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황상이 태자이던 시절, 그러니까 저의 지아비셨던 이연 태자는 태자비 심씨, 한마디로 저를 몹시 귀히 여기셨다고 합니다.(틀린 말은 아닙니다.) 너무나 어여삐 여기셔서 심 씨는 발이 땅에 닿을 틈이 없었다고 합니다.(저는 언제나 제 발로 걸어 다녔습니다.)
황상은 심 씨에게 모든 연정을 다 주었고 그녀만을 총애하여 당시 후궁도 한 명 들이지 않았는데 그분이 남벌을 가신 사이 저는 역적의 딸이 되어 죽어 버렸습니다. 그건 그분의 가슴에 깊은 한을 남겼습니다.(뭐라고요?)
그분은 언제나 저를 그리워하셨고…. 아, 더는 제 입으로 말할 수 없지만 여하간 결론은 그것입니다. 그분은 저를 어마어마하게 사랑하셨고 더 이상 아무도 사랑하지 않으셨으며(자식은 비록 스무 명을 넘게 낳으셨지만!) 그래서 제 기일마다 제가 죽은 자리에서 주무신다는 겁니다. 자다가 죽은 저를 추모하시면서요.
이 황당한 소리를 도대체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할지…. 너무 어이가 없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지경입니다.
일단 첫 번째, 다시 말하지만 저는 제 발로 잘 걸어 다녔고 태자 전하는 저를 안아 옮겨 주신 적이 없습니다. 황족들은 그런 남우세스러운 일을 하지 않습니다. 고상하게 행동하는 것이 법도입니다. 태자 전하의 곁에서 걸어 본 적도 없어요. 언제나 그분의 한 발 뒤에서 걷는 게 원칙입니다. 그런데 안겨서 다녔다고요? 제가 무슨 희롱당하는 유녀도 아니고요!
두 번째, 그분이 저를 아끼신 건 사실이고 저 또한 그분을 존경했습니다만 저희는 평범한 황족 부부입니다. 즉, 연정을 기반으로 한 사이가 아니라 정략적인 관계예요. 저는 다섯 꽃잎의 아이였고, 태어나자마자 태자비로 낙점되었습니다. 그분은 당시 다섯 살이셨고요. 다섯 살에 ‘오늘 태어난 심씨의 아이가 다섯 꽃잎을 가졌으니 너의 비가 될 거다.’라는 말씀을 들으셨어요.
그런 사이에 무슨 연정이 있겠습니까. 그저 부부, 그저 한평생을 같이하도록 어릴 때부터 약속되어진 관계. 서로에게 충실하도록 노력할 사이. 그것이 전부였는데요.
세 번째, 그분은 타고난 태자십니다. 그분은 냉궁에 발끝 하나 들이실 분이 아니세요. 그분은 저를 아끼셨지만 그 방식은 몹시 태자다웠습니다. 그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분이 범부처럼 저를 아끼시는 건 아니었습니다.
가끔 꽃을 따다 주시는 게 그나마 가장 범부에 가까운 행동이셨달까. 그건 사실 풍류라면 풍류라고 할 수 있는 행동이니까요. 법도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냉궁에 들어간다든가 역적의 딸을 추모하는 행위는 법도에 심각히 위반됩니다. 그럴 분은 절대 아니세요.
아니, 어쩌다 그분이 이런 분이 되신 건지 모르겠습니다. 이게 꿈이라서 그런가요? 저는 꿈속에서 그분이 저를 이렇게 그리워해 주길 바라는 건가요? 그건 너무… 염치없는 짓입니다.
그분은 저 때문에 입지가 좁아지셨을 거예요. 저는 송구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는데 지금 제가 그분이 이토록 고통받길 원한다고요? 이게 제 본심이라면 저는 정말 몰염치한 인간입니다.
속상하네요, 정말.
***
저의 속은 상했지만 세월은 흘러갔고 저의 꿈은 계속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꿈은 제가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자지 않으려고도 해 봤고, 잠자리도 바꿔 봤고, 심지어는 자는 시간대를 오전이나 오후로도 바꿔 봤지만 언제나 꿈은 똑같았습니다.
아니, 상황은 나빠졌어요. 제가 밤에 잠들면 꿈속에서는 아침에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다른 시간대에 자면 밤에 일어났습니다. 그러니까 해가 떠 있는 내내 저는 혼수상태로 잠들어 있었던 셈이죠. 당연히 황후마마께옵서는 또 우 태의에게 진노하셨고 가여운 태의의 구족은 몇 번이나 멸문의 코앞까지 갔었습니다.
