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화 ◈
-- Hinterhalt --
Hinterhalt (1)
[오빠! 오빠! 방금 끝났어요. 백화점에 들렀다가 갈 건데요. 승호 오빠 집에 뭐 사가야 할 까요?]
스마트폰 넘어 아내의 경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글세.....와인은 몇 병 카페에 있는 거 들고 가면 되고.....]
[아기 용품 사갈까요?]
[그래....그래.....]
[오빠. 백화점 들러다 두 시간 정도면 도착할 거 같아요. 있다가 봐요.]
항상 그렇지만 조금 더 듣고 싶었던 아내의 목소리가 끊겼다,
미나의 그 일이 있은 후, 며칠이 지났다.
오늘은 승호가 우리를 집으로 초대한 날이었다. 그리고 아내의 보충수업도 오늘로써 모두 끝났다.
“오빠. 은비 언니?”
“응. 오늘 빨리 정리하고 나가자”
며칠사이 미나의 얼굴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상시처럼 그렇게 변해 있었다.
그날 카페를 떠날 때, 그 사내가 내뱉었던 마지막 말이 며칠 동안....아니 지금까지도 지워지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비상벨 신청하셨죠?”
깔끔한 작업복을 입은 남자가 카페에 들어와 인사를 했다.
“아...네네.....”
사내가 Bar에 있던 내게 다가왔다.
“설치는 이쪽에.....Bar....카운터 있는 쪽에 하면 될 것 같은데......”
“네. 그쪽에다 설치해주시면 됩니다.”
사내가 Bar 바로 앞에 있던 테이블.....지난번 그 사내와 미나가 있던 그 테이블 위에 공구가방 같은 것을 펼쳐 놓았다.
“오빠 이거 뭐에요?”
미나가 화장실에 갔다 온 건지, Bar 안쪽에 앉아 한참 그것을 설치하고 있던 남자를 보며 내게 물었다.
“아...이거....”
“비상벨입니다. 왜 그런 거 있잖아요. 강도나......긴급한 상황에 이 벨을 누르면, 근처에 있는 파출소에 연결돼서 경찰이 출동합니다.
요즘 여자분들 혼자 계시는 곳이 많아서 편의점이나 카페 같은 곳에서 많이 신청을 합니다.”
남자가 작업을 멈추고 미나를 올려다보며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미나의 굳은 얼굴이 다시 나를 향해 있었다.
비상벨 설치 작업을 마치고 기사가 돌아가자 조용한 카페 공간에 미나와 단둘이 있는 것이 다소 불편해 안쪽 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방에 우두커니 서서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책상 위에 있던 노트북을 열었다.
Vision cam을 실행했다.
설정으로 들어가자 수많은 세부 항목들이 보였다.
그 중에 하나를 선택했다.
[DB 저장일 설정]
[1년, 6개월, 3개월, 30일, 10일........]
하나를 클릭하자 창이 떴다.
[최대 저장 일을 30일로 변경합니다.
기존의 자료는 암호화 후 압축파일로 저장되며 원본은 모두 삭제됩니다.
맞으면 확인을 눌러주세요]
모든 작업이 끝나고 창이 닫혔다.
바탕화면에 익숙하지 않은 아이콘이 하나 보였다.
그것을 들여다보며 실행할지 말지를 한참 고민하고 있었다.
[IP카메라]
며칠 전, 모두가 잠들어 있던 새벽.
나는 거실에 IP카메라 하나를 몰래 설치했다.
이것은 갑작스레 함께 살게 된 세희를 위한 것이었다.
아내가 학교에 출근해 있을 때, 집에 홀로 남겨져 있을 세희가, 왠지 모르겠지만 나는 불안했다.
그것은 세희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내와 나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세희가 우리 집으로 들어오고 나서 이상하게도 단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세희의 안부는 아내로부터 간혹 들을 뿐이었다.
아마도 세희는 내가 출근 할 때나, 카페를 마치고 집으로 들어올 때 의도적으로 나를 피해 방으로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한참을 망설이다 그것을 실행했다.
