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몽중연 (9)화 (9/100)

9.

제가 들은 말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 그분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제가 아무 대답도 고하지 않자 그분이 잡고 있던 제 팔을 거칠게 흔드셨어요.

“어디 계셨냐고 묻느니!”

황상께서 고함을 지르셨습니다. 갈라진 목소리는 그분의 혼 밑바닥에서 끌려 나온 듯했습니다.

“누구를 말씀하시온지 소녀….”

말을 하다 문득 다시 고개를 돌렸습니다. 제가 입던 무명옷이 보였어요. 여기는 제 방, 제가 죽은 자리. 제가 죽고 나서는 봉해진 곳. 그리고 유음 황녀는 금줄을 뜯고 들어왔지요. 그 유음 황녀에게 황상은 하문하고 계십니다. 어디에 계셨느냐고. ‘누가’ 어디에 있었는지, 그분은 말할 수 없는 듯했습니다.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도 없으신 것 같았어요.

“폐하.”

죽은 사람을 보았느냐고, 그녀가 어디에 있었느냐고, 지금 황상은 하문하고 계십니다. 아연해졌습니다. 그분이 저를 조금쯤은 생각해 주시길 바라긴 했지만…. 제가 그런 욕심을 가지고 있었던 건 맞지만 이런 걸 바란 건 아니었어요. 절대 맹세컨대,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황상께 정색했습니다. 그분이 정상이신지 일단 확인해야 했거든요. 열두 살의 딸에게 하문하실 내용도 아니고 설마 이런 하문을 다른 이들에게도 하고 계시는 거라면. 천지신명이시어, 아무리 이분이 정통성을 지니신 황상이셔도 용상의 자리는 유지되지 못할 겁니다.

“너는 그분을 뵈었어, 그렇지?”

저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황상께서는 제가 고개를 흔드는 걸 보시면서도 제가 고하는 걸 가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너는 분명히 그분을 뵈었다.”

황상의 눈에 핏발이 서서 너무 무서웠는데, 무서운 만큼 딱 그만큼 처연하여서 가슴이 죽을 듯이 아파 오기 시작했습니다.

“폐하, 그분이란, 그러니까, 그분이란….”

“서혜 말이다!”

황상께옵서 미칠 것 같은 얼굴로 소리를 내지르셨을 때 제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습니다.

울면 안 돼요. 울면 안 됩니다. 법도에 맞지 않아요. 아, 지금은 법도에 맞는 게 하나도 없지만 그래도 법도는 중요합니다. 선나라의 여인은, 신분이 고귀하다면 더욱더, 울면 안 됩니다. 희로애락을 드러내지 않고 타인에게 상냥하고 어질고 윗사람에게 순종하고 아랫사람에게 관대하고….

…저는 이 꿈에서, 아니 저는 아주 오랫동안 저 이름으로 불려 본 적이 없습니다. 태자비. 폐비 심씨. 그것이 저를 부르는 명칭이었습니다. 그년이라는 멸칭은 들어 보았지만 서혜라는 이름은 너무 오랜만이라서…. 저를 그렇게 생각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는 게, 그 사람이 제 지아비라는 게, 그가 그토록 오랜 세월이 지난 이 순간에 제 이름을 불러 준다는 게 너무 고맙고 마음 아프고…. 그리고 그동안의 알게 모르게 쌓였던 설움이 폭발해서.

눈물이 또 뚝, 하고.

저는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았습니다. 눈을 감고 울음을 참으려고 애썼어요. 언제나 이렇게 하면 눈물을 참아 낼 수 있었습니다. 온몸에 힘을 주고 다른 생각을 하려고 애썼습니다. 아무 생각이나요. 아까 봤던 냉궁 담이라든가, 등의 불빛,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 그런 것들을요. 뭐라도 상관없었어요. 그저 눈물만, 슬픔만 잠재울 수 있다면.

그런데 제 팔을 잡고 있는 황상의 손에서 힘이 조금 빠져나갔습니다. 그분은 제 팔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머뭇거리고 있었어요.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눈을 뜰 수가 없었습니다. 아직 눈물을 다 삼키지 못했거든요. 감은 눈꺼풀 안쪽으로 눈물이 차올라 눈을 뜰 수가 없는데….

“당신입니까?”

황상께옵서 나직하게 물으셨습니다.

“비께서 제 딸의 몸에 오신 겁니까?”

한 번 더 그분이 물으셨을 때 저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습니다. 고여 있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어요. 그러자 그분이 일그러진 웃음을 지으셨습니다. 그분도 우실 것 같았어요. 그분은 가만히 저를 내려다보시다가 이윽고 저를 끌어안으셨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그래요, 잘 오셨어요.”

