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7화 (137/177)

Un Ballo in Maschera (14)

차가 대학의 커다란 교문 앞에 들어서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푸르디푸른 이 계절이 한 중간, 대학 캠퍼스의 모습은, 화사한 옷으로 갈아입고서 예쁘게 단장 한 여인의 모습을 닮아있었다. 

차가 교문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익숙한 주차장에 들어섰다.

가벼운 옷차림의 대학생들이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은 채, 교정을 한가하게 거닐고 있었다.

차 시동이 꺼진지 한참이 지났지만 나는 그대로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그날...

자정이 넘어 처제와 함께 집에 돌아왔던 그 날....

나를 보던 아내의 얼굴이 지워지지 않았다.

[오빠. 먼저 자요.

그리고 은설이...이리와, 이야기 좀 해.]

아내는 거실에 서있는 나와 처제를 남겨두고 그렇게 작은 방으로 횡하니 들어가 버렸다.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우물쭈물하던 처제도 아내가 사라진 그 방으로 들어갔다.

침실에서 아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렸지만, 그날. 끝내 아내는 침실에 돌아오지 않았다.

아침에서야 아내와 처제의 얼굴을 볼 수 있었지만.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둘 다 표정이 너무나 좋지 않았다. 

아내가 출근하고 처제에게 언니하고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봤지만, 처제는 고개를 가로저으면 아무 일도 없었다고만 말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며칠 후.

나는 아내에게 이젠 카페에 나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내는 퇴원 당시 담당 교수가 말한 것처럼, 2-3주 정도 더 집에 머문 후, 한 달을 꽉 채운 후 내가 외부 활동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내는 내 고집을 더 이상 꺾을 순 없었는지, 마지못해 허락을 했다. 

단. 당분간 카페에서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오후5시 까지는 집에 돌아오라고 신신당부했다.

신호등 앞에 서서 그렇게 그립 던, 내 카페를 바라봤다.

카페 안에서 분주한 움직임이 통유리를 통해 고스란히 보였다. 

대학 졸업 후 4년 동안 다니던 그 회사를 관두고, 단돈 몇 천만 원으로 어렵사리 이곳에 카페를 열었던 그 첫날의 흥분과 떨림이 고스란히 기억났다.

“어머! 김 사장님.....”

신호등을 건너 인도에 올라서자, 카페 옆에서 문구점과 슈퍼를 함께 운영하던 아주머니가 나와 내손을 꼭 잡았다.

“아이고....이제 괜찮아요? 얼마나 걱정했는데.....”

“하하하.....감사합니다. 여전하시네요.....”

“참 다행이다. 얼굴에 살은 많이 빠졌네. 젊은 사람이.....”

바로 저기 보이는 내 카페에 어서 빨리 들어가고 싶었지만, 아주머니가 내 손을 꼭 잡고서 한동안 놓아 주지를 않았다.

[딸랑.....]

은은한 방울 소리와 함께 카페 문이 열렸다.

이른 아침 아내의 출근길에 동행해 이미 도착해 있는 처제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테이블에 하얀 머그컵을 전해주던 미나......

그리고 또 다른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Bar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던 그 여자가 떨리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20대 중반을 갓 넘어 보였고, 얼굴 이목구비가 너무나 화려해 연예인 같아 보이기도 했다.

“오빠!!!”

그 여자가 내게 다가왔다.

“오빠.....”

여자가 문 앞에 서 있는 내게 안겼다. 

“어......”

두 팔로 내 목을 두른 여자의 상체가 내 몸에 깊게 파고 들었다.

테이블에 앉아 있던 손님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다.

“오빠....괜찮아요? 병원에 가려고 했는데......

우리 오빠가 못 가게 했어요....

흐으흑...”

여자가 울음을 터트렸다.

얇은 블라우스 속에 숨겨져 있는 물컹한 여자의 가슴이, 내 가슴에 그대로 느껴졌다. 

나는 당황한 채, 처제의 눈치를 봤지만. 처제는 화가 나거나 놀란 것 같지도 않았다.

