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다, 다 죽여 버려야 할 것들이다. 다 무엄한 것들이야…!”
으앙, 하고 황후마마는 울음을 터뜨리셨습니다. 정말 우시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소리는 제법 컸습니다. 저는 남이 들을까 봐 두려웠어요. 하지만 울고 계시는 분께 모르는 사람이 들을까 두려우니 울음을 그치시라 말씀드리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유음 황녀와 황후마마는 어떤 사이였을까요? 분명 울거나 웃거나 화를 내는 데에 있어 매우 솔직한 사이가 아니었을까요?
제가 입을 다문 사이 황후마마는 엉엉, 하고 소리 내어 우셨습니다. 하지만 눈물은 몇 방울 나오지 않았어요. 저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가 가만히 그분의 손을 잡았습니다.
“어마마마.”
열두 살의 황녀가 무슨 힘이 된다고 이런 말을 하겠냐만은 그래도 이 황후마마께는 황녀 외에는 아무도 편이 없어 보였습니다.
“소녀가 좀 볼까요?”
네가?
황후마마의 눈에 이채가 어렸습니다. 네가 본다고 뭐가 해결이 될까? 그 눈은 곧 지푸라기라도 잡아 보겠다는 심정으로 변했습니다. 이분은 아마 지금 정신이 없으신 것 같아요. 저라면 열두 살의 딸에게 이런 일을 상의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이분은 가엾게도 저에게 탄신연에 대한 것들을 내미셨습니다. 손님의 명단, 자리 지정, 연회 음식 목록, 술의 목록, 꽃들의 지정 목록, 각 부의 전달 사항 등이 빼곡히 적인 두루마리들이 저에게로 넘어왔습니다.
한참을 읽어 보고 의아한 점을 여쭌 끝에 저는 아연한 기분으로 황후마마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왜 태후마마께옵서 이분을 기꺼워하지 않으시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이분은 황궁의 돌아가는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고 계십니다. 이대로라면 모두에게서 불만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어요.
황상의 탄신연은 아주 큰 연회입니다. 연중 연회 가운데 손에 꼽을 만한 행사 중 하나이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공을 세우려고 달려들게 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황후마마께옵서는 이 연회를 여실 때 각각의 사람들에게 공을 세울 자리를 마련해 주시고 그들의 공을 치하해 주셔야 합니다. 그들은 관리입니다. 공을 치하받아야만 자신의 존재 가치가 입증되는 사람들이죠.
그런 사람들의 노고를 발밑에 깔고 본인의 공만 뽐내는 계획을 세우시면 모든 관리가 트집을 잡게 됩니다. 황후마마가 아무리 존귀한 분이라 하여도 정론으로 나오는 데는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이러저러하여 어려울 듯하온데 어찌하오리까? 이런 말을 내내 들으셔야 합니다.
물론 황후마마는 그대로 밀어붙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의 모든 책임은 황후마마 한 분께 온전히 쏟아지게 됩니다. 모든 관리가 어렵다 한 일을 황후마마 한 분이서 밀어붙이고 그 뒷감당이 되겠습니까?
게다가 일을 하는 건 밑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일을 망치겠다 마음먹고 담합을 하면 일은 순식간에 어그러집니다. 그들은 모두 황후마마의 탓을 할 것입니다. 그들은 이러는 데 있어 매우 능한 사람들입니다.
온갖 곳에서 황후마마의 계획을 반대하고 있었습니다. 상소가 이미 한 바구니가 넘치도록 올라와 있었어요. 이런 이유로 불가, 저런 이유로 불가. 논리적으로 타파할 수 있는 부분도 있고, 논리적으로 관리들이 옳은 말을 하고 있는 것도 있었습니다만,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이 황후마마를 미묘하게 적대시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윗사람이 공명정대하지 못하면 아랫사람은 충성을 다하지 않습니다. 황후마마의 격렬한 기질이 아랫사람들에게는 공포가 되면서 동시에 반발을 일으키는 요소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루 이틀 사이 구축된 관계도 아닌 것으로 보이니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요…. 태후마마께옵서는 황궁의 돌아가는 방식을 너무나 잘 아시는 분인 데다 후궁을 꽉 쥐고 계셨던 주인이셨습니다. 그러니 그분의 말은 통했지만 황후마마의 계획은 무너질 게 뻔해 보입니다.
