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다음 날 아침, 저는 이른 식사를 마치고 장서각으로 사람을 보냈습니다. 장서각은 황족에게 허가된 곳이지만 기실 여인들은 거의 출입하지 않는 곳입니다. 법도로 치면 그곳에 직접 들어가지 않는 것이 불문율입니다. 여인이 너무 많은 글자를 아는 건 보기 좋지 않거든요.
저는 글자를 많이 알지만 늘 겸손한 모습을 보여야 했습니다. 특히 황후마마, 그러니까 이 꿈속의 태후마마신 제 시어머니께오선 제 배움이 깊은 것을 몹시 불편해하셨어요. 언제나 학식이 높은 것은 여인의 자랑이 아니니 티 내지 말라고 주문하셨습니다.
장서각에 보낸 궁녀들이 돌아오는 데는 꼬박 반나절이 걸렸습니다. 제가 찾았다면 더 빨랐겠습니다만 불행히도 저는 갈 수 없습니다. 저는 고귀한 여인이니까요. 책 제목을 적느라 펼쳐 놓았던 종이를 내려다봅니다. 문득 종이 질이 무척 좋은 것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예서지라고 불리는 이 종이는 최상급으로 황궁에서도 황상께옵서 사용하시고 그 외에는 하사받은 몇 명만 겨우 사용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 종이에다 대고 책 제목을 적어 보냈군요. 이렇게 쓰일 종이가 아닌데.
“서 상궁, 이 종이는 다른 곳에 잘 보관하고 다른 종이를 준비하렴. 예서지는 이렇게 쓰일 종이가 아니지 않느냐.”
제 말에 서 상궁이 저를 가만히 바라보았습니다. 일을 바로바로 처리하는 그녀가 저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해서 저도 의아해 같이 그녀를 마주하자 그녀가 화들짝 놀라 “예, 예. 봉행하옵니다.”라며 황급히 고개를 숙였습니다.
왜 저러지? 고개를 갸웃거리다 마침 장서각에 보낸 궁녀들이 두루마리를 한 아름씩 안고 오는 게 보여 바로 신경을 껐습니다. 제게는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요.
모두를 내보내고 조용해진 서재에서 두루마리를 하나하나 펼쳐 읽어 보았습니다. 사람이 오가는 건 신경 쓰여서 싫었어요. 제가 뭘 보는지, 무엇을 하는지, 분명 다른 이에게 고해바치는 간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어느 정도는 감수해야 하는 것이 황궁 생활이지만 가능한 한 비밀스럽게 보고 싶었습니다.
한참 만에 저는 제가 원하는 부분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동궁 화재에 대해 정리한 두루마리였습니다.
“…뭐?”
동궁 화재.
그건, 제가 냉궁에 간 지 고작 석 달 만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석 달?
석 달이라고요? 그렇다면 태자 전하께옵서 언제 환궁하셨다는 이야기가 되는 거죠? 남벌을 끝내고 돌아오신 걸까요? 그렇게 빨리 전쟁이 끝났을 리가 없는데.
석 달이라니, 지금이 언제쯤인 거죠?
저는 얼마나 안 깨어난 상태로 이 꿈을 계속 꾸고 있는 거죠?
와르르하고 두루마리가 쏟아졌습니다. 제가 두루마리 더미를 팔꿈치로 쳤나 봐요. 깜짝 놀라 옆을 바라보았습니다. 쏟아진 두루마리가 왠지 지금의 상황을 보여 주는 것 같았습니다. 엉망으로 무너진…. 바보 같은 생각입니다. 두루마리는 주우면 되는 것을요.
두루마리를 줍다가 멈칫했습니다. 그건 우연이었어요. 쏟아져 내린 두루마리 중 하나가 풀리면서 보인 문구였습니다.
폐비 심씨는 자는 도중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소름이 끼쳤습니다.
***
폐비 심씨는 자는 도중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저는 그 문구를 여러 번 읽어 본 뒤 모든 두루마리를 잘 봉하여 장서각으로 돌려주었습니다. 그날 밤 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요. 언젠가부터 꿈속에서 잠을 자도 현실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잠을 자면 저는 현실에서 깨어날까요? 만약 깨어나지 못한다면…. 현실의 저는 며칠간 못 깨어난 걸까요?
살아 있을까요?
아니면 죽어서 이 꿈을 꾸고 있는 걸까요?
