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화 ◈
-- --
Apophenia (6)
“그날 이후 참 쉬웠어요. 그 사람하고 같이 잠자리하고 그러는 게.....
어떠한 강요도 없었어요. 그냥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거 같아요. 내가 원해서.....그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고 하니까.....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일거라곤 상상도 못했어요......미안해요......”
어느새 두 눈가가 빨개진 미나가 내 시선을 피해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린 채 말했다.
“니가 뭐가 미안해. 그럴 필요 없어...”
“아마도....어쩌면 그 사람한테서 오빠의 모습을 찾으려 한지도 모르겠어요. 나 참 바보 같죠?”
한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감추려 미나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가느다란 그 두 손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나는 말없이 테이블에 있던 티슈를 몇 장 빼어내 미나에게 전해주었다.
결과가 이렇게 되었지만, 사실 미나가 잘못한 것은 없었다.
사람이 사람에게 끌린다는 건.....어찌 보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카페에 처음 찾아왔던 아내를 보고, 내가 그렇게 끌렸듯이, 미나도 최 진욱을 보고 그랬을 뿐이었으리라....
“세희 언니는요?”
한참을 흐느끼던 미나가 이제야 진정이 좀 되어가는 것 같았다.
“세희도 계속 안 나오다가.....오늘.......오늘 왔어.....”
“세희 언니는 괜찮아요?”
“음.....세희는 몸이 좀 안 좋아 보여서......은비가.....집에 데리고 갔어.”
“네? 어디요? 집에요? 오빠 집에?”
“응.....”
대답을 하고도 지금 집에 있을 아내와 세희가 어떤 광경으로 그 공간을 함께 공유하고 있을지 걱정이 조금 되기 시작했다.
“오빠? 괜찮아요?”
멍하니 있다가 미나의 말에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어서 집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앞서기 시작했다.
미나를 집에 바래다주고 차 엑셀 위에 올려 진 발에 힘이 더욱 들어갔다.
밤 10시.
현관 앞에 멈춰 서서 시간을 확인했다.
번호 키를 누르고 현관에 들어서자, 아내의 향기가 진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항상 그 향기와 함께 나를 반기던 또 다른 처제의 향기는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현관 한쪽에 처음 보는 구두가 아내의 그것과 함께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거실은 불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지만, 집안은 너무나 고요했다.
침실엔 아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조심스레 처제가 머물던 방을 노크하고서 문을 열었다.
침대 위엔 세희가 누워있었다. 잠들어 있는 것 같아보였다.
아내가 침대 곁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아내가 나를 보곤 화사하게 웃었다.
아내의 얼굴이 오늘따라 무척 피곤해 보였다.
“오빠 왔어요? 좀 늦었네요?”
아내가 방에 불을 끄곤 내게 다가왔다.
“세희 씨....좀 전에 잠 들었어요.”
“처제는? 잘 도착했다고 연락 왔어?”
나는 세희의 안부보단 아침에 공항에서 그렇게 떠나버린 처제의 안부가 궁금했다.
“네. 아까 전화 왔었어요. 잘 도착했데요. 오빠한테도 전해 달래요.....”
나는 내심 처제의 전화를 기다렸는데....조금 섭섭했다.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편하게 누워있었지만, 머릿속엔 온통 고달픈 생각뿐이었다.
처제의 얼굴이 떠올랐고,
택배로 도착한 그 사진과 메모가 떠올랐고,
아내의 학교, 미술실에서 귀를 감싸고 고통스러워하던 박 선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오빠. 혹시 불편해요?”
샤워 후 한참 동안 화장대에 앉아 얼굴에 마무리를 하던 아내가 침대에 올라오며 말했다.
“응?”
“세희 씨, 여기 데리고 오자고 한 거......오빠가 불편해하는 거 같아서.....”
아내의 얼굴에 발려진 알 수 없는 화장품 향기가 침대주위를 감싸왔다.
“아니......”
아니라고 말했지만, 별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오빠. 이번 주에 보충수업 끝나니까. 다음 주 정도까지만 같이 있어요. 세희 씨 괜찮을 때까지만......”
아내가 내게 깊게 안겼다.
[으으르릉......으으으르릉......]
평화로운 적막을 깨어 버리는, 소름 끼치도록 생경 맞은 소리에 눈이 번쩍 떠졌다.
[으으으르릉.......으르릉.....]
무슨 소리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지만, 이미 내 온몸에 칼날같이 날카로운 소름이 돋아나 있었다.
사람의 소리가 아니었다. 괴물 같은......그런 소리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나는 드레스 룸에 홀로 누워 있었다.
방 한쪽을 빼곡히 메우고 있는 행거에는 알록달록한 아내의 예쁜 옷들이 걸려 있었다.
[으으으르릉.......으르릉.....]
알 수 없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나는 드레스 룸 문을 열어젖혔다.
거실은 푸른 안개 같은 것이 잔뜩 끼어있었다.
그 안개는.....오래전 그 누군가와 밤낚시를 갔을 때 보았던, 저수지 수면 위를 가득 메워 천천히 흘러가든 새벽의 그 물안개와 같았다.
[으으으르릉.......으르릉.......으아아앙......]
거실 한쪽에 모여 있던 무엇인가가 내게 고개를 돌렸다.
그것은...
크기가 엄청난 새까만 개였다.
그렇게 큰 개는 평생 처음 본 것 같았다.
일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보는 그 개들의 눈에서 살기를 가득 담고 있는 푸른 광채가 번뜩였다.
검은 개 입에선 허연 거품이 연신 뿜어져 나와 거실 바닥으로 진득하게 떨어져 내렸다.