저는 그분의 품에 안겨 있다가 화들짝 놀라 그분을 밀어냈습니다. 그분은 쉽사리 밀려나셨어요. 하지만 그분의 시선은 저에게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제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분의 눈길은 매우 집요했어요. 저의 어느 부분이 유음 황녀와 다른지 확인하는 눈길이었습니다. 저는 고개를 저었어요.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저 고개만 계속 저었어요.

“당신께선 수를 잘 놓으셨고.”

“아니….”

“늘 모두를 공정하게 대하셨지요.”

“아니, 아니옵니다, 폐하.”

“언제나 눈물을 참으실 때는 눈을 감고 온몸에 힘을 주셨고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을 뻔하다 억지로 눈을 떴습니다. 아니라고, 고개를 젓는데 그분이 제 뺨에 손을 갖다 대셨어요. 그리고 고개를 숙여 저와 눈높이를 맞추셨습니다. 시선이 똑같았어요. 그분이 저에게 자주 하시던 버릇이었습니다.

“유음이는 수도 못 놓고 눈물도 참지 않습니다. 사람 대하는 법을 아직 모르는 어린아이고요. 저를 속이실 요량이셨다면 조금 더 능숙히 하셨어야 했습니다.”

저는 다시 고개를 저었습니다. 속이려고 했던 게 아니에요, 라고 말하고 싶은 건지. 아니면 저는 심서혜가 아닙니다, 라고 말하고 싶은 건지. 저도 제가 뭐라고 말하고 싶어 고개를 젓는 건지 알 수 없었습니다.

“돌아오셨으면, 됐습니다.”

“폐하….”

“그거면 저는 됩니다.”

그러니까 아니라고는 하지 마세요.

그분이 나직하게 속삭이셨습니다. 그 말이 기원처럼 간절하여 저는 더 아니라고 하지 못했습니다. 그분이 한 번 더 저를 끌어안으셨을 때 저는 가만히 그분의 옷자락을 잡았습니다. 평생 황궁 생활을 위해 교육받아 왔습니다. 자라는 내내, 그리고 태자비가 된 뒤에도 교육은 계속되었지요. 그러나 아무도 이런 상황에 어찌해야 하는지 알려 주지 않았습니다.

“이리 오세요.”

한참 저를 안고 계시던 그분께서 저를 안아 올리셨습니다. 깜짝 놀랐어요. 철이 든 이후 누군가에게 안겨 본 적이 없었거든요. 지면에서 몸이 뜨는 감각이 너무 이상해서 저도 모르게 그분의 어깨를 잡았습니다. 어정쩡하게 그분의 어깨를 잡고 있으니 제 등을 감싸 몸 쪽으로 당기셨습니다. 강한 힘은 아니었지만 고집스러운 힘이었습니다. 저는 어쩔 수 없이 어설프게 그분께 기댔습니다.

“어린아이의 몸으로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좀 쉬세요.”

그분의 어깨는 두껍고 단단했습니다. 어깨에 머리를 대고 있자니 이상하게 노곤해졌습니다. 잠이 왔어요. 왜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조금 지쳤던 듯합니다. 아아, 맞아요. 저는 지쳤어요. 언제부터 지쳤었는지 생각해 보다 깨달았습니다.

저는 이분을 남쪽 전장으로 보내고 나서부터 내내 좀 지쳐 있었습니다. “가능한 한 빨리 돌아올 터이니 조금만 버티십시오.” 이분께서는 마지막으로 제게 이렇게 당부하셨는데 저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곧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분이 떠나고 동궁에 남은 저에게는 수많은 악재가 덮쳤습니다. 저는 황궁의 여인으로서 지내는 방법을 능숙하고도 교묘하게 사용할 줄 알았지만 그건 모두 후궁 내의 일이었습니다. 외부에서 뻗어져 오는 일에는 속수무책이었어요. 결국 몰락할 때까지 저는 제대로 손을 쓸 수 없었습니다.

냉궁에 와서는 내내 이 꿈을 꿨지요. 이 꿈은 흥미로웠지만 피곤했습니다. 탄생연을 준비하는 과정도 그렇지만 다른 사람인 척 살아가야 하는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황후마마를 대할 때 마음이 많이 힘들었어요.

저는 언제부터 이분을 이토록 의지했던 걸까요. 우리는 그저 정혼 관계였는데. 그저 어린 시절 짝 지어진 곁붙이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저는 언제부터 이분을 이토록.

그리고 언제부터 이분은 저를 이토록….