밤사이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 가지 정보들 속에서 일단은 결정해야 했어요. 동궁 화재. 그것이 제가 냉궁에 유폐된 시점에서 석 달 뒤라면 현실에서는 얼마 안 남았을 겁니다. 저는 일단 일어나야 해요. 이 꿈에서 깨어나 현실에서 행동해야 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해야 이 꿈에서 깨어날 수 있죠? 그건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닌데요.
어떻게 해야 깰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본 끝에 황상께 목이 졸렸던 기억이 났습니다. 그때 고통과 함께 잠이 깼어요. 고통을 주면 혹시 잠이 깨지 않을까요?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 생각이 들자마자 벌떡 일어났습니다. 아무도 없을 때 실행해야 했어요. 황녀란 수많은 시중인들이 있어서 혼자 있기가 생각보다 어렵거든요. 물론 내보낼 수 없는 건 아니지만…. 그들은 제 시중을 들면서 동시에 감시도 하는 역할이에요. 그들의 입장이 난처해지는 일은 가능한 한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가장 날카로운 것이 뭐가 있을까요? 비녀, 비녀 정도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몸에 상처를 낼 수는 없으니까요. 이 몸은 제 몸도 아닌데 멍이라면 모를까, 영구적인 상처를 남길 수는 없어요. 여인의 몸에 상처가 남는 건 아주 큰일이니까요. 설마 그런 상처가 남진 않겠죠?
사람에게 상처를 내 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비녀를 들고 망설였습니다. 비녀를 꽉 쥐고 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습니다. 아픔에 대한 걱정보다도 제 몸이 아닌 다른 사람의 몸에 상처를 낸다는 게 몹시 꺼려졌어요. 하지만.
“화상이 조금, 있어서.”
그분이 손을 가리시던 모습이 떠오르자 더는 망설일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저는 비녀를 쥔 손을 머리 위로 치켜올렸습니다. 그리고 힘껏 허벅지로 내리 찔렀어요.
악 소리가 날 정도의 통증에 눈앞이 새카맣게 물들었습니다.
“악!”
벌떡 몸을 일으켰어요. 한 번에 해치우자는 생각에 온 힘을 다해 찌르긴 했지만 진짜 너무 아팠어요! 눈앞이 까매질 정도였습니다. 와, 이건 너무 아픈데. 눈물이 절로 흘렀습니다.
아파, 아파. 훌쩍이며 앞을 보았을 때였어요. 어슴푸레한 새벽빛이 들어오는 창은 아주 낡고 허름했습니다.
저는 돌아온 것이었어요.
***
“우아아아아악!”
제 방에 들어오던 궁녀가 비명을 질렀습니다. 저도 같이 소리를 지를 뻔했어요. 냉궁에 격리된 제 방에 웬 사람이죠? 제가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있자니 궁녀가 비명도 무엇도 아닌 이상한 소리를 내며 뛰쳐나갔어요. 제대로 된 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이 그녀가 벙어리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벙어리? 황궁에 벙어리가 왜 있죠?
이윽고 누군가가 들어왔습니다. 아, 저는 그 사람을 알아봤어요. 그는 우 태의였습니다. 아주 젊은 우 태의 말입니다. 제가 눈을 깜빡이고 있자니 젊은 우 태의가 저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 잔뜩 얼어붙어 자신이 누군지 고했습니다.
그는 우 씨가 맞았고 태의원의 젊은 태의였어요. 며칠째 식사를 가져가지 않자 이상하게 여긴 금군이 상부에 보고하였고 결국 궁녀가 저를 확인하러 왔다가 혼수상태인 저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태의의 처방 아래 벙어리인 궁녀가 저를 돌보고 있었나 봐요.
“태자 전하께옵서 환궁하고 계십니까?”
제 질문에 우 태의가 멈칫했습니다. 그는 어쩔 줄 몰라 했어요. 신참인 듯 그는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바를지 알 수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그를 살살 달랬어요. 대단한 걸 묻는 것도 아니고 저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하늘 같은 지아비신데 걱정이 되는 건 당연하지 않으냐고. 한참 만에 그가 작디작은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이미 환궁하셨나이다.”
환궁하셨다고요? 전쟁은 어쩌시고?
“승전하셨나요?”
제 말에 우 태의가 안쓰러운 얼굴을 했습니다. 그 얼굴을 보자 저는 그분이 무슨 결정을 내렸는지 알 것 같았어요. 아마 꿈을 꾸지 않았더라면 모를 일이었습니다. 꿈속의 그분을 뵙지 않았더라면 저는 그분이 저를 위해 전장을 내팽개치고 돌아오셨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거예요.
