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몽중연 (8)화 (8/100)

8.

제가 꿈으로 돌아갔을 때, 꿈속은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간 폐허처럼 조용하고 스산했습니다.

저는 황상께 목이 졸려 쓰러진 후 궁으로 옮겨졌습니다. 태의가 저를 돌보았지만 황상의 진노는 상상을 초월하여 금족령에 처해졌다고 합니다. 당분간 저는 제 궁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습니다.

황상께 미운털이 박혔다는 소문에 저의 입지는 좁아졌습니다만 이번 탄신연 자체는 성공이었던 듯합니다. 덕분에 황후마마에 대한 세인들의 평가가 무척 높아졌다는 이야기가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제 궁의 상궁들은 그 공을 모두 황후마마께서 당신의 것으로 삼으신 것에 대해 몹시 화가 나는 모양입니다. 그들은 그분이 친딸의 공을 가로챈 거라 생각하는 듯했어요.

틀린 말은 아니지만… 완전히 맞는 말도 아닙니다. 그분은 이렇게 행동하시는 게 맞습니다. 황상의 탄신연은 황후마마의 주도하에 열린 대연회입니다. 공은 그분이 차지하시는 게 맞지요. 세세한 공들은 실무를 본 관리들에게 돌리고요.

거기에 황녀가 끼어들 틈은 없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공을 세우지 못할 일을 받은 겁니다. 알면서 했으니 억울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저와 같이 일을 한 제 궁의 궁인들은 분할 수밖에 없지요. 저는 제 패물을 풀어 그들의 노고를 치하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안색이 밝아졌어요.

“마마, 황후마마께옵서 금일도 황상께 아무런 청도 올리지 아니하셨다 하옵니다.”

물론 모두가 제 패물에 만족한 건 아니었습니다. 서 상궁의 경우에는 감사하다 하긴 했으나 제 패물에 큰 관심은 없어 보였어요. 그녀에게 가장 마음이 쓰였던지라 꽤 큼지막한 진주가 박힌 비녀를 주었는데도요. 하긴 이전에도 물욕은 별로 없는 사람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보다는 명예욕이 있는 사람이었지요.

그리고 그녀는 지금 황후마마께옵서 저의 금족령에 대해 황상께 청원을 올리지 않는 것에 분개합니다. 황후마마의 달라진 평가는 저로 인한 것인데, 그분께서는 평가가 달라지시자 몸을 사리시며 저를 등한시하고 계시거든요. 이전이었다면 분명 저를 위해 눈물도 흘리시고 달려도 오시고 청원도 올리셨을 거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번은 사정이 다릅니다. 탄신연의 성공으로 후궁에서 황후마마의 평가가 올라가자 그분께서는 지금 평가가 떨어진 딸의 오물이 튀는 게 부담스러워지신 겁니다.

황궁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라 외롭지도 서운치도 않습니다. 저는 이런 일에 길들여 있으니까요. 그래도 조금 씁쓸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요. 저는 황후마마께옵서 좋은 어머니이신지는 몰라도 따님을 아주 사랑하시는 분이라고는 생각했어요. 그 모정은 저에게 무척 감명 깊은 것이었습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런 모정을 마주할 일이 별로 없었거든요.

그분이 존귀한 자리에 계시는 분인데도 불구하고 망나니 같은 딸을 감싸시는 것이 저에게 무척 신선했습니다. 저는 그 부분을 높게 샀어요. 그래서 이분을 도왔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분도 결국 똑같은 황족이셨을 뿐이라고 생각하니까.

당연한 건데도.

그리고 저는 애초에 그분의 딸이 아니니 실망할 것도 기대할 것도 없는 데도.

세상에 한 명쯤은, 황궁에도 자식을 먼저 생각하는 어머니가 계시는 걸까 싶어 괜히 기분 좋았던 며칠이 쓴맛으로 남았습니다.

“마마, 수라를.”

“됐다. 생각 없어.”

