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몽중연 (10)화 (10/100)

10.

그날부터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일단 저의 금족령은 풀렸어요. 그리고 어마어마한 하사품이 들이닥쳤습니다. 수레 네 대를 가득 채운 하사품이었어요. 이번 탄신연회에서 봤던 진상품들도 있었고 보지 못했던 물건들도 많았습니다. 중요한 건 아주 귀한 물건뿐이었다는 겁니다.

후궁들에게 배분하셨어야 할 물건들이었어요. 황후마마라든가, 귀비마마라든가. 그리고 태후마마께도 올렸어야 할 물건들이고요. 그분은 그런 물건들을 전부 저에게 보내셨습니다. 제가 성혼을 올린다고 해도 이 정도 물건은 과합니다.

저는 결국 상소를 올렸습니다. 황녀 된 입장으로 상소를 올리는 것이니 무척 불경한 일입니다만 저 물건들은 그대로 받았다간 탈이 나도 엄청난 탈이 날 것이 분명했습니다. 모든 후궁 여인들을 적으로 돌리면 황녀가 어찌 살아가야 합니까?

당장 황후마마께옵서도 진노하셨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자신의 딸이 받은 하사품인데도 노여울 정도면, 다른 후궁들은 속이 어떻겠습니까. 빠른 속도로 진화해야 했습니다. 가능한 한 상소문을 아주 부드럽게 쓰고, 불충이 아니라는 뜻으로 직접 올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황상께 죄를 짓는다는 뜻으로 무명옷을 입고 굳게 마음을 다잡고 편전으로 가 뵈었지요.

그런데 그분은 걸어 들어오는 저를 보자마자 보시던 장계를 내려놓으시며 크게 웃음을 터뜨리셨습니다. 무엇이 그리 재밌으신지 모르겠지만 그분은 정말 즐거운 듯 웃으셨고, 제가 인사의 예를 올린 뒤 입을 열려는 순간 고개를 저으셨습니다.

“하사품은 못 물리십니다.”

아,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저도 이야기를 오래 들어 드리고 싶지만 중나라와 인나라 사이에 전쟁이 났습니다. 아시다시피 이 전쟁은 벌써 몇 차례나 반복되었고 양쪽 나라의 백성들은 많이 지쳤습니다. 수진성에 양쪽 나라 백성들이 모여들고 있는데 서로 감정이 좋은 사람들이 아니다 보니 성의 치안이 별로 좋지 못합니다. 군을 보내야 할지도 몰라요. 황녀에게 내린 하사품 같은 걸로 실랑이를 할 여유는 없습니다.”

수진성은 우리나라 가장 서쪽에 있는 국경 지대입니다. 수진성은 본래도 문제가 많은 성입니다. 교역이 활발한 대신 온갖 안 좋은 것들도 몰린다고 태자 전하께서 쓴웃음을 짓고는 하셨거든요. 하지만 수진성은 정말 중요한 성이기도 합니다.

“제가 수진성이 왜 중요한 곳인지 말씀드렸던 적이 있습니다. 기억하십니까?”

“전국에서 세금과 공물을 가장 많이 납부합니다.”

제 지아비께서는 저에게 늘 당신이 하시는 일을 이야기하곤 하셨습니다. 저는 대부분의 일을 잘 알고 있는 편입니다. 멍하니 대답하자 그분의 웃음이 짙어졌습니다.

“네, 가장 돈이 많이 도는 성입니다. 반드시 치안을 유지해야 하지요. …잘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잘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그 말에 저는 퍼뜩 놀라 고개를 들었습니다. 제가 방금 뭐라고 한 거죠? 저는 유도 심문에 넘어갔습니다. 황상께옵서는 제가 심서혜인지 아닌지 방금 확인해 보신 겁니다. 저는 제가 누군지 제 입으로 밝힌 적이 없으니까요. 이런 단순한 수에 넘어가다니, 이럴 수가.

얼어붙은 얼굴을 황급히 수습했습니다. 놀라고 당황해서 될 일이 아니었어요. 저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고 그분의 얼굴을 다시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제가 그러는 동안 저를 살펴보고 계셨어요. 이윽고 눈이 마주치자 그분은 또 웃으셨어요. 제가 얼굴을 수습하는 모습을 다 보셨다는 듯이.

