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2화 (142/177)

Un Ballo in Maschera (19)

[오....오빠!]

어렴풋이 들리는 소리에 화면이 빠르게 이동했다.

장 실장의 시선이 약국을 드나드는 출입구를 향해 있었다.

그곳엔 한 여자가 잔뜩 겁먹은 표정을 하곤 가만히 서 있었다.

[어......어...세희 왔어? 올라가 있어. 

오빠도 정리하고 올라 갈 거야.]

한껏 톤이 낮아진 최 진욱의 다정한 소리가 들렸다.

몹시 불안해하는 여자의 그 눈빛이 정지된 것처럼 화면 속에 머물렀다. 잠시 후 여자가 안쪽에 있는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갔다.

여자의 마지막 뒷모습마저 화면에서 사라지자 시선이 다시 최 진욱을 향했다.

[장 실장님. 우리 이러지 말고.....

솔직해 집시다.

이 은비.....지금 제정신이 아닙니다.

나 라도....이러지 않았으면, 

그 여자 지금 어떻게 됐을지 몰라요.

내가 주는 약이라도 없었으면, 

그 여자 더 이상 맨 정신으로 못 버텨요] 

[그래서. 김 사장 와이프 한테 계획적으로 접근했어?

김 사장 누워 있을 때, 니 마음대로 건드리려고?]

[장 실장님. 나도 이렇게 될지 몰랐어요.

이렇게 된 마당에....솔직하게 말해 봐요.

장 실장님은 이 은비 따라다니면서 한 번도 그런 생각 한적 없어요?

그런 여자 따라다니면서 한번.....건드리고 싶다 그런 생각 안 해 봤냐 말입니다.

내가 솔직히 말해 볼까요?

내가 이 은비 처음 본 건....

그 파타야에서 그 새끼하고 섹스하는 동영상이었어요.

그날 밤 내가 뭐한지 알아요?

웃기지만 그 동영상 보면서.....

수도 없이 자위를 했어요.

치우는 다른 방에 자고 있는데....

그런데 그런 여자를 실제로 만났다고 생각해봐요.

상상으로 자위만 하던 여자를 실제로 만나서

그걸 한다고 생각해봐요. 어떨지....]

[최 진욱이 이 미친새끼야!

니가 지금 씨부리는 게 말이 되는 소리야?

니가 니 입으로 평생 은인이라고 하던 

동생 와이프를 그것도 사고 나서 병원에 

누워있는 사람 와이프를 건드려?] 

[장 실장님. 여전히 솔직하지 못하네.

그럼 이렇게 물어 볼까?

만약 니가 내 입장이라면 안 그럴 자신 있어?

저 여자 혼자 저렇게 있는데. 그냥 가만히 둘 거야? 자신 있어?

[최 진욱이.....너.......하늘이 무섭지 않아?

니가 사람 새끼야?

김 사장 깨어나서 모두 알아버리면 어쩔 건데?

너 새끼.......이따위로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김 사장 깨어나면 얼굴 똑바로 볼 수 있어?]

[가망 없습니다. 치우 못 깨어나요.

지금 그 상태론 절대.....못 일어나요.

의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이러지 맙시다.

며칠 있다가 자리 한번 만들어 줄 테니까...

이 은비 한번 만나 봐요.

막상....실제로 그 여자 격어 보면......

장 실장님 생각이 바뀔 수도 있으니까...] 

[최 진욱이.....너 이새끼........

다시는 김 사장 와이프한테 접근하지 마라. 

만일 다시 내 눈에 띄면 절대 가만 안 둔다....

쓰레기 같은 새끼...]

화면이 빠르게 빙글 돌더니 약국 입구가 보였다.

두터운 커다란 손이 유리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미친 새끼!!!]

한 손이 올라오더니 안경을 잡아 아래로 벗기곤 영상이 끝나버렸다.

룸에는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갑자기 연달아 피워댄 담배 때문에 머리가 어질어질 했다.

[김 사장....괜찮습니까?]

장 실장이 조심스런 목소리로 내가 괜찮은지 물었다. 

그 물음에, 지금 내 표정이 어떨지 상상을 해봤지만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내가 보기엔 장 실장의 얼굴이 괜찮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담담했다.

“근데.....김 사장님. 

벌써 이렇게.....독한 술 마셔도 됩니까?”

그가 내게 술을 따라주다 멈칫했다.

“하....”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왜냐하면 나도 이런 독주를 마시면 되는지, 안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행인지 내 몸은 그것을 그리 거부하진 않는 것 같았다. 

장 실장이 또 다시 무엇인가를 망설이고 있었다.

술을 몇 차례 마시자 룸이 다시 조용해졌다. 

룸 전체를 뿌옇게 둘러싸고 있던 짙은 담배연기가 천정 구석에 달린 작은 환풍기를 통해 빠져나가자 주위가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최 진욱이하고 그 일이 있은 후.....”

그가 또다시 속으로 망설이던 무엇인가를 알려주려 하는 것 같았다.

“병원에 매일 살다시피 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때는 단지.....누워있는 김 사장님이 마음에 걸렸다는 거......아마 그 이유일 겁니다.

며칠 동안 최 진욱이는 얼굴도 안보이더군요.

그런데 한 날...

그 벤치에서.....기억나죠? 병원에서 나하고 만났던 날....그 벤치......

그의 말에 자정이 지난 그때 아내가 홀로 담배를 피고 있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점심때가 좀 지났을 시간인데......거기서 은비 씨 혼자 울고 있더라고요. 그것도 아주 서럽게.....지나가던 사람들이 다 쳐다볼 정도였으니까요.

한참을 그랬어요. 거기서......

나는 그때 뭔가 잘 못 된지 알았어요. 