입맛이 없었어요. 속이 좋지 않았습니다. 황후마마가 변하신 게 저 때문이라면 어떡하죠? 차후에 유음 황녀가 돌아오게 된다면…. 그녀는 변한 어머니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지게 될까요?

밤이 되자 바람 소리가 제법 컸습니다. 늦가을의 스산한 바람이 제 가슴까지 들어오는 듯해서 기분이 더 가라앉았어요. 제가 창가를 멍하니 보고 있자니 서 상궁이 “마마, 창문을 닫으리오까?”라고 물어 왔습니다.

“아아, 그래.”

정신을 어딘가 먼 곳에 둔 채로 대답하고 있을 때 갑자기.

“황상 납시오.”

밤중에 들릴 이유가 없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몸은 절로 일어나졌습니다. 습관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분은 대부분 밤이 되면 저를 찾으셨어요. 궁인들은 저와 그분 사이에 잠자리가 없는 줄 알았지만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때로는 없을 때도 있었어요. 그러나 잠자리가 있든 없든 그분은 제게 오셔서 밤을 보내셨습니다.

새벽 일찍 침전으로 납시어야 하시는 불편이 있으신 데도 당신의 침전에서 밤을 보내는 일은 극히 드무셨어요. 편전에서 늦은 밤까지 정무를 보신 다음에도 제게 오셨기 때문에 저는 잠을 자지 않고 그분을 기다리곤 했습니다.

정작 그분께오선 기다릴 필요 없다고 몇 번이나 말씀하셨지만요. 법도상 그분이 오시리라는 게 확실시되면 저는 밤을 새워서라도 그분을 기다리는 것이 맞기도 하거니와 정무로 지친 그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제게는 기다리는 것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리했었습니다. 우리는 부부였어요. 그것도 금슬이 상당히 좋은 부부지간이었습니다. 저는 그분을 늘 경애했어요.

그리고 제가 존경하던 그분은 한 번도 이런 모습을 보이신 적이 없습니다. 내관들이 그분의 차림을 여러 번 손본 듯했지만 술에 취하신 터라 흐트러진 모습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고, 원체 향락을 즐기지 않으시는 분이라 술에 취하자 눈가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습니다.

저는 버릇처럼 그분을 부축하려다 멈칫했습니다. 저는 그분의 비가 아닙니다. 황녀죠. 그러니 예법에 따르면 그분을 부축할 이유가 없습니다. 특히 이 밤중에 제 처소에서는요.

저는 서 상궁에게 창문을 열라고 눈짓을 보내려다 망설였습니다. 창문을 열면 분명 간자들이 침전 안쪽을 확인할 것입니다. 그들은 저의 결백을 증명해 주겠죠. 혹시나 근친상간에 대한 소문이 돌지도 모르니 초장에 잡아 두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저분은 많이 취하셨는데 제가 그 모습을 많은 이들에게 보여야 할까요. 저분이 이 늦은 시간에 어린 황녀의 처소에 왔다는 건 정적들에게는 아주 좋은 빌미가 됩니다. 법도에 맞지 않아요. 그렇게 생각하면 창문을 여는 것이…. 하지만 저분의 저런 모습을 몇 사람에게나 더 보여야 하나요.

저는 결국 눈짓을 보내지 못했습니다. 제가 망설이는데 갑자기 그분이 제 팔뚝을 잡으셨습니다.

“따라와라.”

억센 손에 살이 터져 나갈 것 같았어요. 아프다고 해서는 안 되지만 신음이 절로 나왔습니다. 겨우 참으며 그분의 빠른 걸음을 따라 걸었습니다. 종종 걷는 제 걸음을 그분은 완전히 무시하셨어요. 대내관이며 내시장이 “폐하, 폐하.” 하고 그분을 어떻게든 진정시켜 보려 했지만 그분의 귀에는 아무것도 닿지 않는 듯했습니다.

한참을 걷는 끝에 저는 그분이 어디로 가시는지 깨닫고 얼어붙었습니다. 담이 익숙했어요. 이 담은 냉궁의 담입니다.

