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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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nterhalt (2)
“오빠! 언니 조심해서 가요!!!”
미나 집 앞에 도착하자, 미나가 차에서 내려 우리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술자리에서 항상 활발하던 미나는, 승호 집에서 평상시와는 달리 별 말없이 와인만 혼자 홀짝였다. 그래서인지 미나의 뺨이 와인 빛깔처럼 은은하게 변해있었다.
“미나야. 이제 보충수업 끝났으니까, 우리 시간 있을 때 자주 보자. 연락할게....”
“아네....언니......”
아내의 말에 미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집으로 향하는 밤거리가 유난히 고요했다.
차에는 아내의 입속에 스며있던 쌉싸름하게 젖은 와인 내음과, 아내의 그 향기가 뒤섞여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보석 같은 소중한 씨앗 하나를 담고 있던 수연의 조금 부풀어 올라 있는 그곳,
그곳에 머물러있던 아내의 시선이 계속 떠올랐다.
아내가 말없이 창가를 내다보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스쳐지나 갈 때마다, 컴컴한 바다에 홀로 우뚝 서 있는 등대처럼, 아내의 아찔한 콧날 위가 화사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런 아내에게 어떤 말이라도 하려다 이내 그만두었다.
“오빠. 참 좋아 보인다....승호 오빠하고 수연 언니......”
한참을 말없이 달리다 고요한 적막을 뚫고 아내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승호 오빠 그런 표정을 처음 보는 거 같아요. 너무 행복해 보였어.”
나 또한 아내의 생각과 같았다.
내가 아는 승호는 항상 밝았지만, 오늘 그의 얼굴은 무엇인지 모를 편안함과 안정감이 동반된 그런 환희에 찬 표정이었다.
“오빠. 오늘 호주에서 연락받았어요.”
“응? 호주?”
“지난번에 말했잖아.....이번 2학기만 끝나고.....우리 호주 가서 살자고.......”
정확히 언제 아내가 그런 이야기를 내게 했는지 기억이 나진 않았지만, 오래전 언젠가 아내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은 기분이 얼핏 들었다.
“예전에 호주 유학 때 알던 유학원에서 오늘 연락이 왔어요. 올해 말에 자리가 하나 난다고......그래서 내가 원하면 내년 초 학기부터 애들 가르칠 수 있데요.....”
“그래? 잘됐다.”
“나는 가고 싶은데....오빠는....괜찮아요?”
“그럼.....나는 괜찮지. 당신이 하자는 거......나는 모두 괜찮아...”
“치이.....”
“그럼 이제 몇 달 안 남았네? 가려면 연말에는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니야?”
“네. 12월에 들어가서.....집 알아보고.....영주권도 알아보고.....”
“미나에게 내일 당장 말해야겠다. 녀석한테 카페 일 모두 알려주려면.......”
“미나는 잘 할 거예요......빨리 시간이 지나가서 연말이 되면 좋겠다....”
아내가 창가를 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이젠 더 이상 출근길에 아내를 학교에 바래다줄 필요가 없었다.
보충수업이 모두 끝나고, 아내는 2학기가 시작할 때까지 몇 주간의 긴 휴식을 얻게 되었다.
세희가 우리와 함께 지낸 지 벌써 10여일이 지났다.
하루에 한 번씩은 집에서 세희와 마주쳤다. 내가 카페에 출근할 때나, 아니면 내가 카페를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세희의 얼굴에 살이 붙어 다행히 예전처럼 조금씩 변해갔지만, 세희는 나와 마주칠 때마다, 항상 내 시선을 피했고, 얼굴은 여전히 어두웠다.
어느 날 세희가 이젠 집으로 돌아가겠노라, 그리고 다시 카페에 나와 일을 하겠다고 했지만, 아내가 만류했다.
아내가 보기엔 아직 세희의 컨디션이 정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내는 그런 세희를 데리고 병원에 몇 차례 다녀왔다.
나는 세희가 어서 빨리 우리 집을 떠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에 한 번씩 세희를 집에서 마주칠 때 마다, 기억하기 싫은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겐 달라진 게 하나 있었다.
매일......매 순간이 초조하게 느껴졌다. 멀쩡하던 가슴이 갑자기 미친 듯 두방망이질 치기도 하고, 또다시 머리 수술부위에서 가끔 통증이 느껴졌다.