김 사장님이......절명 한 건지 알았다니까요. 그만큼 서럽게 울었어요. 오랫동안.....

놀라서 병원에 올라가 확인해보니까.

그날 담당 교수가 불러서 은비 씨가 갔는데...

이제 그만 준비하라고 했답니다. 희망이 없다고. 못 깨어난다고......

저렇게 연명하는 것도 어쩌면 환자분이나 가족 분들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니 선택을 하라는 거였죠.

그 소리 듣고 나니까. 

이해가 되더라고요. 은비 씨가 왜 그렇게 혼자 서럽게 울고 있었는지......”

담담했던 내 마음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다.

아무 지워버리려 해도 자꾸 생각이 났다. 

그 벤치에서 세상을 잃은 듯, 놓아 울고 있는 아내의 그 초라한 모습이..... 

나는 술을 마시는 척하면서 조금 젖어있는 눈가를 살며시 닦아냈다.

“그런데....그 날......”

말을 멈춘 장 실장의 입술이 조금씩 떨렸다.

“그날 저녁 늦게.......

병원에서 나오더라고요. 은비 씨가...

그런데.....차림세가.....옷 입은 거 하고 화장이...

평소에 병원에 있을 때 내가 봐온 모습하곤 너무 달랐어요. 

어디 중요한 모임에 가는 것처럼 그렇게 옷을 차려 입었더라고요. 노출도 좀 심한.....

은비 씨가, 차를 타고 병원을 나가 길래 따라 갔습니다.

그때가 밤 10시가 넘은 시간이었어요.

차가 시내 중심가를 계속 빙빙 돌 더라고요.

같은 길을 계속 반복해서....

한 시간도 넘게 그렇게 계속.....

어디로 갈지를 모르는 것처럼 그렇게 방황하더라고요.

결국엔 여러 번 지나쳤던 곳에, 은비 씨 차가 멈췄어요. 그러더니 주차를 하고 어디 지하로 내려가더라고요.

병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중심가에 있는 술집.....양주하고 맥주 파는 Bar 였어요.

나도 서둘러 그 술집에 내려가 보니까. 은비 씨가 사람이 잘 안 보이는 구석 쪽에 혼자 앉아 있더라고요. 

평일 밤이라 그런지 술집에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어요. Bar에 혼자 온 손님들 두어 명 있고, 한 테이블에 3명 정도 앉아 있고.....그게 다였어요.

은비 씨가 위스키 작은 거를 시켰는지 직원이 안주 같은 거하고 술을 그쪽 테이블로 가져다주더군요.

그때....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답답해서 술 마시러 왔나보다.....

사실 은비 씨, 따라오면서도 내심 불안 했습니다.

의사가 했던 말 때문에 혹시나......나쁜.....그럴까봐....

은비 씨가 혼자 술을 마시더군요. 급하게....

그냥 스트레이트로.....그 독한 술을.....그렇게 마셨어요.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것처럼 여자 혼자 그러고 있으니까. 

술집에 있던 모든 남자들이 시시덕거리면서 은비 씨 보고.....더군다나 은비 씨 옷차림하고......보통 얼굴은 아니니깐요. 더욱 시선을 끌었던 거죠.

나도 맥주 한잔하면서 그렇게 있었어요.

그런데 거기 전화가 잘 안 되는 겁니다. 깊은 지하라서 그런지....전화가 계속 왔는데, 자꾸 끊겨서 할 수 없이 1층으로 올라갔어요.”

녹음기가 플레이되다가 갑자기 멈춘 듯, 

지금 그의 모습 그러했다.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다.

나를 보는 그의 표정엔.....슬픔, 연민.....그리고 참담함까지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다. 

“하아........이런 거까지.....”

그가 깊은 한 숨을 쉬곤 담배를 꺼내려다.....다시 담뱃갑에 밀어 넣었다. 

“전화는 자꾸 오고....

급하게 처리할게 있어서 전화를 받으러 갔습니다. 

1층 그 술집으로 내려가는 입구에서 통화를 했어요. 

생각보다 통화가 길어져서......

한 30~40분정도 그렇게 있었던 거 같습니다.”

그가 내게 향해 있던 노트북을 자신에게 돌려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다.

“통화를 하고 다시 지하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은비 씨가...없었어요.....그 자리에....”

테이블 위에서 움직이던 마우스가 멈췄다.

“김 사장님.....이....이건....안 보셔도 됩니다.

그게....좋을 거.......같아요.....”

마치 애원이라도 하는 그런 눈빛 같았다.

나는 그를 향하고 있던 노트북을 다시 내게로 돌렸다.

화면이 멈춰있었다.

노트북 터치패드를 한 번 두드리자 영상이 시작됐다.

재즈풍의 모던 팝이 잔잔하게 흘러나왔다.

조금 떨어진, 하지만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앉아 있는 아내의 모습이 보였다.

소매가 없는, 미니 네이비 색상의 타이트한 원피스였다.

테이블 아래,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아내의 깊은 허벅지 사이가 완전히 드러나 있었다.

조금 전 룸에 들어왔던 은서라는 어린 여자가 입었던 가슴이 깊게 페인 그 홀 복과 비슷해 보였다.

화장이 무척 진했다.

내게 익숙한 아내의 화장과는 조금 달라보였다. 정성들여한 화장은 아닌 것 같았다.

아내는 얼굴에 살이 많이 빠져있었지만, 무척 예뻤다. 

하지만 아내의 화장과.....옷차림엔 고급스러움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진한 퇴폐미만이 가득 차 있었다.

술집에 앉아 있던 남자들이 흘깃흘깃 아내가 있는 곳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아내를 몰래 훔쳐보는 남자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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