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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중연 (5)화 (5/100)

5.

많은 사람이 황상께서는 사내아이를 보실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의 저주 때문이죠. 폐비 심씨의 한 맺힌 저주 말입니다. 억울하지만 어쨌든 다들 그렇게 생각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 여하간 저의 저주로 인하여 그분이 사내아이를 생산하실 수 없다면 앞으로 이 강산의 주인은 누가 되는 것일까요?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만 황상께옵서는 어느 쪽의 손도 들어 주지 않으시고 계시다 합니다. 황상의 형제를 동궁의 주인으로 두는 방법도 있겠지만 저는 그분이 그리하지 않으실 걸 압니다. 저만 아는 게 아니라 모두 압니다. 그분은 태자 시절, 이복형제들에게 상당한 견제를 받으셨습니다.

황상, 그러니까 꿈에서는 선황이 되시는 제 시아버지께서 그분을 경계하셨기 때문입니다. 제 시아버지께서는 그분의 이복형제를 가까이하시며 자신의 적자를 조금 멀리하셨었습니다. 그분의 입지는 늘 조금씩 흔들렸고요. 그런 그분이 동궁의 주인으로 이복형제를 앉힐 리 없습니다. 동복형제라면 또 모르겠는데, 그분께는 동복형제가 안 계십니다.

귀한 핏줄의 자손을 양자로 들이는 방법도 있겠습니다만 혈족이란 그 무엇보다 위에 있는 것. 차후에 어떤 후환거리가 될지 모르니 이런 방법은 거의 쓰이질 않습니다. 아무래도 피는 섞이지 않는 게 좋지요. 그러니 가장 가능성이 있는 것은 ‘손자’입니다.

즉, 유음 황녀의 아이가 동궁의 주인이 되는 것이죠. 이런 이유로 유음 황녀는 권력 구도의 중요한 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황궁에서 자란 아이인 이 황녀 아기씨는 자신이 얼마나 귀한 몸이신지 너무나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셨고 궁인들은 쩔쩔맸습니다. 그리하여 유음 황녀는 열두 살이 되도록 예법 하나 지키지 못하고 자수 하나 놓지 못하는, 채찍질하라는 명령을 밥 먹듯이 내리는 망나니 황녀가 된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태자 전하, 그러니까 꿈속의 황상께옵서는 이런 아이를 가만두고 보실 분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분은 매우 엄격하신 분인데 왜 황녀마마한테는 이토록 무르실까요? 물론 결국 진노하셔서 냉궁에 보내셨지만 말입니다.

…하긴 또 생각해 보면, 정신 차리라고 냉궁에 보냈더니 금줄을 뜯고 원혼이 있다는 곳에 들어가 냉큼 죽어 버린 황녀 아기씨 아닙니까. 성정이 어지간히 난폭했던 건 분명합니다.

***

냉궁에 들어온 지 일주일.

저는 매우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가면 갈수록 자는 시간은 길어지고 깨어 있는 시간은 짧아졌습니다. 꿈에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는 생각은 들었어요. 하지만 한편으로 깨어 있어 봐야 할 일도 없고 차라리 꿈속에 더 많은 사람과 다양한 일이 있으니 보다 생산적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아니요, 사실 저는 궁금했어요. 이 꿈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그리고 제 꿈속의 황상은 왜 그리되셨는지. 제가 아는 분과 그분이 같은 분이 맞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일주일간 꿈을 꾸면서 황상을 뵈었던 적은 단 한 번뿐입니다.

바로 제가 유음 황녀의 몸에서 눈을 뜬 날, 그러니까 유음 황녀가 죽음에서 돌아온 날이죠. 죽었던 자식이 살아 돌아왔는데 그분은 매우 냉혹하셨습니다. 저를 내팽개치는 손길은 몹시 거칠었어요. 물론 그분은 당혹감을 느끼신 것 같았지만 그 당혹감이 유음 황녀에 대한 애정에서 오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물론 그분과 잘 맞는 황녀마마는 아니셨을 것 같지만 그래도 자신의 자식인걸요. 혹시 자식에게 별로 애정이 없는 분이실까요? 저는 삼 년간 그분의 비로 살았으나 자식을 보여 드리지는 못했습니다. 삼 년 중 이 년 육 개월을 같이 지냈는데 무자식이었으니 황궁에서는 조심스럽게 석녀 소리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분은 무척 진노하시어 동궁 내에 이상한 말을 하는 것들을 잡아 오라 이르셨고 몇몇 궁녀들이 소문을 퍼뜨리는 악질적인 종자들로 색출되었습니다. 그들은 매질을 당한 뒤 동궁에서 쫓겨났습니다. 태자 전하의 기세가 워낙 흉흉했던지라 다시는 누구도 저에게 석녀 운운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여색에 무심하신 분이셨습니다. 저에게는 따뜻하셨지만 후궁을 들이는 일에는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워낙 여색에 무디시어 황후마마께옵서는 그분이 저와의 잠자리도 거부하시는 줄 알고 계셨습니다.