저는 결국 이 꿈에 순응하기로 했습니다. 유음 황녀로 일단 살아 보기로 한 것입니다. 사기를 친다고는 해도 꿈속의 사람들에게 사기를 치는 것이고, 이 꿈은 저의 꿈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저 자신에게 사기를 치는 셈이죠. 그것은 문제 될 게 없노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저에게 다른 방법 따윈 없었습니다. 저는 유음 황녀가 아니에요, 저는 폐비 심씨입니다. 그렇게 말해 볼까요? 이 꿈은 매우 현실감이 넘칩니다. 제가 보기에 저는 미쳤다는 진단을 받고 냉궁에 갇힐 겁니다. 그럼 저는 현실에서도 꿈속에서도 냉궁에 갇혀서 살게 되는 것인데 그러고 싶진 않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연속성이 있는 꿈은 이유가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둘째 고모님은 종종 말씀하셨거든요. 꿈은 자신의 욕망 혹은 미래의 징조를 보여 준다고요. 이것이 저의 욕망인지 미래의 징조인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저의 욕망이라면 저의 저열한 인간성에 진저리를 치게 될 것이지만 만약 이것이 미래의 징조라면…. 천지신명이시어, 태자 전하, 아니지 꿈속의 황상께옵서는 도대체 무슨 일을 겪으시기에 용안 반쪽을 잃으신단 말입니까.
그분은 저를 언제나 구해 주셨습니다. 단 한 번도 저의 탓을 하신 적이 없어요. 냉궁에 갇힌 제가 그분께 무엇을 할 수 있겠냐만은 그래도 모르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그분께 뭔가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혹시 모르는 일이지 않습니까? 돕고 싶었습니다.
저는 곧 죽을 겁니다. 아마 다가오는 봄을 맞긴 어려울 거예요. 저는 냉궁에 있고 제게 장작이라는 사치품은 주어지지 않을 겁니다. 저는 아마 얼어 죽을 겁니다. 다른 후궁들이 냉궁에서 그렇게 죽어 갔듯이. 죽기 전에 조금이라도 보람된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가치 있는 일을 말입니다.
은혜를 갚는 것, 그것만큼 가치 있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유음 황녀로 살아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저에게는요.
***
“화, 황녀마마, 어, 어떻게 이, 이럴 수가….”
상궁이 저의 자수를 들어 왼쪽 햇살에 비춰 보고 오른쪽 햇살에 비춰 보았습니다. 두 눈을 의심하는 작태에 저는 머릿속으로 열두 살쯤 저의 자수 실력이 어땠는지 가물가물한 기억을 되살려 보았습니다.
그때에도 이미 저는 자수를 꽤 잘 놓았었던 것 같지만 그래도 스물한 살의 제 실력과는 조금 차이가 있지요. 그런 것을 감안하여 자수를 놓았는데 너무 어설프게 놓은 걸까요?
“이렇게 완벽한 자수라니! 마마, 소인은 감동이…!”
다른 상궁이 말을 하다 말고 왈칵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왜, 왜 감동하죠?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황녀라면 자수는 기본일 텐데요.
저는 곧 그들이 왜 감동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잘하실 거면 왜 그동안 이리하셨냐며 그들이 유음 황녀의 작품들을 내놓았거든요. 아, 그건 정말 놀라운 것들이었습니다. 저는 살다 살다 그런 괴발개발한 자수는 처음 보았습니다.
설마 발가락으로 바늘을 쥐셨나?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실력이었습니다. 제가 놓은 첫 자수도 이것보다는 나았는데 저는 그때 고작 세 살이었습니다!
얼굴이 일그러졌습니다. 아니, 이 황녀 아기씨는 도대체 뭘 하는 사람입니까. 열두 살이시면 최소 10년은 자수를 놓으셨을 텐데 어찌 이런 귀신 단지 같은 자수를 놓으실 수가 있단 말입니까. 눈이 없어도 이거보다는 잘 놓겠습니다! 패악을 떤다는 소리는 익히 들었으나 손가락이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아무래도 손가락에 병이 있으신가 봅니다.
아무래도 제가 그 황녀 아기씨의 몸에 들어앉아 있다 보니 부끄러움은 제 몫이 되었습니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으니 상궁 둘이 슬그머니 그분의 진정한 작품들을 바구니에 넣고는 눈치껏 묻습니다.
“버, 버리오리까?”