악몽 때문인지 아니면 머리 통증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잠을 자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새벽에 갑자기 깨어날 때마다, 아내는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하루.....그리고 또 다른 하루가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아....괜찮데두.....”
“오빠!”
아내와 나는 병원 주차장에서 작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아내가 조금 화난 눈으로 나를 쏘아보기 시작했다.
“아직 정기 검사할 때도 안됐는데...”
“오빠. 제발.....”
나를 보는 아내의 그 눈빛에 이미 모두 기억에서 지워진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엄마가 지금 아내의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치우야! 주사 아프지 않아. 금방 끝나.......]
[싫어. 병원 가기 싫단 말이야!]
[오늘 주사 안 맞으면, 다음엔 더 아파......어서 주사 맞고 엄마하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치우가 좋아하는 돈가스 먹으러 가자.....]
아내의 하얀 손이 내 손을 꼭 감싸 안았다.
아내의 손이 무척 따스했다. 마치 예전 그날의 엄마의 손길처럼........
나도 모르는 사이, 나는 아내의 손에 이끌려 이미 병원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아이고!!! 안녕하세요. 아직 정기검사 2주 남았는데.....빨리 오셨네요....”
새하얀 가운을 입은 중년의 남자가 우리를 반겼다.
오른쪽 가슴에 정자로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교수 강 동호]
“교수님.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아내가 웃으며 그에게 인사를 했다.
그는 내 머리 수술을 집도한 교수였다.
“치우 씨. 얼굴 많이 좋아졌네요. 보기 좋습니다.”
“네. 교수님. 안녕하세요.”
“안 그래도 어제 은비 씨 한테 전화받고 나서 걱정 많이 했는데......갑자기 당장 검사를 해보자고 하셔서....”
“교수님. 갑자기 전화 드려서 죄송해요. 다른 분들 진료 벌써 예약 다 차있었을 건데.....시간 빼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고. 별말씀을.....치우 씨는 언제라도 괜찮습니다. 이쪽으로......앉으세요...”
강 교수가 우리를 소파로 안내했다.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잔에서 향긋한 차 내음이 조금씩 퍼져 나가고 있는 게 느껴졌다.
“어제 안 그래도 은비 씨한테 대충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최근에 불편한 곳이 있습니까? 머리 통증이나 뭐 그런 거.....”
시종일관 얼굴에 편안한 미소를 띠고 있는 강 교수가 물었다.
“아니요. 교수님. 별다른 건 없습니다.......”
“새벽에 자주 깨요. 식은땀도 많이 흘리고.....그리고 가슴도....가끔 빠르게 뛰어요.....옆에서 내가 느낄 정도로......”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 아내가 숨겨진 비밀을 누설하듯 강 교수에게 급하게 말했다.
아내의 말이 내겐 조금 충격이었다.
심장이 그렇게 요동칠 때, 옆에 있던 아내가 그것을 느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아내의 시선이 다시 내게 향했다.
아내의 굳어진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치우 씨. 머리에 통증은 어떻습니까?
“가끔.....조금.....큰 통증은 아니고....조금 짓눌리는 듯한 그런 정도입니다.....”
의사가 진료 차트에 무엇인가를 빠르게 적어나갔다.
“이렇게 합시다. 이왕 오신 김에....정기검사 오늘 하시고, 부가적으로 심장 쪽이나...다른 곳도 함께 검사하는 걸로.....그렇게 합시다.”
커다랗고 하얀 기계들이 가득한 이 방.
기억이 난다.
나는 저 큰 기계의 구멍 사이로 들어가는 걸 무척 싫어했다. 마치 무덤 속으로 나 스스로 기어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편안하게 누워 있는 내 몸이, 기계의 레일이 움직이자 저 어두운 무덤 속으로 조금씩 빨려 들어갔다.
창가에 아내의 상반신이 보였다.
아내의 모습이 너무나 매혹적이었다.
아내의 머리칼은 어느새 자라 어깨 조금 아래까지 닿아 있었다.
건너편 유리창 속에서 나를 보고 있는 아내의 상반신이, 그림이나 사진 속에 있는 작품처럼 느껴졌다.
