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1화 (141/177)

Un Ballo in Maschera (18)

맞은 편 테이블,

그가 테이블에 바짝 붙어 앉아, 말없이 내 얼굴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거친 숨이 조금씩 잦아 들어갔다.

무엇인가 후회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말없이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복잡한 감정들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룸에 들어오자마자 오랫동안 가슴에 답답하게 담고 있던 말들을 한꺼번에 뱉어 냈던 그의 눈빛이 후회로 가득 차 있었다.

노크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그러자 나를 멍하니 보던 그가 정신을 차린 듯, 눈을 몇 번 크게 껌뻑였다.

처음 나를 이 방에 안내했던 어린 청년이 얼음을 가득담은 바스켓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상....상훈아. 내 차에 가서 노트북 좀 다져다 줘....”

“네. 알겠습니다.”

그가 청년에게 자신의 차키를 내밀었다.

청년이 룸을 빠져나가자 그의 눈 속이 바삐 움직였다. 

그는 무엇인가를 마음속으로 정리하고 있는 듯 했다. 

잠시 후, 그 청년이 노트북을 그에게 전해주곤 룸을 빠져나갔다.

“그날....”

그가 한참을 망설이다 입을 땠다.

하지만 그는 다시 침묵에 빠졌다.

“담배 있어요?”

내 말에 그는 셔츠 앞에 달린 불룩한 주머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 내가 있는 테이블 쪽으로 밀었다. 

담배 연기가 짙은 안개가 퍼지듯 천천히 번져 나갔다. 

“그 날....사고 났던 날...

김 사장님하고 마지막으로 통화했던 그때. 

오랜만에 만난 친구 놈하고 밥 먹고 있어요.

마침 피곤하기도 하고 하루 쉬려고 마음먹었는데.

오후에 사무실에서 자고 있었는데, 꿈이....

꿈에서 자꾸 이상하게 보이는 겁니다.

찝찝한 그런.....

영 기분이 그래서 가음CC 쪽으로 올라갔어요.

가는 도중에 GPS로 확인해보니 멈춰있던 그 새끼 차는 산에서 이미 내려오고 있고...” 

그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갑자기 피어오른 담배연기가 눈에 들어갔는지 그의 눈가가 더욱 찌푸려져 있었다. 

“사고 뒷이야기는 지난번에 병원 갔을 때, 이미 말했으니 아실 거고......

갑자기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서....그땐 나도 참.......후......“ 

그가 진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담배를 손에든 채로 독한 위스키를 천천히 입에 털어 넣었다. 

“나도 며칠 정신이 없었죠. 

그런데. 우리가 처음 여기서 만났을 때, 

김 사장님이 했던 말이 자꾸 맘에 걸렸어요.

처제 분하고.....와이프 분 관련해서....

내가 김 사장님한테 한 약속도 있고 해서, 

나도 매일 병원에 계속 붙어 있었어요.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길까봐.....

다행히 별 다른 일이 없었어요.

처제 분이나. 와이프 분이나....

두문불출, 병원에만 계속 있었으니....

아마 사고 나고 두 달 정도 지났을 때였어요.

최 약사.....최 진욱이가 좀 만나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날 약속을 잡고 만나러 갔어요.”

[아이고, 최 약사님 일찍 와계시네....]

[하하...안녕하세요.]

[웬일로 갑자기 이렇게......]

[뭐, 오랜만에 술 한 잔 하려고 하는 거죠.]

“처음에는 그냥 일반적인 술자리였어요. 그러다가 술이 좀 들어가자 자연스레 김 사장님이야기도 나오고, 그 새끼 이야기도 나오고.... ”

[장 실장님. 이제.....그만합시다.]

[네? 무슨....]

[그 새끼 조사하는 거 당분간 그만합니다]

[아......왜 갑자기....]

[치우도 저렇게 됐고, 정리 좀하고 벌어진 일은 우선 추슬러야 될 거 같아서요. 약속했던 금액은 고생하셨는데 이번 달까지 쳐서 드리겠습니다] 

“내 생각도 최 진욱이 말대로 그러는 게 맞는 거 같았어요.

김 사장님은 병원에 의식 없이 누워있고, 와이프 분이나 처제 분, 둘 다 병원에 꼼짝없이 붙어 있고......이런 상황에서 계속 일을 하는 게, 무의미하다고 판단을 했죠.

술 먹은 그날 밤, 최 진욱이가 바로 의뢰비를 넉넉히 입금을 했어요. 