저는 저대로 잠자리에 대해 고할 수 없어 예법에 맞게 말을 돌렸고, 말은 이상하게 퍼져 나갔습니다. 결국 태자 전하의 귀에까지 들어갔는데 그분은 크게 한 번 웃으시고는 저에게 “그런 걸로 해 두지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당신은 더 편하시다면서요.

그분이 남색을 하신다는 소문이 돌기도 하였는데 그분은 정작 당신의 소문에 대해서는 무심하셨습니다. “제가 아니면 그만입니다.” 그분은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그런 소문에 일절 귀를 기울이지 않으셨습니다. 괜히 애가 탄 저만 아랫것들을 족치고 입단속을 시켰지요.

사실은 자식을 별로 원하지 않으셨던 걸까요? 그분은 태자 전하, 미래의 황제 폐하. 이 강산의 주인이시고 종묘사직을 이으셔야 할 몸이십니다. 수많은 자식을 생산하시어 황권을 강력하게 만드셔야 할 의무가 있으신 분이지요.

하지만 어떤 사내들은 제 자식을 보는 걸 그다지 반기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마치 본능처럼 제 자식을 싫어한다고요. 그분이 그러셨던 걸까요? 하지만 이 꿈속에서 그분께는 이미 스무 명의 자식이 있으신 걸요? 저는 대답이 정해지지 않은 질문을 받은 아이처럼 아리송해졌습니다.

제가 냉궁에 들어온 지 이 주가 지난 시점.

꿈속에서는 황상의 탄신연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

황후마마께옵서는 이 탄신연 때문에 많이 힘들어하시는 듯해 보였습니다.

꿈을 꾸면서 좀 더 알게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황후마마와 태후마마의 고부 갈등이라든가, 황후마마의 현재 입지라든가 하는 것들입니다. 저는 유음 황녀로서 살고 있으니 황후마마와 한배를 탄 셈이 됩니다.

당연히 그분의 현재 권력의 크기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황후마마의 권력은 후궁의 주인이시라고 하기에는 조금 모자람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일단 후궁에는 세 명의 강한 권력을 지닌 여인이 있습니다.

후궁의 주인, 황후마마가 계시겠고요. 황상의 어머니이신 태후마마가 계십니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채 귀비입니다. 그녀는 유일하게 사내아이를 낳은 적이 있는 후궁입니다. 사산아였지만요. 그래도 사내아이를 낳았던 유일한 후궁이라 그녀의 입지는 매우 특별했습니다. 만약 태자가 나온다면 채 귀비의 소생일 것이라는 이야기가 도니까요.

대부분은 황상께옵서는 사내아이를 자식으로 두지 못할 것이라고 하지만요. 그래도 만에 하나, 라는 게 있으니까요.

게다가 격정적인 기질의 황후마마와는 달리 채 귀비는 온순하고 조용한 여인이라고 합니다. 예법에도 무척 능하여 태후마마께옵서는 황후마마보다 채 귀비를 좀 더 가까이하신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게다가 신궁의 경전에도 조예가 깊어 신심이 두터우신 태후마마를 모시고 사당에도 자주 다닌다 합니다. 그에 비해 황후마마께옵서는 황궁 예법에 능하지 못하신 데다 사당을 질색하시어 아무래도 태후마마와는 마찰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태후마마에 대해서는 제가 좀 압니다. 저의 시어머니셨으니까요. 그분은 고귀하게 태어나 존귀한 자리에 오르신 분으로, 예법에 매우 엄격하십니다. 제가 태자비일 때, 저에게 아주 엄히 대하셨습니다. 제가 조금이라도 경거망동하거나 감정을 드러낼라치면 호되게 꾸짖으셨어요. 그런 분이시니 황후마마와 얼마나 큰 갈등이 있었을지 상상이 됩니다.

