은 것인지 알 수 없어진 겁니다. 태자 전하는 굳이 형리를 닦달하지 않으셨어요. 도리어 형리를 닦달한 건 운왕 전하셨습니다.
“어딜 감히!”
그분이 고함을 지르셨어요. 조금 전까지 즐거이 웃고 있었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그 목소리에 분함이 가득했습니다.
“감히? 그러고 보니 아무도 나에게 절을 하지 않는 것이 마치 내가 모르는 사이 폐위라도 된 것 같군. 그런가요, 혜비마마?”
태자 전하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추국장을 흔들었습니다. 농을 건네는 듯한 가벼운 어조였지만 내용은 무척 무거웠습니다.
황족 모욕죄에 해당되는 내용이었고, 운이 나쁘면 대역죄인으로도 몰릴 수 있으며 동궁은 동궁의 법도가 있어 그쪽에서도 엄히 다룰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갑자기 추국장의 모든 궁인이 “태자 전하를 뵈옵니다!”라고 쩌렁쩌렁 외치며 절을 하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태, 자 전하를 뵈… 옵니다….”
혜비마마께옵서도 어쩔 수 없이 태자 전하께 인사를 하셨습니다.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리셨어요. 그게 수치심 때문인지 불안감 때문인지 저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형님?”
태자 전하께서 운왕 전하를 부르셨습니다. 너의 차례다, 라고 친절히 가르쳐 주시는 것처럼요.
운왕 전하는 한동안 말이 없으셨어요. 그분이 무엇을 하고 계신지 저는 볼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추국장의 공기는 느껴졌어요. 제 옆의 태자 전하께서는 그저 서 계실 뿐이셨어요. 그분은 노성을 지르시지도 않았고 누구를 비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분위기는 일변하여 태자 전하께서 모두의 위에 있음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평소 태자 전하께옵서는 운왕 전하를 많이 배려하시는 편이셨어요. 자존심 강하신 운왕 전하께서 스무 살이나 차이 나는 이복동생에게 동궁을 빼앗긴 것을 무척 분해하신다는 걸 아시기 때문에 가능한 마주치는 자리를 만들지 않으려 애쓰셨습니다. 운왕 전하께서 인사를 하는 일이 없도록 함께한 자리에서도 용건이 끝나면 바로 자리를 뜨셨다고 해요. 운왕 전하께서 인사를 하지 않으셔도 되도록 말이죠.
그러나 지금 태자 전하께서는 모두의 앞에서 인사를 하라고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태자….”
운왕 전하의 입에서 신음 같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습니다. 아까와는 달리 기어들어 가는 소리였어요.
“전하를….”
그러자 형리가 재빨리 저를 풀어 주었습니다. 그는 형틀에 저를 묶을 때와는 아주 딴판이었습니다. 혜비마마와 운왕 전하 보란 듯 거칠었던 그는 이제 태자 전하 앞에서 제가 무슨 귀한 천년 전 그림이라도 되는 것처럼 조심조심 행동했어요. 굽실거리는 그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차갑게 식었습니다. 제가 태자비였다면 그의 뺨이라도 후려쳤을지 모릅니다. 저는 이것저것에 모두 화가 나 솔직히 지금 이성을 유지하기가 몹시 어려웠습니다.
제가 형틀에서 일어나 운왕 전하를 바라보자 그분은 입을 다무셨습니다. 제 시선 앞에서 태자 전하께 인사를 하고 싶지 않으시다는 기색이 역력했어요. 그러나 태자 전하께옵서는 빤히 운왕 전하를 바라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형님.”
태자 전하의 목소리가 차가워졌습니다. 경고라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그러자 운왕 전하께서 법도에 맞게 절을 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이를 가는 듯한 목소리였습니다.
태자 전하께옵서는 제 몸 위에 당신의 겉옷을 덮어 주셨어요. 언젠가 제 귀에 꽃을 꽂아 주셨던 때처럼요. 저는 당황해서 그분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죄인인 저에게 이런 친절은 가당치도 않은 것이었거든요. 제가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돌려드리려 했지만 그분은 제 어깨에 팔을 두르는 듯하시며 옷을 잡으셨어요. 제가 떼어 내지 못하도록요.
그 모습을 본 운왕 전하께옵서 트집거리를 잡은 듯이 소리치셨습니다.
“태자 전하, 천한 자에게 이 무슨 법도에 맞지 않으시는…!”
“천한?”
태자 전하의 목소리에 날이 섰습니다. 지금까지 내내 선연한 목소리를 유지하시던 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였어요. 옆에 있는 제가 흠칫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기백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다시 말씀해 보십시오. 누가 천하다는 겁니까?”
운왕 전하는 대답을 내놓지 못하셨어요. 대답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대답 이후에 태자 전하께서 보여 주실 모습이 두려우셨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궁인들 앞에서 운왕 전하께서 부끄러운 작태를 연이어 보이시자 혜비마마께서 다급히 말씀하셨습니다.
“그이는 이제 죄인이에요! 운왕이 실수한 게 아닙니다.”