“궁으로 돌아가 계세요.”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목소리로 축객령을 내리셨습니다.

***

또 며칠이 지났습니다.

황궁의 분위기는 현기증이 이는 것처럼 일렁이고 있었어요. 저의 금족령이 풀렸을 뿐 아니라 황녀들에게 무심하시던 황상께옵서 갑작스럽게 저에게 총애를 주시는 것에 모두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어요.

황상께옵서는 매일 저녁 저와 같이 수라를 즐기셨고 술상도 받으셨습니다. 그분은 마치 예전으로 돌아온 것처럼 행동하셨어요. 매일 국사에 관한 이야기를 하셨죠.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구와 어떤 쟁점으로 논의가 오갔는지. 이야기는 태자이던 시절보다 더 방대하고 깊어졌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늘 재밌게 들으시는군요.”

그분이 술잔을 기울이며 웃으셨습니다. 가면에 가려진 한쪽 눈이 가늘어져 있었어요. 저는 문득 가면에 가려진 반대쪽 얼굴을 생각했습니다. 얼굴은 왜 저리되셨을까요?

“풍류를 즐기시는 분이신 줄 이전에는 미처 몰라서….”

신첩이라고 할 수도 소녀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저는 저를 뭐라고 칭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분도 제가 말을 흐리는 걸 굳이 지적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관계는 애매해졌으니까요.

“즐기지 않습니다.”

“…….”

“술이 없으면 안 되는 못난 사람이 되었을 뿐이지요.”

당황했습니다. 술에 기대어 살아가는 분이시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니까요. 이분은 매우 엄격하게 자신을 관리하시는 분으로 정평이 나 있었습니다. 향락을 멀리하셨어요. 이상한 추문이 돌 정도로 결벽하신 분이었는데 술이 없으면 안 되게 되셨다니요?

“비께서 그리 가시고.”

황상의 내리깐 시선은 술잔에 닿아 있었지만 그분이 술잔 속의 술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먼 과거의 어느 날인가를 돌이키고 계시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잠을 잘 못 자게 됐습니다.”

“…….”

“제 이야기는 됐습니다. 유음이로 사는 건 어떻습니까? 비께서 그 자유로움을 조금 느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만.”

그분의 말에 저는 당황했습니다. 저는 유음 황녀의 모습을 그분이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으리라고 짐작했었어요. 하지만 그분은 유음 황녀에 대해 나쁘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어요. 꽤 좋게 보시는 것 같았습니다. 따님이라서 그랬던 걸까요? 하지만 제가 듣기로는 망나니 같은 공주였는데….

제가 아무 말도 못하고 있자 “별로 어울리지 않으시기는 하지만.”라며 웃으시더니 또 술병을 기울이셨습니다. 저와 단둘이 계시고 싶어 하시어 시중을 물리셨기 때문에 직접 술병을 잡으셔야 했지요. 제가 따라 드려야 하는 것인지, 술병을 가만히 바라보며 고민하고 있을 때 그분이 “아니요.”라고 입을 여셨습니다.

“술은 제가 따라도 됩니다.”

존귀하신 황상께옵서 직접 술을 따르시다니요.

불편하기 이를 데 없는 자리입니다. 제가 무심코 한 손으로 뺨을 감싼 채 술병을 쥔 손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그분이 슬그머니 손을 숨기셨습니다. 의아하여 그분을 올려다보자 그분이 난처하게 입술을 올리셨어요.

“화상이 조금, 있어서.”

그분은 저한테 화상을 보이는 게 조금 부끄러우신 것 같았어요. 저도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그분을 바라보았습니다. 화상을 입으시다니… 어쩌다가. 여쭤 봐도 되는 일인지 알 수 없었어요. 그분은 왠지 자신의 이야기는 하기 싫으신 듯 보였거든요.

밤바람을 타고 어딘가에서 비파 소리가 들렸어요. 누군가가 구슬픈 곡조를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서러운 선율이 귓가를 사로잡았어요. 마음이 어지러워졌습니다. 누가 이 곡을 연주하는 것일까요.

“채 귀비입니다.”