창이 열리자. 우리 집 거실의 모습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설치 후, 처음 확인하는 영상의 화질도 아주 깨끗했다.
화면이 멈춘 것 같았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화면 아래쪽 타이머의 시간이 계속 흐르고 있었다.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몇 분을 지켜봐도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저장된 파일을 실행했다.
아내와 내가 웃으며 현관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오늘 아침의 모습이었다.
현관문이 닫히자 다시 화면이 정지된 듯 움직임이 없었다. 화면의 배속을 조금씩 높였다.
아내와 내가 현관을 빠져나간 지 1시간 정도가 지났을 때 즈음, 항상 처제가 머물던 작은방 문이 천천히 열렸다.
아내가 평상시 집에서 입던, 예쁜 토끼 캐릭터가 프린팅되어 있는 헐렁한 원피스 입은 세희가 열린 방문 틈으로 얼굴을 빼꼼히 내밀었다.
세희가 까치발을 하며 조심스럽게 거실로 나와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여전히 얼굴에 살이 쏙 빠져 있었지만, 처음 봤던. 우리 집에 처음 데리고 왔던, 그때보다 얼굴이 훨씬 좋아 보였다.
거실 중간에 한동안 가만히 서 있던 세희가 주방으로 가더니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한잔 가득 따라 마셨다.
왠지 그 모습이 조금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식탁위에 아내가 차려놓은 음식을 잠깐 보던 세희가 다시 거실로 나왔다.
그리고......
안방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곤 문을 살짝 열어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세희의 한발이 앞으로 나아가 안방 문을 넘어섰다.
안 방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잠시 그대로 있던 세희는 안방 문을 닫고 거실로 나와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
세희의 몸이 조금씩 옆으로 기울어져, 어느새 머리가 소파 위에 닿아 있었다. 그렇게 세희는 소파 위에서 잠든 듯 쓰러져 있었다.
“오빠! 은비 언니 왔어요.”
뒤에서 미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치우야 왔냐?”
2층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문 앞엔 조금 상기된 얼굴의 승호가 우리를 맞았다. 안쪽에서 좋은 음식냄새가 현관으로 쏟아져 나왔다.
“은비 씨, 오랜만이네요. 잘 지냈죠?”
“네. 승호 오빠! 안녕하세요.”
“조 미나! 너는 얼굴이 왜 그래? 요즘 다이어트 하냐? 얼굴 살 빠지니까 더 예쁘네.....하하하”
“치이~ 원래 예뻤다구요!”
거실엔 있는 커다란 상엔 벌써 음식들이 가지런히 자리 잡고 있었다.
거대한 문어숙회가 통째로 상 중간에 놓여 있었고, 소갈비와 잡채, 여러 가지 전까지 그것을 둘러싸고 있었다.
“뭐 이렇게 음식을 많이 했어? 저녁 한 끼 먹는 건데......어머님은? 3층에 계셔?”
“아니, 엄마 있으면 너희들 잘 못 논다고 일부러 저녁 약속 잡고 나가셨어.”
“제수씬?”
수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매운탕 데운다고 주방에.......여보! 여보! 치우 왔어!!!”
하늘색 뭉게구름이 그려져 있는 예쁜 앞치마를 입은 수연이가 거실로 나왔다.
수연의 얼굴에 오랫동안 그랬다는 듯 편안함이 묻어 있었다.
옅은 화장을 한 듯했지만, 새까만 머릿결과 대비된 창백하기까지 한 얼굴 피부 때문에 짙은 화장을 한 것처럼 보였다.
“치우 씨. 오셨어요?”
“아....네.....안녕하세요....”
수연의 얼굴이 주방의 열기에 붉게 달아올라, 이마엔 작은 땀방울까지 솟아나 있었다.
“언니....안녕하세요.”
“그래....은비야.......”
수연이와 인사를 나누던 아내의 시선이 한쪽이 머물러 있었다.
그 예쁜 앞치마에 가려져 있던 수연의 배가, 표시가 날 정도로 불룩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카페에서 가지고 온 스페인 알리칸테 와인의 고운 빛깔이 여러 개의 와인 잔을 붉게 밝히고 있었다.