손가락으로 톡톡 서안을 치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이 난국을 헤쳐 나갈 만한 좋은 방법이 있을까.
“어려울수록 정도가 가장 지름길이라는 걸 잊지 않고 살아가려 노력합니다.”
언젠가 태자 전하께서 하신 말씀이 왜 지금 이 순간 떠오르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어려울수록 급할수록 정도가 가장 빠른 길이다….
아아, 정도라. 정도란 말이지.
저는 흘끔 쌓여 있는 상소를 바라보고 다시 시선을 돌려 일거리의 산을 확인했습니다. 솔직히 별로 끼어들고 싶진 않았어요. 이런 일은 잘 도와 봐야 본전이고 나쁘게 흘러가면 도운 사람의 탓이 되기 십상이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저는 이 황후마마에 대해서 제가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스스로도 잘 알 수가 없습니다. 죄책감도 있고 미안함도 있지만 그분이 누리고 있는 것들 중에 제가 공들여 가꿨던 것들이 자꾸 보이는 것은 어찌해야 할까요. 그분의 탓은 아니고 여기는 꿈속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꿈을 꿀수록 여러 상황이 생겨나고 결국은 현실처럼 느껴집니다.
한배를 탄 셈이잖아.
자신을 다독여 봤습니다. 제가 유음 황녀인 이상 저는 황후마마의 보호 아래 있습니다. 그분이 무너지면 저도 없는 겁니다. 제가 아무리 적녀라고 해도, 그것은 황후마마께옵서 황후이실 때나 성립되는 이야기입니다. 생각보다 황후라는 자리는 아득히 높은 만큼 아찔하도록 위험한 곳이지요.
한숨을 쉬지 않으려 애쓰며 두루마리를 집었습니다. 할 일이 태산이네요. 탄신연까지는 앞으로 일주일 남았습니다.
***
유음 황녀의 성격을 흉내 내는 것은 제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는 언제나 자신의 의견을 고상하게 표출하는 법만 배웠지, 날카롭게 소리 지르고 때로 물건을 집어 던지는 행동을 해 본 적이 없으니까요.
그러나 저는 유음 황녀의 방식을, 사용해야 한다면 기꺼이 사용했습니다. 저는 제 방식대로 사람들을 타이르고 안 되면 유음 황녀의 방식으로 사람들을 협박했습니다.
예부와 논쟁하고, 천자의 일상 음식을 관장하는 상식 봉어를 불러다 음식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면 황상께 죄를 짓는 것이니 그 죄는 너뿐만 아니라 사가의 가족들도 함께 갚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탄신연은 아주 크고 중요한 행사입니다. 누구 하나도 집중하지 못해서 망쳐서는 안 됩니다.
한편, 황후마마의 사람들을 둘러보았는데 황후마마는 간자를 사용하는 법을 잘 깨우치지 못하셨습니다. 자신의 본곁 사람들만 곁에 두시는 한편 간자를 잘 키우지 않으셔서 주변 상황에 어두우신 편이었어요.
당연히 저도 아는 바가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큰 행사를 준비할 때는 세세한 정보가 중요한데, 아마 그동안은 태후마마께옵서 모든 걸 아시기에 조율이 가능했던 듯합니다.
제가 아는 것이 꿈에서도 통용될까요? 꿈과 현실이 이어져 있다고 가정한다면, 몇 가지는 결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몇 가지뿐입니다.
이 꿈은 제가 냉궁에 간 뒤 십수 년 뒤를 가정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은 제가 알 수 없는 것들이지요. 저는 아직도 왜 저의 지아비셨던 꿈속의 황상께옵서 제가 알던 분과는 사뭇 다른 분이 되셨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일주일간 일을 하는 한편 간자가 될 만한 이들을 추렸습니다. 사가에 돈이 필요한 자, 만년 차석인 자, 개인적으로 공금을 유용하고 있는 자 등. 약점이 있거나 더 높이 올라가길 원하는 자들이 간자의 후보들입니다.
“만년 상식 직장이라는 것은 마음이 많이 상할 일이지. 벌써 나이가 쉰이 넘었는데 봉어가 되지 못했다함은 한이 맺힐 일이다. 충분히 간자가 될 수 있겠지만.”
상궁이 간자로 추천한 이는 만년 상식 직장인, 즉 이인자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이 사람을 압니다. 그녀는 이인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무척 괴로워하고 있는 데다 별로 올곧은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그녀를 간자로 사용해도 될 법하다고 상궁이 들이민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녀는 현실에서 태자 전하의 간자였습니다.