“…예?”

“지금 비파를 연주하는 사람 말입니다. 궁금하신 듯하여.”

당황해서 고개를 숙였습니다. 이분이 이토록 저의 표정을 잘 읽으신다고 이전에는 왜 알지 못했던 걸까요? 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황상께옵서 말을 이으셨습니다.

“비께서는 금을 잘 타셨지요.”

“…….”

“조만간 들려주실 수 있으실까요?”

저는 신첩이라고도 소녀라고도 저를 지칭하지 못하여 말을 흐리고 있는데 이분은 아무렇지도 않게 저를 비라고 하십니다. 저는 비가 아니에요. 저는 폐서인 되었으니 더는 그렇게 불릴 수 없는 몸인데.

“폐하께 들려 드릴 수 있다면 한없는 영광이옵니다.”

법도에 맞는 인사치례를 하자 그분이 또 웃었습니다. 아까와는 달리 쓸쓸한 웃음이라 눈을 크게 뜨니 그분이 저와 시선을 마주하지 않은 채 말씀하셨습니다.

“황제에게 바치는 거라면 됐습니다.”

“…….”

“황제에겐 많은 사람이 바치고 싶어 안달이 났으니.”

그분의 어조는 그분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냉소적이었습니다. 제가 바라보자 그분이 고개를 드셨어요. 시선이 마주치자 입술을 올리셨습니다. 그제야 저는 깨달았어요. 이분은 저만 보면 웃으시는데, 나름대로 애를 쓰시고 있는 거라는 걸요. 그러나 어떤 얼굴을 감추기 위해 웃고 계시는 건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가 봐야겠군요. 정무가 아직 많이 남았습니다.”

황상께옵서는 유음 황녀가 저라는 걸 아시게 된 이후 후궁에 발길을 끊으셨습니다. 당연히 후궁 안에서는 돌아서는 안 되는 소문이 은밀하게 돌고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고하여야 하는데 어찌 고하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왠지 모르지만 이분은 황제인 지금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으세요. 태자이던 시절, 이분은 무척 반짝이셨는데 지금은 어두우십니다. 별이 가득하던 밤하늘에 구름이 잔뜩 낀 것처럼요. 달빛 하나 보이지 않네요.

나가실 채비를 하시는 그분의 매무새를 바로잡으려다 멈칫했습니다. 제가 할 일은 아니니까요. 그러나 그분은 눈을 가늘게 접더니 해 달라는 듯이 몸을 굽히셨어요. 제 손이 닿을 수 있도록요.

“폐하.”

망설임 끝에 손을 대 봅니다. 황상의 매무새에는 처음 손대 보네요. 저는 그분의 옷 주름을 우아하게 편 다음 그분께 가만히 속삭였어요.

“무엄한 말이 궁의 그림자 속을 넘나듭니다.”

제 말이 무슨 뜻인지 그분은 바로 알아들으셨습니다. 그분은 잠시 가만히 계시다가 갑자기 저를 확 당기셨습니다. 저는 부지불식간에 그분의 품으로 끌려 들어갔어요. 그분은 한쪽 팔로 제 어깨를 안은 채 가만히 제 목에 얼굴을 묻으셨어요.

저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몸을 딱딱하게 굳혔습니다. 그분이 가만히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내쉬는 숨이 목에 닿았어요. 간지러워서 목을 움츠렸어요. 그러자 그분이 말씀하셨어요.

“냄새는… 혼에서 나오나 봅니다.”

무슨 뜻인지 몰라 대답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그분이 나지막이, 마치 꿈속을 헤매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셨습니다.

“당신의 냄새가 납니다.”

그분은 저를 한참 동안 안은 채 제 목에다 코를 묻고 계셨습니다. 냄새를 맡으신다는 걸 알았을 때 부끄러워 몸을 물리려 했지만 놔주지 않으셨어요.

그분의 숨소리가 들렸습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소리. 문득 그 소리를 듣다가 생각했습니다. 냄새를 맡으시는 소리라기보다는 물속에 있던 사람이 겨우 빠져나와 허겁지겁 숨을 쉬는 것 같다고. 그렇게나 소중하게 숨을 쉬고 계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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