그이는, 이라고 말씀하시는 혜비마마의 여린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죄인이라고 하시면서 저를 죄인 취급 하시지도 못하시는 분이세요. 제가 저분을 싫어할 수 있을까요. 제가 여기에 서 있는 건 저분께서도 한몫하신 탓입니다. 태자 전하께서 오늘날 이런 변고를 당하시게 된 것에도 저분은 책임이 있으십니다.
하지만 저는 저분에게 늘 연민을 가지게 됩니다. 저분의 사정은 안타깝고, 저분이 장황자임에도 불구하고 태자의 위에 오르지 못한 운왕 전하의 한을 돌보시는 것도 이해가 아니 되는 바는 아니라서….
더 독한 마음을 먹어야 한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저분은 늘 제게 잘해 주셨는데 어떻게 독한 마음을 먹을까요.
어떻게 보면 황후마마보다 혜비마마께서 더 살뜰히 저를 챙겨 주셨는데요…. 음식이며 의복을 베푸는 것이며 마음 씀씀이 모두 그분은 무척 자애로우셨습니다. 사람의 감정이라는 건 정말 다루기 어려운 것입니다.
“죄인이라니요? 누가 말입니까?”
태자 전하께서 태연히 물으셨습니다. 작심한 듯한 어조는 마치 기다리고 있던 초식 동물의 목을 왈칵 문 육식수처럼 날카로우면서도 여유가 느껴졌습니다.
“태자 전하….”
혜비마마께서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그분을 부르셨어요. 누군지 알지 않느냐는 목소리에서는 애원마저 느껴졌습니다. 그러자 태자 전하께서 웃으셨습니다. 선선한 웃음. 그 웃음은 이곳의 날카롭고 스산한 공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서 광기마저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제 비를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우리는 절혼하지 않았습니다.”
뭐라고?!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절혼을 안 해요? 제가 폐위가 되었는데 어떻게 절혼을 하지 않습니까? 태자 전하답지 않은 억지에 당혹감이 들었습니다. 심지어 이런 자리에서 억지라니요. 제 시선을 느끼신 것처럼 전하께서 저를 내려다보셨습니다. 평소보다 훨씬 달콤한, 정말 녹아내리는 듯한 눈길이었어요. 제가 너무 당황해서 눈을 깜빡이자 그분이 가볍게 그 큰 손으로 제 눈을 잠깐 가렸다가 떼셨습니다.
우리의 눈이 마주쳤어요. 제 깜빡임이 멈춰 있는 걸 확인하신 전하께서 부드럽게 웃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저에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아주 다정한 목소리로.
“절혼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비께서는 폐위되지 않으셨지요.”
그리고 고개를 들어 단상 위에 계시는 운왕 전하와 혜비마마를 바라보셨습니다.
“오늘의 이 일은 대리시에서 다뤄질 겁니다.”
눈이 커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전하의 대리시라는 발언 때문이었습니다. 대리시는 문무백관의 죄를 따지는 곳이지만 실질적으로는 5품 이상의 죄를 다루는데, 궁인 중에서 5품은 상당히 높은 직위입니다. 각 부서의 최고 관리직이 정5품 정도 되니 실질적으로 태자 전하께옵서는 이번 일을 궁인이 아닌 자의 소행으로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5품 이상의, 궁인이 아닌 자.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 그 뜻이 분명했습니다.
태자 전하는 그렇게만 말씀하시고 저를 안은 채 뒤를 도셨습니다. 안았달까, 부축했달까. 아니, 그분은 제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잡고 계시는 거 같기도 했어요. 저는 그분의 팔에 잡힌 채 뒤를 돌아봤습니다. 혜비마마께서 어떤 얼굴을 하고 계신지 순수하게 궁금했어요. 늘 운왕 전하의 말이라면 다 들어주셨지만 그로 인해 수많은 위험에 처했던 분이기도 합니다.
황상께옵서는 혜비마마를 몹시 총애하시지만 그리고 황상께옵서 가장 사랑하시는 황자는 사실 장황자 운왕이시지만, 저 거친 성미 때문에라도 그분은 늘 사랑하면서도 경계하시고는 했습니다. 그리고 종종 운왕 전하는 본인이 저지른 행위에 비하면 가벼운, 그러나 본인은 무척 분해하시는 벌을 받고는 했는데 그 벌은 늘 혜비마마의 입지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오늘의 일은 운왕 전하께서 저지른 일 중에서도 단연 최악으로 손꼽힐 것입니다. 태자를 해하여 들다니요. 날이 밝으면 문무백관이 들고 일어날 것입니다. 성공하였다면 또 모를 일이나 실패한 이상 저분께는 상당히 곤란한 앞날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시죠.”
그러나 태자 전하의 앞날도 밝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이 모든 일은 황상의 마음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강산의 주인께옵서 어찌 결정하실지, 그분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실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도 태자 전하의 옆에서 걷는 것만으로도 아까보다 조금 황궁의 길이 밝아진 기분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