그냥 어색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것은 미나도 마찬가지였다.

예상치 못한 이 상황 때문에 내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졌다.

카페 안쪽에 있던 내방에 들어서자 이상하게도 옅은 아내의 향기가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방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았던 것처럼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손으로 책상 위를 훑었지만, 누가 매일 청소를 한 것처럼 손가락에 먼지 한 톨 묻어나지 않았다.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전원을 켜자, 화려한 인터페이스의 알록달록한 화면 대신, 검은 화면에 흰색의 영어가 주르륵 쏟아져 내렸다. 

모든 데이터가 지워져 버린 노트북에 윈도우를 설치하기 위해 책상 서랍을 뒤져 복구 USB를 찾았다.

가장 아래쪽 서랍에, 언제가 복구 이미지를 저장해 놓았던 검은 USB가 보였다.

시간이 지나자 노트북 액정에 화사한 그림들로 가득 찼다. 굵게 금이 가 있는 액정이 조금 신경 쓰였지만 사용하는 데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내 시선은, 

나도 모르게 복구 USB가 들어 있던 가장 아래쪽 서랍 쪽에 계속 눈이 갔다.

서랍은 굳게 닫혀 있었다.

나는 서랍을 다시 끝까지 열었다.

가장 안쪽에 하얀 봉지가 보였다. 

그것을 집어 들어 책상에 올려놓았다.

새하얀 봉투에 파란 글씨로 약국 이름이 예쁘게 적혀 있었다.

그 봉투 안에는 몇 종류의 약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가루로 된 것들과, 알약으로 된 것들.....

그리고 밀봉된 채, 날카로운 바늘이 달린 작은 주사기 몇 개도 함께 들어있었다.

잔잔한 음악 소리가 들렸다.

노트북 화면을 보니, 

벌써 복구가 완료되어 바탕화면이 열려있었다. 

노트북 화면 속엔, 

정성들여 화장을 한 아내가 나를 보며 너무나 해맑게 웃고 있었다.

바탕화면에 몇 가지 프로그램이 설치되어 있었다.

‘Vision Cam’

카페 내부 몇 곳을 환하게 비추는 방범 목적의 CCTV 프로그램이었다.

그것을 실행했다.

서버에 접속하자 수백 개의 파일들이 일자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가장 처음 저장된 파일의 날짜를 보니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6개월 전이었다.

하드에 저장할 수 있는 최대 용량은 최근 6개월이고. 그 이전의 파일은 자동 삭제가 된다는.....

가게오픈 당시 CCTV를 설치한 기사의 말이 떠올랐다.

첫 파일을 실행했다.

카페엔 손님이 가득했다.

미나와 그리고 좀 전 내게 안겼던 이름 모를 여자가 분주하게 카페를 휘젓고 다니고 있었다.

미나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없는 카페에 남겨진 미나.......

미나는 저 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내겐 이 영상들이 그 어떤 위대한 영화보다도 더욱 소중한 나의 보물이었다.

시간은 흐르고....

플레이되는 동영상의 시간도 그렇게 말없이 흘러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영상의 플레이 배속이 조금씩 빨라졌다.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이곳, 

현실의 시간과, 동영상 속에 담긴 과거의 시간의 접점이 조금씩 줄어 들어가고 있었다.

동영상 속, 빠르게 기계처럼 움직이던 사람들의 모습이 조금씩 느려져, 카페엔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암흑으로 둘러싸인 카페 내부를 적외선으로 비추던 화면에 갑자기 환한 빛이 들어왔다.

카페 문이 열리고, 불이 켜졌다.

“어.....”

순간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나는 빠르게 지나가던 화면을 멈추고, 다시 뒤로 돌려 정상속도로 플레이를 했다.

카페 문 앞에 검은 실루엣이 보였다.

카페 문이 열리고, 환한 불이 다시 켜졌다.

카페에 들어서 있는 사람은 아내였다.

내가 기억하던 그 사랑스런 긴 머리칼을 부드럽게 늘어트린 아내였다. 

동영상이 가리키는 시간은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5개월 전쯤 촬영된 파일이었다.

