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9화 (169/177)

◈ 174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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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nterhalt (4)

순간, 룸 안이 고요해졌다.

엉거주춤 일어나있던 장 실장은, 문 앞에 멈춰 서있는 아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내의 시선 또한 그런 장 실장을 경계하는 눈빛으로 가만히 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내의 옷차림과.....메이크업....

살아있는 내 기억으론 이렇게 화려한 모습의 아내를 지금까지 나는 본적이 없었다.

얼핏 보면, 소위 잘나가는 고급술집에서 일하는, 예쁜 인형같이 생긴 술집 여자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조금 전까지 아내 뒤에 함께 서 있던 신 혜원과는 분명히 또 다른 느낌이었다.

내가 죽음을 문턱을 넘나들며 병원에 시체처럼 누워있는 사이, 아내는 왜 이렇게 화려한 모습으로 변해있었는지 궁금증만이 더욱 깊어갈 뿐이었다.

“이리로....앉아요.”

장 실장이 어색하게 손을 뻗어 맞은편 소파를 잠시 가리키곤,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내의 표정은 긴장한 것 같아 보였지만, 장 실장의 다소 거칠고 험상궂은 얼굴에도 불구하고 겁을 먹거나 두려워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건 아마도, 내가 기억하는 아내의 얼굴과 지금 노트북 화면에 보이는 아내의 얼굴은 너무나 많이 달라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새하얀 재킷 아래, 늘씬하게 드러나 있는 아내의 맨다리가 움직였다.

조용하던 룸 안에서 아내의 하이힐 소리가 빠르지도....느리지도 않게, 그렇게 적당한 템포로 울려 퍼졌다.

그런 하이힐 소리까지도, 지금 아내의 이 화려한 모습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녹아 있어 보였다.

장 실장의 시선이 아내의 얼굴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아내가 신고 있는 은색의 반짝이는 하이힐이 얼마나 높은지 테이블 위로 아내의 뽀얀 허벅지가 반 이상 드러나 있었다.

아내는 들고 있던 검은색 핸드백을 테이블 위에 조심스레 올려놓았다.

아내가 장 실장 맞은편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절개되어있는 재킷의 앞쪽을 통해 아내의 두 손이 살며시 나와, 가지런히 모아져있는 허벅지 맨살 위에 살포시 포개어졌다.

아내의 허벅지가 깊은 곳까지 드러나 있었지만, 여전히 아래엔 뭘 입고 있는지 보이지가 않았다. 얼핏 보면 아무것도 입지 않은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아내가 맞은편에 자리를 잡자,

장 실장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입술이 달싹거렸다.

그때, 문이 열렸다.

신 혜원이 룸으로 들어왔다.

은색 쟁반 위 찻잔 두개가 놓여 있었다.

[뭘 드실지 몰라서....커피 내왔어요. 다른 거 필요하시면 말씀하세요.....]

신 혜원이 다소 격식 있는 목소리로 아내에게 말했다.

아내는 그런 신 혜원을 보며,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숙여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신 혜원이 아내에게 다가가 있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눈빛은 아내의 이곳저것에 머물러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오늘 제가 갑자기 연락해서 놀랐죠?]

신 혜원이 룸을 빠져나가자마자 장 실장이 말했다. 장 실장의 목소리가 긴장하고 있는 자신을 숨기려는 듯 조금 과장되게 들렸다.

[내가 오늘 연락한 이유는....]

[저를 어떻게 알아요? 아까 저 이름 불렀잖아요. 어떻게 알아요 저를?]

아내가 장 실장의 말을 가로채며 말했다.

장 실장이 신 혜원이 두고 간 찻잔을 들어 한 모금 길게 마시곤 다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오늘 많이 고민하다가 은비 씨에게 연락했습니다. 저는.......흐흠...

은비 씨가 지금 생각하는 거 보다......은비 씨에 대해 많은걸 알고 있어요.]

가만히 장 실장의 말을 듣고 있던, 아내의 눈썹이 조금 찌푸려졌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최 약사.....최 진욱이....이제 그만 만나요.]

장 실장의 입에서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튀어나오자, 아내가 순간 놀란 것 같아 보였다.

[그...그게 무슨......말이에요?]

[최 약사하고 만나지도 말고......최 약사가 주는 약도.......하지 말고....그리고.....그 새끼하고......]