상념에 빠져 있다가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나도 모르게 든 잠은 무척 달아서 침상에 눕혀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어요. 황상께옵서 제 이부자리를 손수 봐주시고 도닥거리시는 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부지불식간, 잠이 들었습니다.

얼마나 잤을까요. 정신이 들었지만 눈을 뜨고 싶지 않아 고집스럽게 감고 있었습니다.

냉궁의 천장을 홀로 바라보면 어떤 감정이 북받쳐 올지 알 수 없어서, 그게 너무 두려워서 눈을 뜰 수가 없었어요. 냉궁에 저는 홀로 있겠죠. 어제의 그 일은 모두 꿈속의 일에 불과하고요.

제 지아비이신 그분은, 아니 지아비셨던 그분은 실제로도 저를 아끼셨습니다만 그분이 꿈에서처럼 저를 그리워하시리라는 생각은 역시 들지 않습니다. 냉담한 성품도 아니시고 열렬한 성정도 아니십니다. 그분은 따뜻한 차 같은 분이세요. 고상하고 은은하고 좋은 향이 도는. 누구나가 좋아하고 원하고 무게를 달면 그만큼 금을 내놓아야 하는 천금 같은 찻잎 말입니다.

그분은 저를 안타까워하시겠지만 다음의 태자비에게 또 다정다감한 부군이 되어 주실 겁니다. 저는 역적의 딸로 여기서 죽을 거고요. 꿈은 꿈일 뿐이지요. 아니, 저는 여기에 있기 때문에 꿈을 꾸는 겁니다. 꿈꾸는 것 외에 제게 남은 자유는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지금은 눈을 뜨고 싶지 않아….

“황녀마마, 황녀마마.”

서 상궁의 목소리에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꿈속에서 잠이 들었는데 어째서 또 꿈속일까요? 제가 놀라 그녀를 바라보자 서 상궁도 같이 놀란 듯 “마마?” 하고 되물었습니다. 저는 고개를 저었어요. 아무것도, 아무것도. 그렇게 말하는 저는 꽤 얼빠진 모습이었을 것 같습니다.

“황상께옵서 행차하신다 하옵니다.”

여기를?

아, 아아.

어젯밤의 일이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궁중 법도상으로 부황께옵서 황녀의 궁을 찾는 일이 있었는지, 자다 일어난 머리로 잘 생각해 내기 어렵습니다.

법도는 황상 아래에 있으니 그분은 무엇이든 하실 수 있지만 유음 황녀의 입장은 다릅니다. 황상께옵서 오신 거라 할지라도 황상께는 죄를 물을 수 없으니 죄는 유음 황녀의 것이 됩니다. 네, 저의 죄가 되는 것입니다.

황녀는 부황을 뵐 때 모친을 동반하는 게 원칙입니다. 처소에서 홀로 뵙는 일은 극히 드물어서 어떻게 황상을 맞아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저는 사실 그의 비였던 몸이지 않습니까? 물론 폐서인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절혼하게 되었습니다만….

…죄인으로서 뵈어야 되나요…?

“황상을 뵈옵….”

“일어나세요.”

황상께옵서 들어오시자마자 일단 공주의 예를 올렸습니다. 아니, 올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저를 서둘러 일으키고 손을 잡아 자리에 앉히셨어요. 저에게 존대를 하셨고요. 황상께옵서 존대를 할 상대는 황궁의 어른이신 황태후마마뿐입니다. 혹은 존중의 의미에서 황후마마께 하실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분들이 아니니 당연히 하대를 받아야 합니다.

저는 당황해서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눈으로 제법 많은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둘이 성격이 비슷하기 때문이었겠죠. 제가 눈으로 존대를 하시면 안 된다는 의견을 피력하자 그분이 웃음을 터뜨리셨습니다. 맑고 경쾌한 웃음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등 뒤가 서늘해지는 기분이 들었어요. 무서웠어요. 어딘가 광기가 느껴졌거든요.

그분이 말씀하셨습니다.

“늘 말씀하시던 법도 말입니까?”

유음 황녀는 법도를 말했을 사람이 아닙니다. 제가 왜 그러시냐는 시선을 보냈지만 그분은 웃으시며 “저는 황제입니다.”라고 말하셨습니다. 저라니요! 엄연히 법전에 황상께옵서는 당신을 ‘짐’이라고 지칭한다고 되어 있는데요!

제 눈이 얼마나 휘둥그레졌을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무척 컸을 겁니다. 왜냐하면 황상께옵서 무척 즐겁게 웃으셨거든요.

…제 지아비께옵서는 이런 분 아니셨는데, 이분 누구시죠?

어제는 분명 제 지아비를 뵌 것 같았는데 오늘 다시 혼란스러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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