하지만 알 것 같았습니다. 제가 열두 살 어린 황녀의 몸에 들어가 있어도 알아보신 그분이 저의 변고를 그냥 넘기실 수 없으셨단 걸.
안 돼요. 그건 황상에 대한 모독입니다. 불충입니다. 태자의 폐위가 논의될 게 틀림없습니다. 제 안색이 하얗게 질리자 우 태의가 한숨을 쉬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일어나려는 그의 팔을 잡고 물었어요.
“태자 전하께옵서는 어떤 처분을 받으셨습니까?”
“현재는 근신령입니다.”
“현재는?”
저는 그에게 거의 매달리다시피 해서 물었어요. 현재는? 그럼 아직 처분이 결정되지 않았단 이야기란…. 제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 태의는 무척 곤란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사실 그는 저와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당연하지요. 죄인과 오래 이야기를 해 봐야 얻는 것은 없고 괜히 경만 칠 뿐입니다.
“폐위가 논의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폐위.
심장이 덜컹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났습니다. 폐위라니요. 태자 전하께옵서 폐위되시면, 그분은 생사가 불분명해지실 겁니다. 저는 힘없이 우 태의의 팔을 놓았습니다. 더 이상 그 팔을 잡고 있을 이유도, 여력도 없었어요. 폐위라니. 소름이 끼쳤습니다.
태자 전하는 현 황후마마의 유일한 소생이십니다. 유음 황녀처럼요. 단지 그분은 적자, 그러니까 아들이시고 자연스럽게 태자가 되셨습니다.
황후마마와 혜비마마의 상황이 많이 복잡합니다. 정확히는 황상까지 얽혀 계시는 삼각관계입니다.
본래 황상께옵서는 태자가 아니셨습니다. 당시 태자 전하는 따로 계셨는데, 그분은 적장자로 태자의 존위에 오르셨습니다. 문제는 그분이 병약하셨다는 점입니다. 결국 그분은 즉위하시지 못하고 돌아가셨고 둘째 황자이자 당시 친왕이시던 황상께옵서 동궁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당시 돌아가신 태자 전하는 미혼이었지만 꽃잎 모양 점을 지닌 심씨 집안 정혼녀가 있었고, 친왕께서는 이미 혼인하여 자식까지 둔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현재의 태후마마, 그러니까 당시의 황후마마께옵서는 적장자가 아닌 태자의 정통성 시비를 걱정하시어 하늘이 내린 황후감이라는 꽃잎 점을 가진 태자의 정혼녀를 새 태자비로 새로 들여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셨습니다.
당시 친왕이시던 황상께는 왕비가 있으셨는데 그분이 바로 현재의 혜비마마십니다. 정궁이셨던 분은 지아비가 존귀해지면서 조강지처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당시 그분은 셋째를 임신하고 계셨고 그 상태로 새로운 태자비를 모셔야 했습니다. 성혼 준비도 본인이 직접 하셔야 했지요.
그 일은 금슬 좋은 부부의 관계에 큰 흠집을 냈습니다. 밝고 명랑하셨다던 혜비마마께옵서는 그 이후 언제나 조용한 분이 되었고 황상께옵서는, 심씨 가문도 미워하시고, 태후마마와 사이도 틀어지게 되셨죠. 그리고 황후마마와도 사이가 좋지 않으십니다.
이런 상황에서 황후마마께옵서 아주 늦게, 겨우겨우 낳은 한 명의 자식이 바로 태자 전하입니다. 황상께옵서는 매우 중요한 날이 아니면 황후전에 가시는 걸 기피하셨기 때문에 아이가 들어선 것이 거의 기적이라고 불릴 정도입니다. 심지어 한 번 아이를 잃으셨던 적도 있으시고요. 여하간 황후마마께옵서 회임하셨고, 결국 아이를 낳으셨고, 그 아이는 이 엄청난 대제국의 존귀한 태자가 되었습니다.
혜비마마께는 네 명의 황자와 두 명의 황녀가 있습니다. 그중 장황자 되시는 운왕께서는 태자 전하보다 나이도 스무 살이나 많으시며 호남아시지만 기질이 상당히 난폭하신 걸로 유명합니다.
그분이 태자의 위에 오르신다면 태자 전하께서는 결코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적자를 살려 두실 정도로 관대한 분이 결코 아니시니까요. 특히 그분이 즉위라도 하시는 날엔… 피바람이 불 것입니다. 이건 저만의 생각이 아닙니다. 궁에 조금이라도 발을 붙이고 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입니다.
그분은 오시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절대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