갑자기 말문이 막힌 장 실장의 얼굴이 더욱 붉게 변해갔다.

[최 진욱이하고.....그런 이상한 관계를 가지지 말란 말입니다.]

심각한 얼굴로 장 실장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아내의 새빨간 입술이 오물거리더니, 어느새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장 실장이 소파 구석에 있던 노트북 가방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아내가 앉아 있는 테이블 앞에 내밀었다.

잠시 그것을 들여다보던 아내가 불투명한 비닐 속에 싸여있는 그것을 것을 꺼냈다.

아내가 꺼낸 건 사진들이었다.

[하아.......]

아내로부터 옅은 숨소리가 들릴 듯 말듯 작게 새어나왔다.

아내가 사진을 하나씩 넘기며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최 진욱이 뿐만 아니라........지금 은비 씨는 정상이 아닙니다.

그쪽 남편이 사고 난 이후부터 계속 은비 씨를 미행했습니다.]

장 실장이 건내 준 몇 장인지 모를 사진들을 천천히 훑어보던 아내가 그것을 가지런히 모아 테이블 위에 다시 덮어 놓았다.

그리고 곧장 아내의 시선이 장 실장을 향했다.

[누가 시킨 거예요. 그리고 당신 누구예요?]

짙은 감정이 실린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남편은 의식 없이 누워있는데........지금 은비 씨가 하고 다니는 꼴을 봐요.]

[저....저희 오빠를 알아요?]

갑자기 아내의 목소리가 한없이 작게 느껴졌다.

장 실장이 테이블에 있는 찻잔을 집어 들었다.

순간,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 장 실장의 눈빛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건.....아닙니다. 그쪽 남편하곤 상관없어요. 알지도 못하고.....]

[그럼 왜..... 날 미행하고.....이런 걸 가지고 있는 거죠?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의뢰를 받았어요. 물론 돈도 받았고.......이젠 뭐....다 끝났지만....]

[누가요? 누가 의뢰를 한 거죠?]

[그건 밝힐 순 없고, 단지 나는......더 이상 은비 씨가......망가지는 게.......보기 싫을 따름입니다.]

장 실장의 얼굴에 머물러 있는 아내의 표정이 변해........더 이상 어떠한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아무런 움직임도, 아무런 말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풋!!!]

내 귀를 의심했다.

한참을 고요히 멈춰있던 화면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아내의 웃음소리였다.

아내가 웃고 있었다.

아내의 새빨간 입술이 위쪽으로 올라가 반짝이는 하얀 치아가 살며시 드러나 있었다.

매혹적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아내의 미소는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차가웠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갑작스런 상황에 장 실장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아내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장 실장의 얼굴이 점점 더 굳어져 갔다.

[훗....거짓말.....]

이번에 아내의 웃음소리와 목소리가 함께 들렸다.

[당신도 다른 남자들하고 다 똑같아....]

[그게.....무.....무슨 말입니까?]

[세상에 모든 남자들은 다 똑같아..............한 사람만 빼고......]

의기양양해 독기까지 느껴지던 아내의 목소리가 갑자기 변했다.

아내의 행동에 장 실장은 분명 놀란 것 같았다.

장 실장은 그냥 멍하게 아내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예전엔......웃어주기만 해도 모든 게 해결되었는데.......지금은 그렇지 않아.

이젠 웃어주는 것만으론.......웃어주면 더 많은걸 원하지........

당신도 똑같아. 그런 부류의 인간들하고.....

이딴 걸로 협박해서......날 어떻게 하려고?

이 늦은 시간에......이런 술집 룸에......여잘 불러내서.....

뭘 어떻게 하려고요?]

아내의 말과 그 표정에 갑자기 소름이 바짝 돋아났다.

아내가 얼굴을 빳빳이 들고서 장 실장을 쳐다보며 활짝 웃고 있었다.

마치 비웃는 듯이...

그 차가운 웃음엔 서슬 퍼런 독기까지 서려있었다.

장 실장의 얼굴에 당황함이 역력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표정을 숨길 수 없어 보이기까지 했다.

[지금....그게 무슨......말.....입니까?]

[왜요? 모두 들켜버리니까 이제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요?]

[아니...지금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아무리 그래도....남편이 아직......]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돼요? 어떡해야지 옳은 거예요?]