그녀가 꿈속에서는 태자 전하의 간자가 아닐까요? 혹은 세월이 지나서 간자에서 벗어났을까요? 혹여나 내가 간자를 사용한다는 걸 황상께서 아시게 되면… 좋은 결과는 나오지 않을 겁니다. 간자를 쓰는 후궁이나 황녀를 기꺼워하는 황제는 고금 어디에도 없으니까요.
“이 사람은 빼지.”
“그 사람이 가장 적합한 인물입니다.”
상궁이 욕심을 부립니다. 저는 고개를 돌려 상궁을 바라보았습니다.
서정원 상궁. 이 사람은 본래 제 사람이었습니다. 신중하고 철저하며 정확하기로는 후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입니다. 후궁에서 보다 좋은 자리를 차지했을 법도 한, 완벽한 일 처리를 자랑하는 인물이지만 고집이 세다는 게 단점입니다. 그녀는 그 고집 때문에 태후전이나 황후전 같은 요직에 가지 못하고 동궁으로 왔습니다.
태자비의 지밀이란 애매한 위치입니다. 미래를 보장받는 듯하지만 그 반짝이는 미래는 너무 멀리 있지요. 그사이 지밀상궁이 바뀌어도 수십 번 바뀔 수 있습니다. 어려운 자리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사람이 좋았습니다. 아첨도 잘 떨지 못하지만 우직한 사람이라 제가 아껴 준 만큼 보답하려고 하는 사람이었어요. 제가 공들여 가꾼 사람 중 하나입니다.
폐서인이 될 때도 이 사람의 처지가 조금 걱정되었었습니다. 상전이 몰락한다는 건 아랫사람들의 입지도 좁아진다는 의미니까요. 그러나 다행히도 황후마마께옵서 이 사람을 쓰시긴 하셨네요. 지밀상궁으로 쓰시진 않았지만.
서정원 상궁은 유음 황녀를 돌보는 유모 상궁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능력을 생각하면 무척 아쉬운 보직입니다.
“서 상궁.”
“예, 황녀마마.”
“내 눈에 가장 적합해 보이는 인물인데, 그녀가 간자로서 적합한 지는 벌써 십수 년이 지났고 그동안 아무도 그녀를 간자로 삼지 않았다면…. 그건 황궁이 돌아가는 이치와 맞지 않네. 모든 건 이치대로 흐르는 법. 그녀는 너무나 간자에 어울리는 사람이니 이미 누군가의 손에 들어갔을 거야. 손을 탄 이를 간자로 삼을 수는 없는 거 아니겠나?”
태자 전하의 간자라고 말할 수 없으니 제가 할 수 있는 말의 한계는 이 정도였습니다. 제 말에 서 상궁이 눈을 크게 뜹니다. 그녀는 잠시 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혹시, 하고 중얼거렸습니다. 그러더니 “아, 아닙니다.”라고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녀답지 않게 싱거운 행동이었어요. 그냥 넘어갈까 하다 지레 찔려 물었습니다.
“왜?”
“아니옵니다. 소인이 잠시 헛것이 보였습니다.”
“헛것이 무엇인데?”
“…죽은 여동생이, 잠시 생각났나이다.”
서 상궁에게는 죽은 여동생이 없습니다. 그녀가 누구를 말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녀에게는 원수 같은 오라비뿐입니다. 여관인 여동생을 빌미로 어떻게 하면 조금 더 돈을 뜯을 수 있을까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녀의 가족 전부라, 그녀와 저는 서로에게 동질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서 상궁은 누구를 생각하고선 죽은 여동생이라고 거짓말을 한 걸까요?
탄신연의 날이 밝아 왔습니다. 이날 아침 제 상태는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저는 새벽부터 일어나 자수를 놨거든요. 탄신연을 준비하느라 정작 부황의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작은 자수라도 놓아야 했어요.
새벽, 무엇을 자수로 놓을까 하다가… 그분이 주셨던 꽃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분은 이미 잊으셨겠지만 저는 그 꽃들이 참 좋았어요. 그래서 저 혼자만의 기분으로 그 꽃들을 가만가만 새겨 넣었습니다. 이 자수 때문에 무슨 경을 치게 될지 알았더라면 제가 이런 짓을 했을까요?
알 수 없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