블라우스 속에 감싸여 있는 아내의 뽀얀 목덜미를 미친 듯이 빨아, 새빨간 내 입술의 흔적을 깊게 새겨 넣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내가 나를 보고 있었다.
아내의 빨간 입술이 조금 움직였다.
[사...랑....해.......]
아내 바로 옆에 서 있던 강 교수가 웃으며 아내에게 뭐라고 말하는 게 보였다.
그러자 아내가 강 교수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뭐라고 말하고 있었다.
기계 속에 가려져 더 이상 아내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윙윙거리는 위협적인 소음 속에 눈을 꼭 감았다.
눈을 꼭 감고 있었지만, 얇은 눈꺼풀을 뚫고 번개처럼 번쩍이는 새하얀 섬광이 느껴졌다.
그리고....
누군가 내 귓가에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너 그 교수하고도 병원서 했지?
들리는 소문에, 그 교수 병원에서 유명하던데...
간호사들하고 환자 보호자들 건드리는 걸로....
아마 내 생각에는 말이야.
그때, 그 교수가 치우 연명치료 그만하자고 했을 때.
니가 교수한테 몸 대주고 막은 거 같은데....
맞지?
교수 방에서 했어? 아니면.....지난번 나처럼
치우 누워 있는 병실에서 했어?
그 새끼한테 대주니까 치우한테 좀 더 잘해줘?]
[교수님, 제발 부탁드려요....]
[아니....보호자분 말씀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런데........물리적으로 안 되는 건 안 됩니다.
가망이 없어요. 괜히 손댔다가........환자분만 더 힘들어집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마음의 준비를 하시고.....조금 더 편하게 남편분 보내주세요.....
이게 의사로써 제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말입니다.]
[교수님. 안돼요.....오빠 저렇게 둘 순 없어요. 저렇게 아무것도 안하고....그럴 순 없어요.....제발 부탁드려요. 수술해주세요...
어떻게 되던.....모든 책임은 제가 질게요. 그러니까.....수술해주세요.......흐흐흑....]
[하아........아시다시피. 지금까지 제가 저런 상태의 환자분 여럿 봐왔어요. 지금까지 수술을 해도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습니다.
근데.....무리하게 수술을 진행하면 저희 병원 입장도 복잡해져요. 저의 입장도 제발 생각해주세요.
그리고 무엇이 정말 환자분을 위하는 건지 다시 생각해보세요....]
[교수님. 교수님 하라는 대로 모두 할게요. 그러니까 제발 수술 해주세요.....수술 여부는 교수님이 정할 수 있는 거잖아요.....이렇게 부탁드려요.....]
[제가 담당 교수지만, 이번 케이스는 제가 일방적으로 정할 사안가 아닙니다. 병원 협의회에서........]
[그럼요? 그럼 누가 정하는 거예요? 내가 누굴 만나서 부탁해야 되는 건가요? 병원장님 만나 뵈면 되요? 병원장님 지금 병원에 계세요?]
[잠깐만....진정 좀 해봐요...이러다가....보호자분도.......이리로 좀 앉아 봐요....]
[제발....교수님.....제가 이렇게 애원해요.........교수님......]
[은비 씨라고 했죠?]
[네. 교수님.]
[은비 씨. 몇 살이에요?]
[스물여섯이에요.]
[결혼한지는 얼마나 됐어요?]
[올해 했어요. 몇 달 안됐어요....]
[휴우.......]
[교수님. 꼭 수술해주세요.....그렇게만....해주신다면.....]
[아.....은비 씨.....]
[수술만 해주신다면......교수님 원하시는.....다 해드릴게요.......어떤 거라도 다......]
[자......이거.....은비 씨. 얼굴이 다 젖었네.....눈물 좀 닦아요.....]
[근데......은비 씨......참 예쁘다......마음도 예쁘고.....그리고......이런 이야긴 좀 하긴 뭐하지만........참 묘한 구석이 있네요....]
[그래요? 제가요?]
[은비 씨.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지만.....병원에 동료의사들 은비 씨 이야기 얼마나 하는 줄 알아요?]
[무슨 이야길요?]
[뭐.....그런거죠. 의사도 사람이다 보니까. 예쁜 여자 보면 예쁘다....뭐 그런 거......아니겠어요?
근데....은비 씨. 아까 내가 원하는 대로.....다 해준다고 했죠?.......어떤 거라도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