“은설 씨도 왔으면 좋았을걸....왜 갑자기 일본으로 갔어?”
“엄마한테 일이 좀 있어서요.”
승호의 물음에 아내가 나지막이 말했다.
“치우야 근데.....세희 씨는 왜 같이 안 왔어? 요즘 세희 씨는 어때? 상 치르고 나서 좀 추스렸어? 카페엔 나와?”
“아니....그게.....”
“세희 씨. 지금 우리 집에서 같이 지내고 있어요.”
내가 머뭇거리자 아내가 내 말을 가로막고 승호에게 대답했다.
순간 수연과 미나의 놀란 시선이 아내를 향했다.
“같이? 아.....그랬구나......”
승호는 아내의 뜻밖의 대답에 더 궁금한 것이 있어 보였지만, 잠시 내 눈치를 보다 이내 포기한 것 같았다.
“수연 언니....이거....”
아내가 핑크색 리본이 달려있는 포장박스를 수연에게 내밀었다.
“뭐야 이게?”
“그냥오기 뭐해서.....선물.....언니 축하해요....”
수연이 박스를 열자, 눈 같은 새하얀 솜 위에 알록달록한 무엇인가가 들어 있었다. 수연이 그것을 꺼냈다.
“어머.....”
수연의 탄식이 들렸다.
아내가 선물로 사온 것은 너무나 예쁜 모빌이었다.
늘어트려진 모빌이 흔들릴 때마다 천국에서나 들을 수 있을 듯한 은은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상을 둘러싸 앉아 있던 모든 사람들이 가만히 그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는 듯 했다.
승호의 입에서 짙은 담배 연기가 뿜어져 옥상 위 하늘 위로 퍼져 나갔다.
“야. 나도 하나줘...”
“안 돼! 인마. 너는 담배피면.....”
“까분다.....가져와.....”
승호는 할 수없이 담배 하나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좋아 보인다......”
옆에 있던 승호가 들을 수 없을 정도로.......독백 같이 나지막이 내뱉은 혼잣말이었다.
“행복하다.....치우야.....”
승호가 내말을 들었을까?
“너한테 고맙다....김 치우”
“니가 나한테 뭐가 고마워.....”
“수연이.........아니다. 아니다.....”
승호가 어느새 담배 하나를 다 폈는지 재떨이 위에 비켜 끄더니, 새로운 하나를 꺼내 불을 붙였다.
“수연이가 그러더라.......”
무슨 말을 하려는지 승호가 잠시 머뭇거렸다.
“예전에 내가 수연이한테 좋아한다고 사귀자고 하니까......
수연이가 그러더라. 자기는 보통여자하곤 다르다고, 더 이상 자기한테 관심 갖지 말고, 좋은 여자, 정상적인 여자 만나서 사랑하라고......
그래서 내가 그랬지.
니가 날 만나기 이전에 뭘 했든지 나는 상관이 없다고 너만 있으면 된다고....
하하....
내가 그러니까 말이야 수연이가......”
승호의 입안에 가득 담겨있던 너무나 진한 담배 연기가 한 번에 뿜어져 나왔다.
“수연이가 그러더라....
자기는 지금까지 수많은 남자들 하고 잤다고....
사랑 없이....아무런 감정도 없이.....그렇게 남자들하고 번갈아가며 관계를 가졌다고.....
그리고....
가끔은....한 남자가 아니라.....두 명...세 명......그 이상의 남자들과 함께 관계를 가졌다고....
자신은 그런 여자라고....
가슴 수술을 한 것도, 다른 남자 유혹해서 자려고 그랬다고....
하하하.......”
승호가 웃고 있었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공허한 승호의 웃음소리에 갑자기 한쪽 머리가 간질간질했다.
그리고 잠시 뒤, 머리에 알 수 없는 고통이 느껴졌다.
승호가 계속 말을 이어갔지만,
그 고통이 멈추질 않았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어떤 장면들이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