그래서 나도 다음날 부터 더 이상 병원에 안 나갔어요.

그러고 나서 한 2주정도 다른 일 한다고 정신 팔려 있는데. 

자꾸 병원에 누워있는 김 사장님이 마음에 걸리는 겁니다. 꿈에서도 자꾸 보이고....

김 사장님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해서 어느 날 저녁에 병원에 찾아갔어요.

간호사만나서 물어보니 김 사장님은 여전히 의식이 없다고 하고.....와이프 분도 그렇게 병원에 붙어있고...

병원에서 빠져나와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고 있는데, 익숙한 차 한 대가 주차장에 들어오더라고요,

최 진욱이 차였어요.

최 진욱이가 병원으로 들어가더라고요. 그 전에도 최 진욱이가 병원에 자주 왔어요. 김 사장님 병문안 왔을 거라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그런데 참....희한하죠.

형사 생활을 하다보면 알 수 없는 무슨 감이라는 게 있어요.

다시 올라가보니, 최 진욱이가 병실에 들어가더라고요.

병원 복도 끝에 있는 의자에 앉아 기다렸어요. 그때가 밤 9시가 넘은 시간이었습니다.

거의 한 시간 반 정도 기다리니까, 최 진욱이가 벌게진 얼굴로 나와서는 한동안 병실 앞에 서서 다시 들어갈까 말까 고민하는 것처럼 그렇게 서 있더라고요.

최 진욱이 손에 하얀 종이 같은 게 뭉쳐져서 가득 들려 있었어요. 병실 앞에서 고민하든 최 진욱이가 돌아가려는지 결국 반대쪽,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가더니.....

복도에 있던 쓰레기통에 손에 들고 있던 걸 버리더라고요.

그쪽으로 갔어요.

김 사장님 병실 앞을 지나치는데......무슨 소리가 작게 복도까지 들리더라고요.

병실 문을 살짝 열었더니...

우는 소리였어요.

김 사장님 와이프 분이 흐느끼는 소리였어요.

최 진욱이가 빠져 나간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서 좀 전에 쓰레기통에 버린 걸 확인을 하니.....

하얀 티슈였어요. 전체가 엉망으로 축축하게 젖어있는.....

근데......

손에 닿는 느낌이나.....냄새가.....

얼마나 젖어있는지

그....그거였어요.

정액....”

그가 말을 끊고서 참담한 표정으로 잠시 내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내가 무슨 오해나 잘못된 상상을 하는 건 아닌가하고 수십 번을 다시 생각했어요. 내가 김 사장님하고 최 진욱이가 어떤 관계인지 잘 아는데...

근데...그 상황이.....

그래서 그날 밤 마음을 먹었어요. 

병원에 당분간 다시 나와야겠다고....

며칠 후 늦은 밤에 최 진욱이는 병원에 다시 왔어요. 병실에 들어갔다가 몇 분도 안돼서 나오긴 했지만....

근데 최 진욱이가 주차장에 있는 차에 올라타더니 안가고 그대로 서있는 겁니다.

한 삼사십 분 그렇게 있었나....김 사장님 와이프 분이 주차장 쪽으로 나오더니 그 차에 탔어요.

다시 한참 동안 그렇게 있다가......갑자기 차 문이 열리더니, 김 사장님 와이프 분이 내려서 구석에서 오바이트를 하더군요.

최 진욱도 내려서 김 사장님 와이프 분, 등 두드려 주고....

걷는 게 좀 이상 했어요. 비틀 거렸어요. 와이프 분이....

분명히 최 진욱이 차에 올라 탈 때는 걸음걸이가 괜찮았거든요.

최 진욱이가 부축해서 다시 와이프 분 조수석에 태우고. 자기도 차더니.........

잠시후에 갑자기 차가 움직였어요.......그 자리에서....흔들렸어요.

내가 보기엔 차 안에서.........” 

룸에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술을 아무리 마셔도 내 정신은 흐트러짐 없이 더욱 또렷해져가고 있었다.

그가 말을 계속 이어갈지 말지를 고민하는 것 같았다.

나는 비워진 그의 잔에 말없이 술을 채워주었다.

“휴우.......”

그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도 내 잔에 술을 가득 채워주었다.

테이블위에 내 스마트폰이 빛을 발했다.

저장되어있지 않은 이름 없는 번호가 반짝였다.

부재중 전화가 8통이나 와있었다.