화사한 원피스를 입은 아내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날, 아내가 자리 잡았던 창가에 앉아 있었다.

아내의 어깨가 조금씩 들썩거렸다.

울고 있는 것 같았다.

아내가 Bar 쪽으로 향했다.

몸에 꼭 달라붙어 있는 원피스 사이 아내의 윗가슴 내려다 보였다.

걸음걸이가 위태해 보였다. 아내의 얼굴이 빨갛게 변해 있었다.

아내는 Bar 안쪽에 있던 와인 한 병과 잔을 꺼내 다시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아내는 그렇게 홀로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볼륨을 끝까지 올렸지만, 고작 들려오는 소리는 아내의 떨리는 숨소리와, 이따금씩 달그락 대는 와인 잔에서 울리는 소리뿐이었다.

와인이 반 정도 남았을 때.

아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비틀거리며 안쪽으로 걸어갔다.

아내가 사라진 곳은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이 방이었다.

내 마음이 다시 처참하게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내가 병원에서 의식 없이 시체처럼 누워있을 때.

아내는 홀로 이 곳을 찾아와 술을 마시고.......내가 그렇게 아끼던 이 방에서 머물렀다.

동영상이 다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 했지만, 아내의 모습이 보일 때마다 나는 한순간도 놓치지 않으려, 속도를 조절했다.

아내는 일주일에 한 번....많을 땐 두 번.......

이 카페에 찾아와 홀로 와인을 마시고....

이방에서 잠을 잤다. 

7개월여 만에 찾아온 이 방에서 아내의 향기가 옅게 배어 있는 것이 그런 아내 때문이라는 사실에 가슴이 미어졌다.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 벌써 오후였다.

이 방에 들어올 때, 좀 쉬고 싶다는 말을 처제에게 해서인지 다행히 그 누구도 나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았다.

반복되는 영상에 눈이 아파, 빠르게 플레이 되던 동영상을 멈추려고 마우스를 움직였다.

동영상에 반짝이는 금빛이 보였다.

빠르게 움직이던 동영상을 뒤로 돌렸다.

불이 꺼진 카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이내 불이 켜졌다.

빛나는 황금색의 머리칼이 그 작은 얼굴을 부드럽게 감싼 채, 어깨 조금 위에 닿아 있었다.

아내였다.

아내가 머리를 잘랐다.

지금 아내의 헤어스타일과 비슷해 보였다.

동영상 찍힌 날은 4개월 전쯤이었고, 시간이 새벽 2시 43분이었다.

미니스커트였다.

무릎 위를 한참 올라간 작은 도트무늬 미니스커트가 아내의 엉덩이와 치골 부위만을 아슬아슬하게 감싸고 있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했을 뿐인데 아내의 볼록한 치골 부위가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늘씬한 아내의 다리가 그 미니스커트와 대비되어 현실 같지 않게 더욱 길게 뻗어 있었다.

피부처럼 아내의 긴 다리에 밀착해 있던 검은빛 스타킹이 군데군데 찢어져 아내의 뽀얀 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아내는 몸에 딱 붙는 남색 재킷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재킷 안쪽의 블라우스는 무슨 이유로 풀어헤쳐 졌는지, 아내의 가슴골과 블랙 브래지어 라인까지 드러나 있었다.

가만히 서 있던 아내가 이내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안쪽으로 향했다.

술에 취한 것 같아 보였다.

아내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와인과 잔을 꺼내와 창가로 갔다.

그리고 말없이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다.

[흐흑.....흐흑......오빠.......]

노트북 스피커를 타고 떨리는 아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내 눈가가 잠시 시큰거리더니 노트북 화면이 어른어른 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카페 문이 열렸다.

이전과는 다르게 아내가 카페에 들어설 때, 카페 문을 잠그지 않았던 것 같았다.

아내의 시선이 방금 막 카페 안으로 들어선 사람에게로 천천히 이동했다. 

기다란 와인 잔, 유리 기둥을 잡고 있던,

새빨간 매니큐어를 바른 아내의 손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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