아내가 장 실장의 말을 다시 자르고는 다시 쏘아붙였다.

[조금 전, 나에 대해서 많이 안다고 했죠? 그게 무슨 뜻이죠? 나를 얼마나 알아요. 당신이?]

되돌아온 아내의 물음에 장 실장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우리 오빤 사고가 났어요. 그런데.......아무도 수술을 못한데요.....

그냥 오빠가 스스로 죽을 때까지, 그냥 내버려둘 수밖에 없데요. 아니면 산소마스크를 떼어버려 죽여버리든지....

그래서......

그래서 부탁을 했어요. 수술만 해달라고.......결과가 어떻게 되든지 상관없으니까, 제발 수술만 해달라고 담당교수에게 매달렸어요.

그 교수에게 하루에도 몇 번을 찾아가서 사정했어요.

그런데도 끝끝내 절대 안 된다고 하더군요....

훗......]

아내의 눈가가 흐릿해져 더욱 짙어져 갔다. 그리고 아내의 얼굴엔 모든 걸 포기한듯한 허탈한 미소로 가득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그것뿐이었어요.

그땐 그랬나 봐요. 수술을 하면 오빠가 살아날 거라고....

그렇게 오랫동안 부탁을 하고 사정을 했는데도......수술만은 절대 안 된다던 그 교수가......

어느 날 밤에 연락이 왔어요. 할 말이 있다고.....

그때 나는 알았어요.

그 교수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를.....

그래서.......예쁘게 단장하고 나갔어요.

이런 술집에서 그 교수를 만났어요. 와보니 그 사람 혼자 술을 마시고 있더군요.

끈질긴 내 부탁 때문에 수술을 할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 교수가 원한 건,

매번 반복되는 검사에서 좋은 결과를 바란 것도 아니고, 병원 내부의 승인도 아니었고.......바로 나였다는 걸.....

그날....

그 교수하고 이런 곳에서 오랫동안 술을 마시면서.......정성을 다해.....소위 말하는 접대를 했죠.

그 교수도 다른 시시한 남자들처럼 저를 안으면서 참 좋아하더군요.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어요. 그 사람이 만족할 때까지.......그 사람 입에서 날 사랑한다는 말이 나올 때 까지.......그렇게.......

그 교수에게 술집 룸에서 수도 없이 날 내어주고........같이 호텔까지 가서도 아침까지 침대서 그렇게 뒹굴고는.......한 숨도 못자고 그 사람 출근길에 병원에 같이 왔어요.

그날.....바로 수술 날짜를 잡아주더군요. 그렇게 쉽게......훗....

오빠 수술을 하고 나서도 교수가 날 찾을 때마다 가끔 관계를 가졌어요. 병원에서 그리고 밖에서......

약속을 지킨 사람이니까.....고마운 사람이니까.......수술을 해준 사람이니까......

아까 당신이 보여준 이 사진 중에 하나는, 지난주 그 교수와 병원 근처 모텔에 들어가는 사진이네요....]

장 실장은 다소 허탈한 표정으로 아내를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리고......사진에 있는 최 진욱.....

그 사람 약 없었으면, 나 벌써 죽었어요. 제정신으론 하루하루 견딜 수가 없으니까.....

병원에 누워있는 오빠 볼 때마다........매일 매일 죽고 싶다는 마음밖에 없었어요.

교수가 연명치료를 그만하자고 했던 그날. 병원 옥상에 올라갔어요.

뛰어내려 버리면 끝인데........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이 계속 아른거리더군요.

매일 밤, 옥상으로 올라갔어요.

그런데 어느 날, 최 진욱 그 사람이 내게 약을 주더군요......

깨어나 보니 그 사람이 내 몸 위에서 날 안고 있더군요. 오빠가 잠들어 있는 병실......소파위에서....

약 때문인지 몇 번이나.....느꼈어요.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순간이지만 모든 걸 잊을 수 있는.....

오빠가 죽을 때까지 견딜 수 있는....

그 사람에게 약을 받고.....나는 그 사람에게 나를 주고....

그래서 생각을 달리했어요.

우리 오빠가 죽기 전까진......절대 먼저 죽지않겠다고.....]

아내의 말이 끝나자 룸은 다시 정적이 흘렀다.

장 실장과 아내의 시선이 서로를 향해 가만히 멈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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