그의 시선이 스마트폰에 향해 있었다.

나는 스마트폰을 집어 들어 더 이상 빛이 새어나오지 않게 테이블에 뒤집어 놓았다. 

“그날 밤, 그 일이 있은 며칠 후에 최 진욱이를 찾아 갔어요. 약국에.......”

그가 테이블에 올려져 있던, 노트북 전원을 눌렀다.

잠시 후 노트북 액정에서 비치는 밝은 빛이 그의 얼굴에 가득했다. 

그가 빠르게 마우스를 움직이다가 노트북 화면을 내 쪽으로 돌려놓았다.

그러자 밝게 빛나던 노트북 화면이 움직이고 동시에 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에 하려니 복잡하네....]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노트북 화면에 그의 얼굴이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차에 달려 있는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얼굴에는 어색한 뿔테 안경이 씌어 있었다.

그가 그 안경을 움직일 때 마다 화면이 흔들렸다.

“안경에 달린 소형 카메랍니다.”

맞은편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시선에 따라 화면이 움직였다.

어둠이 깔린 도로에 약국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으로 약국 앞은 대낮처럼 환했다. 

차에서 내려 문을 닫았다.

그가 걸을 때마다 화면이 조금씩 흔들렸다. 하지만 시선만은 그 약국을 향해 있었다.

[어!!!]

약국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안쪽에서 흰 가운을 입은 남자가 놀란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장 실장님? 웬 안경을.......하하하...]

[최 약사님 잘 있었어요? 지나가던 길에 생각나서 들렸어요.] 

[장 실장님 안경 쓰니까 더 젊어 보이네요]

[아이고....나이 드니까 눈이 침침해서........바빠요?]

[아닙니다. 이제 닫고 정리하려고요. 

잠깐만 계세요. 문 좀 닫고....]

최 진욱이 병에 담긴 드링크를 그에게 하나 내밀고는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화면이 바삐 움직이는 그를 그대로 따라가고 있었다.

약국을 환하게 밝히던 불빛이 하나씩 사라져가기 시작했다.

[장 실장님. 식사했어요? 밖에 가서 간단하게 소주나 한잔 할까요?]

[아니요. 아니요. 잠깐 온 겁니다. 물어볼 말도 있고 해서....]

[네? 무슨.....]

[요즘 김 사장님은 어때요? 병원에 마지막으로 간지가 한 참 되서....]

[아....뭐 똑같죠. 여전히......의식 없이.....]

[김 사장님 와이프 분은?]

화면을 가득 채운 최 진욱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병원에 계속 있다가 이제 학교 나간다고 하더라고요. 

참 안됐죠......어린 나이에...이제 겨우 스물일곱인데...]

[참 사는 게 그렇죠? 뒤에서 몰래 나쁜 짓하는 새끼들은 잘 처먹고 잘살고.....착하게 사는 사람들은 고생만하고.....

참 세상이 좆같은 거 같아요. 그렇지 않아요 최 약사님?]

[네? 무....무슨......]

순간, 최 진욱의 표정이 변했다. 

최 진욱의 굳은 얼굴이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적막에 빠진 그 몇초가 내겐 무척 길게 느껴졌다.

[최 진욱이.....개새끼야! 

너......김 사장 와이프 건드렸지?

약 먹이고.........건드렸지?]

니가....어떻게.....니가 인간이야!!!]

노트북으로부터 새어나오는 벼락같은 고함소리가 룸에 가득 찼다.

얼어붙은 듯, 굳어 있던 최 진욱의 표정이 조금씩 풀렸다.

[어떻게 알았어? 미행 한 거야?]

최 진욱의 얼굴엔 옅은 웃음기까지 드러나 있었다.

[이....이 개새끼가....]

[왜? 주인 없는 거......좀 건드리면 안 돼?

아니면......배 아픈 거야? 

개나 소나 건드리는 거....

먹음직 한 거, 나 혼자 몰래 먹으니....

배 아파서 그런 거야?]

[뭐....뭐.....이 새끼가 돌았나....]

[솔직히 말해봐. 그만하라고 돈까지 다 줬는데....

아직도 어슬렁거리는 이유가 뭐야?

장 실장......

너 지금 딴생각하고 있지?

너도 이 은비...건드리고 싶어서...

한번 어떻게 해보려고 지금 이러는 거지?

[이 씨발...이....미친새끼가!!!!!]

웃고 있었다.

노트북 화면안의 최 진욱이 나를 보며 활짝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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