서너 마리의 그 검은 개 중 한 마리가 내게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입을 잔뜩 벌리고 으르렁대는 그 개가 금방이라도 나를 물어뜯어 버릴 것 같았다.
나머지 검은 개들의 시선은 다른 한쪽에 향해 있었다.
그 곳은 바로 침실이었다.
닫혀있는 침실 앞에서 검은 개들이 사납게 으르릉대고 있었다.
굳게 닫혀져 있는 침실에 도대체 무엇이 있길래....개들이 그러는지 궁금해졌다.
한참을 으르렁 대던 검은 개들이 침실 문을 발톱으로 사정없이 긁어댔다.
갑자기 절대 열리지 않을 것 같던 침실 문이 빼곡히 열렸다.
그러자 검은 개들이 새파란 눈을 번뜩이며 열린 침실 문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개들의 입에서 허연 침이, 벌어진 주둥이 사이를 넘어 턱까지 완전히 적셔갔다.
그중 맨 앞에 서 있던 검은 개 한 마리가 침실로 달려들었다.
그리고......뒤에 있던 또 다른 개들도 그 뒤를 따랐다.
[으으으....으으으릉.......]
침실로부터 미친 듯한 개들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아내를 학교에 바래다주고, 카페로 향하는 길이 너무나 갑갑하게 느껴졌다.
세희를 집에 혼자 두는 게 영 마음에 걸렸다.
그렇다고 해서 몸 상태가 좋지 않은 세희를 카페에 데리고 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대학 북문 입구, 건너편에 서서 보니 카페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블라인드가 걷혀진 통유리를 통해 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미나의 모습이 보였다.
“오빠! 굿모닝!”
카페에 들어서자 미나가 웃으며 나를 반겼다.
“왜 나왔어? 계속 푹 쉬지......”
“에잇! 오빠도. 오늘 오빠는 쉬세요. 내가 다 할게....”
어제보다 나아진 미나의 얼굴을 확인하니 다소 마음이 놓였다
오늘따라 카페는 유독 조용했다.
오전에 이어지던 손님들의 발걸음이 오후로 접어들자 뚝 끊겨 버렸다. 지금까지 이런 날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하지만 한편으론, 가끔 이런 날들이 편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느긋한 오후가 계속되자 잡생각들이 다시 떠올랐다.
혼자 집에 있을 세희가 계속 신경 쓰였고, 간밤에 의미를 알 수 없는 그 꿈도 신경이 쓰였다.
한참을 밖을 멍하니 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나야. 잠깐 나갔다 올게.....”
“네. 그러세요....”
Bar에 앉아 있던 미나가 답했다.
카페 문을 열고 나가려다 이제 막 카페로 들어오려는 한 손님과 부딪쳤다.
“죄송합니다. 손님.....”
그 사내가 내 얼굴을 빤히 드려다 보고 있었다.
나이가 나보다 훨씬 많아 보였다.
내 눈길을 끈 건, 그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의 행색까지.....
대학가에 있는 카페에 찾아와 커피와 차를 마실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의 모습은.
내가 장 실장을 처음 봤을 때.
그때 받았던 그런 느낌과 비슷했다.
거칠어 보였다.
말없이 나를 빤히 쳐다보던 그가 나와 문 사이를 비집고 카페로 들어가 버렸다.
시내에 있는 전자제품 숍으로 가서 카페에서 계속 생각하던 그것을 사고, 다시 카페에 돌아온 건 한 시간이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오자, 카페엔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Bar 바로 앞에 있던 테이블에 미나가 뒤돌아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왔는데도, 미나는 아는지 모르는지 그렇게 뒤돌아 서 있었다.
미나의 발밑엔, 하얀 머그컵 조각들이 박살나 있었다.
“미나야!”
놀라 미나를 불렀다.
“아.....오빠...왔어요?”
미나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놀란 것 같기도 하고, 몹시 당황한 표정 같기도 했다.
내가 아는 미나의 정상적이 표정이 아니었다.
“왜 그래.....다쳤어?”
“아니요....”
미나는 쪼그려 앉아 서둘러 깨진 머그컵 조각들을 손으로 하나씩 줍기 시작했다.
“조 미나! 다친다.”
나는 서둘러 안쪽에 있는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고 나왔다.
“손으로 만지지 마!”
미나는 여전히 그곳에 쪼그려 앉아 있다가 내가 다가가자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빨개진 얼굴의 미나는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은 그런 얼굴이었다.
“무슨 일 있었어?”
깨져버린 머그컵 파편조각들을 꼼꼼히 치우고서, 미나에게 물었다.
“아니요. 제가 치우다가....떨어트렸어요.....”
그 순간, .나는 알아차렸다. 미나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말없이 자신에게 머물러 있는 내 시선을 미나는 불편해하고 있었다.
“나 방에 좀 있을게....”
그런 미나를 두고 방으로 들어왔다.
내 손에 들려 있던. 작은 카메라.....CCTV를 침대에 던져 놓고, 책상에 있던 노트북을 켰다.
노트북 바탕화면에 깔려있던 Vision Cam을 실행했다.
마지막으로 녹화된 파일을 실행하자 바닥에 깨져있는 머그컵 파편을 쓸어 담는 내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내가 방으로 들어오는 뒷모습이 보였다.
내가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홀에 홀로 있던 미나가 얼굴을 감싸 안았다.
울고 있었다.
미나가 울고 있었다.
파일을 뒤로 돌렸다.
[이 씨발년이!!! 존나게 비싸게 구네..,,..개 같은 년이.......캬악 퉤!!!]
내가 카페를 빠져나갈 때.
그때 마주쳤던 그 사내가 미나를 보고 있었다.
사내를 보고 있던 미나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바닥엔 이미 깨져버린 머그잔의 하얀 파편들로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