이곳에 왜 왔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황상께서 오실 곳은 절대 아닙니다. 법도가, 라고 말할 뻔했어요. 황상은 무치. 황상은 법도 그 자체. 결코 해서는 안 되는 말입니다.

제가 이 말을 할 뻔한 것은 저도 모르게 그분이 황상이 아니라 제 지아비셨던 이연 태자로 보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밤은 어둡고 우리는 등불을 따라 걷고 있었으니까요. 어두운 곳에서는 그분의 모습만 보일 뿐 저 자신이 누구인지는 평소보다 더 잘 느낄 수 없게 됩니다.

제가 평소 법도가, 라고 말하면 태자 전하는 늘 웃으셨습니다. “비께서는 충분히 법도에 맞게 행동하고 계십니다. 제가 보증하지요.” 그분은 그렇게 속삭이시고는 했어요.

가끔 그분은 심술궂게도 당신은 안 드시는 술을 저에게 주시고는 했습니다. 저도 술을 잘하지 못하는지라 마실 때마다 가만히 웃는 얼굴을 만들어 내느라 곤욕을 치르고는 했는데 그분은 그걸 보시고는 제게 달콤한 것들을 밀어 주셨습니다. 그분이 밀어 주시는 것 중 제가 싫어하는 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분은 정말 세심한 지아비셨어요. 그런 그분이 지금 제 살을 터뜨릴 듯 붙잡고 계시는 분과 같은 분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습니다.

황상께옵서는 법도에는 관심도 없으신 듯 단숨에 냉궁의 문을 지나치셨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법도 때문에 우물쭈물했지만 그분의 힘에 이끌려 제가 망설인 건 아주 찰나였고, 결국 저도 냉궁 안에 발을 디디고 말았지요.

“불을 켜라.”

지엄한 황명에 금군들이 서둘러 냉궁에 불을 켰습니다. 곧 대낮처럼 밝아진 냉궁을 마주할 수 있었어요. 그건 저에게 놀라운 광경이었습니다. 저에게 냉궁은 늘 어둡고 축축한 곳이거든요.

어둠이 내리면 아무 데고 갈 수 없는 죽음 같은 곳. 그런데 불을 밝히자 아주 낡긴 했지만 여느 궁과 다를 바 없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습니다. 어둠이 궁의 지저분한 부분을 많이 가려 주었기 때문이지요.

황상께옵서는 저를 붙들고 성큼성큼 걸으셨습니다. 그분이 향하시는 곳이 어딘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곳은 제가 쓰고 있는 방입니다. 봉해졌었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던 듯 그 주변에는 금줄과 부적이 어지러이 놓여 있었습니다.

아무도 금줄과 부적을 치우지 않았던 건 치워도 되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다시 봉하는 것인지, 저 금줄과 부적이 이제 소용이 없어진 것인지, 이 궁 안에 아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황상께서 신궁의 궁주를 불러 논하셔야 할 문제이니 그전까지는 저것에 손대는 건 선황의 유지를 거스르는 것에 해당됩니다. 유음 황녀를 제외하고 그런 겁 없는 사람이 당금 황궁에 또 있을 리가요.

황상께옵서 저를 잡은 채 문지방을 넘으셨습니다. 그러더니 그분이 문을 쾅 닫으셨어요. 들어오려던 대내관이 흡, 하고 숨을 삼키는 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렸습니다.

당혹스럽기는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기는 제가 살던 방이에요. 자세히 보니 제 물건들이 아직 남아 있네요. 저기 개어져 있는 건 제 옷이 틀림없었습니다. 제가 모르고 하얀 무명옷에 꽃물을 묻혔거든요. 그 물은 빨아도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그 흔적이 보이는 걸 보니 분명 제 옷입니다.

그런데 왜 여기에서 우리는 단둘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걸까요? 도대체 이분은 무슨 말이 하시고 싶으신 걸까요? 저는 그분을 올려다보았고, 그분도 저를 내려다봤습니다. 우리는 한참이나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어요.

그분이 이윽고 물었습니다.

“어디 계시더냐.”

그건 질문이라고 할 수 없었어요. 그건 침통한 신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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