그동안은 태후마마께옵서 조금씩 황후마마의 일을 돌보아 주셨던 모양인데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태후마마께옵서는 몸이 좋지 않으시다는 핑계로 채 귀비를 동행하여 별궁 나들이를 가셨습니다. 탄신연 당일에 돌아오시겠다고 하시면서요. 황후마마께옵서 상궁들을 통해 건너 건너 태후마마의 의중을 알아본 결과는 제가 조금 난처해지는 것이었습니다.

대충 줄이면 다음과 같습니다. ‘망나니 같던 황녀도 예법이 완벽해졌는데 언제까지 그 어미인, 게다가 국모라는 사람이 예법을 몰라 헤맬 것인가. 더 이상 봐줄 수 없음이니 스스로 난관을 헤쳐 가든가 아니면 그 미천한 능력을 황족과 종친 모두의 앞에 펼쳐 대대적인 망신을 당해 대오 각성하라!’

아마도 저의 예법에 깊은 감명을 받으셨던 듯합니다. 그리고 제가 예법이 완벽해진 것이 죽다 살아나서라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니 큰 위기를 겪으면 황후마마께옵서도 보다 완벽한 국모가 되시리라는 생각에서 이런 과감한 결단을 내리신 듯해요.

물론 황후마마께는 불행이었습니다. 그분은 탄신연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으셨어요. 그분이 이런저런 계획을 짜 가시면 태후마마께옵서 한숨을 쉬시며 모조리 고치시는 게 그동안 일의 수순이었다고 합니다.

황후마마께서는 그런 태후마마의 행동을 불편해하셨지만 정작 그분이 안 계시니 불안하신 건 어쩔 수 없으셨나 봐요. 탄신연을 준비하시며 몇 번이나 갈아엎길 반복하셨습니다.

예법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들로는 예부의 관리들, 상궁들 그리고 내관들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들 모두가 조금씩 다른 말을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탄신연이란 아주 거대한 연회이며 모두의 사정을 아우르면서 즐겁고 문제없는 연회로 만들어야 합니다.

황족, 종친들의 소문이나 최근 경향에 대해서도 민감하여야 합니다. 서로 사이가 안 좋은 분들을 곁에 앉힐 수는 없으니까요. 술을 못 드시는 분께 술상을 내갈 수는 없습니다. 건강상의 이유로 술을 못 드시는 분은 미리 확인하여 술병에 차를 넣어 대접하는 것이 예의입니다.

만약 정실이 아닌 첩실을 데려오시는 분이 계시다면 그분의 자리에 측실과 같이 앉는 것을 질색하시는 분이 계시지는 않는지 확인하여야 합니다. 못 드시는 음식들은 적절히 그분들의 상에서만 빼야 합니다. 황상께옵서 부를 가능성이 있는 분들은 나오시기 편한 자리에 모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연회는 끝이 없는 ‘그리고’가 있습니다만 가장 중요한 것은 모두의 사정을 아우르는 것입니다. 황족, 종친의 사정은 물론이거니와 내명부와 외명부의 모든 관리들이 잘 소통되고 협조되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황후마마는 이런 쪽으로는 별로 재능이 있어 보이지 않으십니다. 어느 아침, 유음 황녀로서 제가 문안을 드리러 갔을 때 뵌 것은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고 눈은 풀린 채로 혼이 빠져 있는 황후마마셨습니다.

“어마마마!”

제가 다급히 부르며 그분께 다가가자 그분이 몸을 일으키셨습니다. 밤새 고뇌하셨는지 눈 밑이 새까맣게 죽어 있었어요.

“유음아. 내 황녀. 어미는 탄신연이 오기 전에 목을 매달고 죽어 버려야겠다…!”

그리고 이성도 죽은 것 같았습니다. 제가 당황해서 입을 멍하니 벌린 사이 그분이 비단 끈을 가져오라며 소란을 피우기 시작하셨습니다. 무척 소란스러운 아침이 황후의 궁, 곤희전에서 밝아 오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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