쓰레기니 버리라는 소리가 목 끝까지 나왔으나 참았습니다. 그건 제 물건이 아니니까요.
“두어라. 그, 그것도.”
이 말을 하는 데는 용기 그 이상이 필요했습니다.
“내 것이니.”
저 쓰레기가 제 작품이라니요. 그렇게 말해야 하다니요. 정말 심장이 쪼그라드는 기분입니다. 일이 이쯤에서 마무리되었다면 참 좋았으련만, 일은 더 커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날 저녁, 태후마마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태후전에 갔더니 제가 황후마마로 뫼시던 분이 앉아 계시더라고요. 저의 시어머니셨던 분, 현실에서는 황후셨던 분이 꿈에서는 태후마마가 되셨습니다. 나이가 드셔서 그 미색은 조금 자취를 감추었으나 우아함은 더욱 깊어지신 태후마마를 뵙고 인사를 올렸습니다. 그러자 쨍그랑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고아하신 태후마마께옵서 너무 놀라신 나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시다가 찻잔을 엎으신 겁니다. 궁녀들이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서둘러 찻잔과 차를 치웠습니다만 그 와중에도 그분은 궁녀들이나 찻잔이나 엎어진 차가 아니라 저를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죽은 사람이 돌아오기라도 한 것처럼요. 그럴 리가 없는데 마치 정체를 들킨 듯하여 찔끔한 순간.
그분이 손을 턱 내미셨고.
상궁이 그 손에 손수건을 조심스레 올렸습니다.
태후마마께옵서 손수건으로 눈가를 콕콕 찍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저 완벽한 예법을 보았느냐, 운 상궁?”
으응?
제가 고개를 들자 운 상궁이 홀린 것 같은 눈으로 저를 내려다보며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있었습니다. 비명을 참는 것 같아서 얼굴을 찌푸릴 뻔했습니다. 하지만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라 가만히 미소 짓자 어머, 하고 상궁이 신음을 흘렸습니다.
“태후마마, 경하드리옵니다.”
경하를 왜 드리지?
이해할 수가 없는데 태후마마께옵서 제게 다가오시더니 손수 저를 일으키시며 말씀하셨습니다.
“황녀야, 황녀야. 내 그동안 너 때문에 마음고생이 많았는데 네가 이토록 철이 드니 할미는 여한이 없다.”
응?
이해하는 척 웃었지만 이해가 하나도 안 됐습니다.
“세상에. 이 완벽한 예법이라니. 그래, 네가 하려면 할 수 있는 아이라는 걸 할미는 의심한 적이 없느니.”
“어마마마.”
저를 동행하여 오신 황후마마께서 만개한 꽃처럼 활짝 웃으셨습니다. 그러자 태후마마께옵서 다른 손을 그분께 내밀었습니다.
“잘 가르쳤도다. 이리 완벽한 예법은 오랜만에 보는구나. 예전… 아니다. 어쨌든 완벽해. 아, 정말 완벽하구나.”
잠깐 황후마마의 눈가가 샐쭉해지는 것 같았지만 곧 풀어졌습니다. 뭔가가 황후마마와 태후마마 사이를 지나갔는데 잡아내지 못했습니다. 고부 갈등일까요? 어쨌거나 황후마마는 다시 환하게 웃으며 “황공하옵니다.” 하고 예쁘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날 태후마마, 황후마마와 식사를 하며 몇 가지를 새로이 알게 되었습니다. 일단 유음 황녀는, 나쁘게 표현하자면 망나니입니다. 열두 살짜리 황녀가 배우라는 건 하나도 안 배우고, 예법도 엉망이고, 그저 말 타는 것과 활 쏘는 것만 좋아한다고 합니다.
당연히 교육 상궁들과 마찰이 컸는데, 이 황녀를 애지중지하는 황후마마께옵서는 황녀에게는 정작 별 훈계도 못 하시면서 상궁들만 들들 볶으신 모양입니다. 그리고 유음 황녀는 모후께서 아무 말씀도 못 하신다는 걸 아는지라 상궁들의 말을 코끝으로 듣지 않았고, 그렇게 그녀는 열두 살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문제가 컸던 것은 유음 황녀의 현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아니, 당금 황궁의 상황이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유음 황녀는 원래대로라면 황녀이기 때문에 권력 구도에 큰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만 제 꿈속에서의 상황은 몹시 다릅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꿈속의 황상께옵서는 스무 명이 넘는 자식을 두셨으나 아들은 한 명도 생산하지 못하셨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